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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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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천민 자본주의의 치부와 한국의 정치·문화에 대한 시인 특유의 조롱과 까발림, 날칼운 풍자가 넘쳐나는 시집이다. 시인은 시집 곳곳에 그러한 천민 자본주의를 움직여가는 욕망의 대척점으로 지독한 허무에 대한 끈질긴 응시와 영원한 기차에 대한 동경, 몽상과 꿈,진정한 삶에 대한 통찰을 배치해놓는다.

    무림, 압구정동, 세운상가, 경마장…… 욕망이 긴 세월 나를 꽤나 여러 곳으로 끌고 다녔던 것 같다. 얻은 건 없다. 내 손에 적중되지 않은 마권처럼 쥐어져 있는 시 몇 편 외엔. 어느 갬블러의 말이 떠오른다. 베팅하는 자의 돈은, 결국은 경마장의 것이다.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서서히 뭔가를 잃어가는 과정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이라 노래부른다. 부디, 욕망이 나를 후회 없이 올인시켜주길 바랄 뿐이다.
    2000년 11월 유하

    목차

    1부. 천일馬화
    1. 폭포
    2. 나비와 몽상가
    3. 천일馬화 ― 명마 捕鯨船
    4. 천일馬화 ― 걸리버 여행기
    5. 노을
    6. 見者의 꿈
    7. 生
    8. 천일馬화―프루프록의 연가
    9. 폭발 이후
    10. 폼페이, 혹은 슬프지 않은 비극
    .....
    제2부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1. 연어의 길
    2. 無의 페달을 밟으며
    3.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4. 레만 호에서 울다
    5. 천변 풍경
    6. Becoming Woman
    7. 일 포스티노
    8. 하루살이의 말
    9. 로마 콜로세움 속의 화신극장
    10. 파타야의 노을
    .....
    * 해설 - 말달리자, 말달리자 (이광호)

    본문중에서

    말달리자 말달리자~!
    이번에는 경마장이다. 무림과 압구정동과 세운상가를 서성거리던 유하의 주인공은 이제 구겨진 마권을 손에 쥐고 경마장을 배회하고 있다. 시인은 그 경마장 연작에 ‘천일馬화’라는 제목을 붙여준다. 그런데 왜 경마장인가? 경마장이 무림과 압구정동과 세운상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불길한 욕망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곳들은 한 개인의 사소하고 비루한 욕망이 추억의 빛깔로 물들어 있는 자리이며, 동시에 비판적인 문맥에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함유하는 공간이다. 유하를 통해 이 하위적인 문화 공간들은 새로운 시적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것에 매혹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반성하는 화자는 우리 문학사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서정적 자아의 얼굴을 드러냈다. 경마장 역시 욕망과 추억이, 그리고 매혹과 반성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 말들의 탐스런 엉덩이, 나는 저 뿌연 주로에서 압구정동의 스펙터클을 보지요” 라는 시의 진술은 시인 자신의 목소리에 근접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욕망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적 알레고리의 해석학이 동반될 수 있다. 그곳은 “ 묻힌 삶을 꺼내주는 곳” 이고 “ 마취제와 각성제를 교대로 투입” 하는 국가 권력이 용인하는 합법적인 도박장이다.

    그런데 다시, 시인은 왜 그 경마장 이야기를 만화의 제목을 빌려 ‘천일馬화’라고 했을까? 이 지점에서 경마장은 앞의 장소들과 다른 시적 의미 공간으로 뻗어나간다. 우선, 말〔馬〕과 말〔言〕의 운명에 대한 사유가 그 하나이다. 유하의 경마장 연작은 단순히 말〔馬〕에 관한 시들이 아니라, 말〔馬〕에 관해 말〔言〕하려는 욕구에 관한 시이다. ‘천일馬화’라는 제목은 그 두 가지 말의 층위에 대한 시적 성찰을 동반한다. 또 하나는 갬블러의 욕망과 ‘부진마’의 운명과 관련된 실존적 상징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의 실현을 위해 생(生)을 베팅하는 삶,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마주한 삶이라는 실존적 주제에 연결되며, ‘부진마’들은 거세되고 무기력한 남성성이라는 상징과 만난다.

    마사 박물관에 가면 당신은
    한때 뚝섬을 주름잡았던 명마의 박제를 만날 수 있다
    경주마 이름은 포경선
    생전에 그에겐 많은 돈이 걸렸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건 바람 같은 질주가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라는 조롱 속에 갇혀
    끝없이 황금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직 죽음만이, 이 저주 받은 이야기꾼의 운명을
    정지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죽음은 그의 바람대로
    그를, 말의 육신을 멈추게 해주었다
    이윽고 그의 몸은 방부제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하여 황금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영원히 썩지 않는 박제가 되었다
    ―「 천일마화─명마 捕鯨船」 전문

    박제가 되어버린 명마 ‘포경선(捕鯨船)’은 단지 질주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 포경선” 은 달려야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 끝없이 황금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 저주 받은 이야기꾼의 운명을” 살았다. 이때 “ 말의 육신” 이란 ‘말〔言〕의 육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말〔馬〕의 신화는 말〔言〕의 신화로 존재했었다는 것, 죽음은 그 ‘말〔言〕의 운명’을 멈추게 했으나, 그 신화를 “ 영원히 썩지 않는 박제”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말의 운명은 끊임없이 지껄여야 하는 이야기꾼의 운명과 닮아 있다. 그러므로 ‘천일馬화’란 끝없이 달려야 하는 말들의 이야기이면서 또한 영원히 이어져야 하는 이야기의 천형적인 속성 그 자체이다.

    마헤라자드가 말했다. 원수진 놈 있거들랑 경마장에 데리고 가라고
    정권 교체가 ‘코’ 차이로 이루어지던 날
    마헤라자드가 말했다. 이 땅의 정치는 不振馬 게임, 便馬들의 운동회라고
    똥말들의 특징: 각질이 불규칙하다. 지 꼴릴 때 들어온다. 자주 斜行한다. 달릴 수 있는 한 절대 은퇴하지 않는다.
    ―「 천일馬화─걸리버 여행기」 부분

    ‘천일馬화’는 정치 풍자적 알레고리로서의 『걸리버 여행기』의 이야기와 만난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말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말들이 가장 이성적인 존재로 인간들은 가장 야만적인 존재로 되어 있다. 이 전도된 세계는 ‘경마장’과 다를 바 없는, 혹은 그보다 야만적인 현실에 대한 풍자의 조건이 된다. 이때 등장하는 화자 “마헤라자드” 는 ‘세헤라자드’의 변형이면서 세상 모든 이야기꾼의 입을 대변한다. “ 이 땅의 정치는 부진마(不振馬) 게임, 변마(便馬)들의 운동회” 라고 말하는 다소 직접적인 비판은 이 시를 「 무림일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풍자의 공간으로 몰고 가는 듯하다. 유하는 또 다른 시 「 천일馬화─마방 탐방」에서 “ 허창회” “ 팔공산 빈배” “ 감자골 산신령” “ 자갈치 택배” 등 정치인들을 연상시키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현실 정치를 풍자한다. 이것이 담고 있는 것은 물론 현실 정치가 똥말들의 게임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적 인식이다.
    그런데 위의 시의 화자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단지 현실 정치의 공간만이 아니다. 화자는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의 삶 전체에 대한 야유로 나아간다. 화자는 “ 나는 거세된 똥말이다. 마방의 밥만 축내며 순위의 바닥을 쓸고 있다. 난 질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산책하고 싶은 것이다. 거세마의 표시는 ↑이다, 하늘만 보란 뜻인가? 시가 나를 건달(乾達)로 만들었다” 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속도전의 척도로 평가되는 세계에서의 “ 산책” 자이며 “ 건달” 인 화자 혹은 시인의 불우를 말해준다. 이때 화자는 세상을 향해 야유하는 자이며, 동시에 자신을 향해 조소하는 자이다. 자신에 대한 야유는 “ 말의 어머니여, 난 결국 은유를 포기하지 못할 거예요./저 질주하는 말떼들의 더러운 매혹을 끝내 붙잡진 못하리라” 는 또 다른 고백에 담겨진다. 이 고백에는 두 가지 욕망이 포함된다. 우선은 끝내 “ 은유를 포기” 못 하는 시에 대한 매혹, 그리고 “ 질주하는 말떼들의 더러운 매혹” 이다. 이 두 가지 매혹은 각기 다른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매혹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라는 반성적 주제가 거기에 숨어 있다. 잘라내어도 다시 자라는 “ 욕망의 도마뱀 꼬리” 라는 문맥에서, 저 욕망은 이 욕망과 닮아 있다.

    나를 사랑한 자들은 모두 그랬다. 어디 한 군데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채 표표히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세속의 온갖 말들의 후미에서 해찰하는, 불용 처리 직전의 부진한 말들만을 사랑하는 게 그의 업이기에.
    그는 말의 고배당만을 노리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경주는 새로이 시작되고, 욕망은 지연된다. 나의 질주는 반복되고 누군가는 또다시 나를 기다린다. 결승선 전방 어디쯤 후미 그룹을 형성하다 벼락처럼 치고 나오는 짜릿한 나의 모습을.
    두두두두두 똥말은 달려간다 천일마화여, 두두두두 마각을 감춘 채 세상의 똥말들은 쉬지 않는다
    나의 왕인 고객이시여, 아직은 칼을 거두소서.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나는 여전히 후미 탐색 중이니까요. 기다림을 멈추지 마세요. 언젠가는 대박을 안겨드릴 거예요
    그럼요, 멋지게 인생을 역전시켜드리겠어요
    ―「 천일馬화─변마의 독백」 부분

    「 천일馬화」 연작들의 문법적 특징을 다성적인 연극성이라고 볼 수 있다면, 그 대화성은 이 시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시는 “ 돈벼락” 이라는 이름의 “ 변마” 의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독백은 경주마로서의 자신의 생에 대한 정보를 자기 모멸을 담아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 추입” 혹은 “ 후미 탐색” 이라는 주행 습성과 경주 평가에 대한 진술이다. 이것은 이미 경주마로서의 힘과 의지를 상실한 말에 대한 대역전의 꿈이 만들어낸 희망적인 평가이다. 이 평가에는 물론 고액 배당을 꿈꾸는 갬블러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이 부진마의 고백은 그를 지켜보는 시인에 대한 진술로 나아가고, 일종의 시점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그 시인이 이 말에 집착하고 베팅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베팅하지 않는 똥말만이 단 한 번의 벼락 같은 고액 배당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이 똥말은 그 불가능한 대역전의 욕망을 매개한다. 변마는 그가 이 무모한 베팅을 그만두지 못할 것임을 잘 안다. “ 경주는 새로이 시작되고, 욕망은 지연” 되기 때문에, 그 욕망의 악마적인 순환은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변마의 “ 아직 끝나지 않” 은 “ 말” 은, 실현되지 않을 대역전의 꿈을 미끼로 자신의 “ 불용 처리” 를, 그러니까 죽음을 연기하려는 세헤라자드 혹은 “ 마헤라자드” 의 목소리이다.

    38전 2착 두 번, 그 완벽한 무능력과 불모성을 난 사랑한다
    연봉 혹은 연 수득 상금 백만 원도 안 되는 내 머리가
    꾸띠 클럽, 춤추는 헤로디아 딸들의 접시에 담겨져 오는 걸 보기는 했으나
    난 괴사된 살점처럼 신경쓰지 않는다 아니, 그 무감각이 절망스럽다
    파우스트라는 영원한 ‘실재’여, 난 전문 예언가가 아니므로, 똥말의 기적만을 기다리는 자이므로
    0.1%의 가능성에 건다, 파우스트여 들어오라, 이번만은, 그래야
    아리따운 그레트헨을 만날 수 있다
    ……그럴 가치가 있을까, 맘몬의 악령에 업혀 그녀를 만날 가치가 있을까
    ―「 천일馬화─프루프록의 연가」 부분

    시인은 이 말들의 이야기에 『파우스트』와 엘리엇의 「프루프록의 연가」라는 텍스트들을 겹쳐놓는다. 『파우스트』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것이 한 ‘부진마’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부진마는 “ 완벽한 무능력과 불모성” 을 상징한다. 이때 ‘파우스트’는 단지 우연히 그 부진마에게 붙여진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 우선 주제적인 측면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는 무한한 지식과 권력과 현세적인 쾌락을 성취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인간 드라마이다. 이 인간은 자아를 무한대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방황하고 구원받는 인물의 전형이 된다. 부진마 ‘파우스트’의 이미지는, 시인이 인용한 바의 욕망의 끝을 보고 회한에 젖어 독백하는 『파우스트』의 캐릭터와 연결된다. “ 2착 내에 들 가능성 0.1%도 안 되는” 부진마 ‘파우스트’ 역시 자신을 구원할 순수의 원형으로서의 그레트헨을 욕망한다. 그러나 경마장의 공간에서 ‘파우스트’는 이미 재물의 신인 ‘맘몬’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자이다.

    그러면 「 프루프록의 연가」는 어떠한가? 엘리엇의 시에는 한 중년 사내의 ‘내적 독백’을 통해 무기력한 현대적 삶이 묘사되고 있다. 그곳의 삶은 집단적 유대와 종교적 진실이 제거된 지옥의 삶이다. 그곳에서 화자는 자신의 삶의 실체가 결국 ‘어릿광대’의 그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엘리엇의 시와 「 천일馬화」 사이에는 무기력한 남성의 삶과 그 삶이 상징하는 현대의 불모성이라는 주제가 함께하고 있다. 특히 시인은 늙어가는 남자의 자조적이고 자기 모멸적인 독백의 부분에서 그 시의 원전의 일부를 차용한다. 그런데 「 천일馬화」와 「 프루프록의 연가」를 이어주는 또 다른 요소는 그것들의 어조이다. 엘리엇은 서정적인 내적 독백 사이에 비아냥의 어조를 끼워놓는다. 극적인 내적 독백과 풍자적인 어법의 병치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긴장감은 「 천일馬화」와 「 프루프록의 연가」가 만나는 미학적 계기이면서 유하 시의 형식적 현대성의 핵심적인 양상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욕망이 파멸시켰으리라 나는 생각지 못했다
    끝없이 돌고 도는 원형 트랙, 내 마음의 변마는 변마답게 진짜 斜行을 하고 싶어요
    나는 가끔, 무한의 우주 공간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보이저 1호를 생각한답니다
    ” 서두르세요, 창구를 닫을 시간입니다”
    마지막 경주, 불모지(33전 0/3)란 말을 놓고 한 구멍 박아버려요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박 터진 당신, 義齒 값은 만들어야잖아요. 왜 이리 밀어, 이 씨발년이, 일단 찍어, 찍어, 찍으라잖아, 원래 막판은 이래요, 모두들 뚜껑이 열려 있거든요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 천일馬화─The Waste Land」 부분

    시인은 다시 ‘천일馬화’의 이야기에 「황무지」를 겹쳐놓는다. 「황무지」의 다성성(多聲性)과 이미지와 이미지들을 병치시키는 콜라주의 기법과 언술의 다채로운 속도감들은 「 천일馬화」 연작의 열린 장르적 성격과 만난다. 물론 주제 의식의 공유도 있다. 「 황무지」에서의 정신의 불모성과 무의미한 일상 생활과 성, 재생이 없는 죽음 등의 주제들은 경마장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표현되는 현대적 삶의 황폐함과 만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위의 인용에서 보이는 것처럼 「황무지」 2부의 ‘체스 놀이’편에 나오는 대사들을 차용하는 대목이다. 「 황무지」에서 이 부분은 체스 놀이 하는 유한 부인과 그의 남자가 기다리는 노크 소리가, 술집 바텐더가 문닫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카운터를 치는 노크로 전환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 전환에서 주인공은 하류층의 인물로 바뀌어진다. 유하는 이것을 마지막 경주를 앞두고 마권 발매 창구를 닫는 시간을 알리는 상황으로 바꾸어놓는다. 그 마지막 경주에 출전하는 말의 이름 역시 “ 황무지” 이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사내들의 거친 말투는 “ 막판” 의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처절한 악다구니를 보여준다. 여기서 이 시의 어조는 앞의 서정적인 어조로부터 완전히 뒤바뀐다. 갑자기 등장하는 “ 의치(義齒)” 에 관한 이야기 역시 「 황무지」의 이 장면에 등장하는 “ 이 해 박으라고 준 돈” 의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지만, 「 황무지」와 연관시키지 않는다 해도 해석은 풍요로울 수 있다. “ 의치 값” 마저 날려버린 “ 막판” 이라는 막다른 상황의 절박함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 천일馬화」 연작의 이러한 특성은 단지 경마장 이야기라는 소재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다중의 화자에 의한 어조의 연극적 다성성과 진술과 이미지의 병치라는 구조적 특징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이런 측면에서 「 천일馬화」 연작은, 욕망의 고현학이라는 의미 못지않게, 그 기법의 열린 연극성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적 현대성의 가능성에 육박한다. 그럼 이제는 단일한 서정적 목소리로 노래하는 유하의 다른 시편들을 살펴보자.

    나 폐허의 콜로세움 안에서, 화신극장에 앉아 있는 나를 보았네
    화신극장은 내 마음속에 끈질기게 살고 있네
    살아서 그토록 낡은 삶의 형식에 대해 말하고 있네
    하지만 까까머리 아이는 지금도 들창코 미녀의 미소에 붙들려 있어
    끝내 극장의 어둠 속을 벗어나지 못할 거네

    스크린의 환영이, 살아 함성으로 번성하는 콜로세움을 빚어냈듯
    무너진 화신극장이 현실의 나를 상영하고 있네
    왜 태어나는 아이는 그리 슬피 울고
    죽은 육체를 빠져나간 영혼은 너무도 편안하게 웃고 있는가
    운명은 어쩔 수 없으므로
    지금 이 순간 꽃향기에 몸 전체로 붙들려 있는 것을
    그래, 누구도 살아서 이 극장의 어둠을 벗어나진 못할 것이네
    ―「 로마 콜로세움 속의 화신극장」 부분

    유하의 여행시편들은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발견의 기록이 아니라 추억과 성찰의 진술이다. 화자인 여행자는 지금 로마의 콜로세움에 있다. 거기서 그가 만나는 것은 콜로세움 그 자체가 아니라 “ 할리우드 시대극 쿼바디스” 이다. 그 할리우드 영화는 화자를 “ 70년대의 찌린내와 함께 종로 화신극장에 앉아 있” 게 한다. 그 극장에는 “ 데미트리아스의 들창코 미녀 수잔 헤이워드에 넋잃던/까까머리 아이 모습 위로 서른 중반을 넘긴/어정쩡한 몰골의 사내가 동시 상영되고 있” 다. 페허의 콜로세움 안에서 화자가 본 것은 이렇게 “ 화신극장에 앉아 있는 나” 의 기억이다. 타자들의 유적에서 화자는 식민화된 주체의 기억을 떠올린다. 화신극장의 스크린의 환영과 콜로세움의 원형 경기장은 스펙터클에 대한 인간의 욕망 위에 건설된 것이다. 화자의 시적 성찰은 할리우드 제국의 환영에 사로잡힌 한 시절에 대한 추상(追想)과 만난다. 그 추상은 물론 지나간 한 시절에 관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극장의 환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기 실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동반된다. “ 무너진 화신극장이 현실의 나를 상영하고 있네” 라는 날카로운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화자는 그 환영들이 현실을 있게 했으며, 그것이 현실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이 그 환영들을 통해 자기 운명을 만들어갔다는 것을.

    나를 움직이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아웃사이더이다
    아웃사이더의 서정이다
    숲으로 난 샛길을 사랑하는 산책가의 몸이다
    산책가는 누구를 추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나를 무수히 추월해간 지상의 탈것들이여
    어쩌면 목적지란 시간의 종말 아닌가
    나의 시간은 무한한 곡선,
    은륜의 텅 빈 내부로 물이 고이듯 시간이 머문다
    ―「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부분

    유하의 서정시편들은 현실에 관한 반성적 질문법을 내장한다.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연작들에서 볼 수 있는 것 역시 서정적 목소리를 반성적 성찰과 매개시키는 특유의 화법이다. 그 화법 안에는 회한이 묻어 있는 고백과 명상적인 잠언이 교차된다. 이 시에는 「 천일馬화」 연작의 말들의 질주와는 반대편에 위치하는 산책과 명상의 시간이 흐른다. 자전거를 타는 자의 “ 아웃사이더의 서정” 과 “ 산책가의 몸” 은 기계적 동력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비판의 문맥 위에 서 있다. “ 은륜의 텅 빈 내부” 를 흐르는 “ 무한한 곡선” 의 시간은 종말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직선적 시간과 대비되며, 이는 탈근대적인 동양적인 사유와 연관된다. 시인은 그 자전거의 시간 안에서 목표와 속도로부터 자유로운 “ 길의 선지자” 로서의 시인의 이미지를 조명한다. 그 선지자가 노래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무진장한 물의 몸이면서
    저렇듯 그대에 대한 목마름으로 몸부림을 치듯
    나도 나를 끝없이 목말라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시도 벼랑 끝에 서지 않은 적이 없었다
    ―「 폭포」 전문

    유하의 시에는 압축과 혼돈의 코드가 동거한다. 그는 침묵과 수다의 언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키치적 상상력이 발동시키는 현란한 말놀이와 삶에 대한 깊은 서정적 침묵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이 시에서 “ 무진장한 물의 몸” 은 스스로에 대한 목마름으로 벼랑에서 추락한다. 이 실존적 갈증은 근원적으로 존재의 자기 모순에 속한다.

    유하는 시 「 천일馬화─1800M 1군 핸디캡 연령 오픈 일반 경주 발주 10분 전 경마 예상가 金馬氏를 만나다」에서 시적 화자의 입을 빌려 “ 이제 문학도 막판 경주 같지 않아요? 밑천은 떨어져가고 루머는 번성합니다. 뚜껑은 열리고 엉뚱한 말들이 배당판을 움직이고 있어요” 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에게는 각별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문화적 전위의 전망 위에서 문학적 위반을 꿈꾸었던 90년대 문학의 불온성은 이제 냉소의 대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시장의 지표가 문학성을 대신하고 루머와 스캔들이 문학적 담론으로 행세하는 사태 앞에 우리는 직면해 있다. 이 사태는 90년대 문학의 성과들에 대한 자기 모멸적인 부정과 관련되어 있다. 1990년대적인 의미에서의 전위의 한 상징이었던 유하의 새 시집은 이런 맥락에서 저 지리멸렬하고 어처구니없는 소음들을 걷어내는 시적 소음이 될 수 있겠다. 우리는 문학 안으로부터의 창조적 소음을 듣고 싶다.

    그의 많은 선배 시인들이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유하는, 풍자에서 해탈로 혹은 치욕으로부터 자기 연민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시의 불온성에 새로운 호흡을 부여해왔다. 그는 풍자를 포기하는 것 대신에 풍자와 서정이 함께 갈 수 있는 미학적 모색을 계속했다. 그의 시는 풍자를 통해 죽음의 현실과 산문의 세계에 접근하며, 맑은 서정성을 통해 사랑의 공간으로 귀환한다. 풍자가 현실의 낙후성과 부정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소산이라면, 서정성은 존재의 자기 모순을 껴안는 사랑의 문법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풍자는 냉소의 차원이 되지 않는 창조적 파괴에 이르며, 그의 서정은 상투적인 감상성을 비껴가는 역동적인 욕망의 드라마를 품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풍자를 통해 풍자를 바꾸어가고, 서정성을 통해 서정성을 지워나가며, 욕망을 통해 욕망을 해방한다. 그래서 유하는 말[馬]달리고, 말[言]달린다. 그것은 이미 변방에 몰린 시를, 그 ‘변방성의 극점’에서, 죽음의 질서를 전복하는 불온한 사랑의 동력으로 만드는 마술이다.

    시는 변방으로 귀양 가버린 노래, 그리고 그 변방 중의 변방에 있는
    나의 말을 나는 사랑한다 이는 결코 자기 위안이 아니다
    이제 시의 운명은 그 邊方性의 극점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므로.....
    (`천변 풍경`부분/ 이광호)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3~
    출생지 전북 고창
    출간도서 10종
    판매수 1,046권

    시인이자 영화감독. [무림일기]를 시작으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세상의 모든 저녁] 등의 시집을 발표해 시대의 정신과 풍경을 시의 언어로 포착해냈다. 또한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감독으로 데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폭력의 시대를 영화적 향수의 대상으로 극화해냈으며 [비열한 거리]로 현실에 단단히 발붙인 한국형 느와르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말죽거리 잔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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