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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연대기 [반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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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나온 길을 모두 잃고 다시금 뒤를 돌아보는 시간.
열정의 언어로 수놓은 이 치열한 사랑의 역사(歷史)!


장석원 두번째 시집 『태양의 연대기』.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한 장석원의 두번째로 발간한 시집이다. 등단 이후 줄곧 평단의 관심을 받으며 활동해온 장석원 시인은 첫번째 시집 「아나키스트」에서 자아를 넘어 낯선 타자에게 이르는 혹은 세계를 넘어 낯선 세계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번 두번째 시집 『태양의 연대기』에서는 '광장'과 '당신'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당신에서 당신으로, 그리고 광장에서 광장으로 움직이는 두 개의 원환운동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태양의 연대기>

1. 단 한 번의 여름

정확히 5분 전에
나의 세계는 시작되었다

한 조각 어둠이 희미해지고
한 줌 모래가 가벼워지고
한 그루 나무 사라진다

햇빛 먹고 자라나는
땀을 피로 만들어 살아가는
말을 뼈로 만들어 지탱하는
한 그루 나무

나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후략)

출판사 서평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으로 등단, 문제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년)로 평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아온 시인 장석원의 새 시집 『태양의 연대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되었다. 타자와 자아의 경계를 교묘하게 허물며 ‘나’에서 “네게로, 한 타자에서 다른 타자로 진행하는 속도감 있는” 연상 작용을 이용해 시적 정황/긴장을 만들었던 시인을 평론가이자 동료 시인 권혁웅은 “다성성(多聲性)의 시인”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처럼 『아나키스트』는 언어의 특이성을 정확하게 집어 현상과 현재를 동시에 다룬 독창적인 시집이었다. 그러나 장석원의 이번 시들은 마치 다른 시인의 시처럼 보이는데, 이번 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비평가 조강석의 한마디를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체 사랑이라니?”

나는 바깥을 본다
갇힌 동물은 없다
어둠이 나를 핥는다

칠흑을 뿜어내는 음악과
별빛보다 엷은 소음 앞에서

당신에 대하여
당신에 대하여
사랑 후의 떨림에 대하여 ─「적막」 부분

잊는다는 것은 아름다워 이제 모두 잊혀질 것 같아서
편안하게 비트에 맞춰 머리를 흔들어 좌우로 좌우로
잊기 위해 노력하는 중 잊혀지기 위해 더 빠르게 무한히
잊혀질 수 있기를 나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당신을 잊기 위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버석이는 알갱이 알갱이 실리카겔처럼 잊혀지기를
한번의 생각으로 나는 당신과 당신이 흔적없이 지워지는 순간으로
나는 당신과 함께 나의 생을 뒤로 하고 뒤를 지우고 뒤 없는 세계로 ─「이레이저 헤드」 부분

횡단하는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 밑에서
잠을 생각한다, 사랑의 복습을 꿈꾼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무것이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의 남측면에 자리잡은 매점 앞
여섯 시의 저무는 태양 아래
나는 가만히 서 있다
─「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부분

장석원은 전작 『아나키스트』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長江의 끄트머리, 투쟁의 끝이 보이는가. 방파제에서 海東을 바라보는 나에게, 북경대학의 도서관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나에게, 후회는 없다. 人間的 감정이라니, 사랑이라니, 나는 진작에 그것들을 검은 바다에 띄워 보냈다.
─「꿈, 이동, 속도 그리고 활주」 부분


과연 『아나키스트』에서 시인은 자(自)와 타(他)를 혼재하여 지금, 바로 여기를 증명하려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는 물론 사랑마저 투쟁과 동의어로 쓰며, 슬픔과 추억 들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것에 성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모든 사랑이 그렇듯, ‘당신’이라는 객체를 기반으로 한다. 어쩌면 이 시집은 통째로 당신에게 하는 말로 정리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당신의 존재”이다. 이 “흥건한” 당신은, ‘나’의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근원이며 근간이다.

일몰을 보고 싶다면, 당신은 천천히 서쪽으로 걸어가도 좋다. 일몰의 슬픔과 우울을 기대한다면 실망하리라. 거기 자동차들이 북으로 남으로 탈주하는 고속도로뿐이리라, 당신은 하루의 절반을 그곳에서 앉아 보내는 뇌성마비 식이 마흔셋 식이를 만나리라, 북쪽 경계와 서쪽 경계의 중간 지점을 지나가는 식이의 느린 걸음 앞에서 고요를 목격하리라. 길 건너 중랑구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식이 앞에 넷째 날의 그림자 드리워질 때

당신은 경계선을 따라 뛰는 마라톤 맨이 되거나, 샘터호프 김여사에게 애인하자고 조르는 박기사가 되리라. 동쪽의 중마산과 서쪽의 중랑천과 남쪽의 천호대로와 북쪽의 장평교, 그 경계 안에는 철책도 장벽도 없기에, 당신은 갇힌 것이 아니라고 당신은 다만 조금 피곤하다고 말하리라. 집으로 걸어가는 당신은 그리하여, 하나은행중곡지점 신성대중사우나 마돈나노래방 코리아타운단란주점 동명앵글 프라자약국 킴스동물종합병원 에삐드블레과자점 바이킹호프 아마겟돈시뮬레이션컴퓨터게임센타 꼴통포장마차미니횟집 성동모터샵 현대부동산을 지나게 된다. 당신은 뻗어나가는 덩굴이며 무한궤도이며……
현충일 현충원에서 ─「초대장」 부분


3억년의 안개 속에서
누층의 적멸 같은 등불
하나 켜 들고 홀연
돌아오게 된 것

어떤 힘에 의해서
어떤 논리에 의해서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자세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 성향
그런 것들이 멸족
그것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당신, 측정할 수 없는
쓸쓸한, 바람의 붓질로 생긴
당신 그리고 나의 뼈

당신의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공포
심연 속으로 빠르게

순응하는 공룡의 외로움
어그러진 정합

나의 소멸은 장엄했나
어떤 관념은 슬픔
─「플라테오사우르스 철학」 부분


나는 방금 전에 검은 나무를 지나쳤다
그는 견고한 기둥이 아니다
어둠에 먹힌 그가 꽃을 밀어낸다
꽃잎 꽃잎 꽃잎 터져나오는 꽃잎
어둠을 빨아 마신 검은 나무의 검은 언어
나에겐 검은 나무를 기술할 검은 혀가 필요하다

어둠 속의 나무는 따스하지만 또한 나를 찌른다
검은 나무의 폭력에 몸이 열린다
그가 전해주는 검은 사랑을 나는
갉아먹는 환한 꽃으로도
베어내는 칼날로도
부정할 수 없다 내게는 힘이 없다

왜 검은 나무 앞에서 나의 소음을 듣고 있는가

[……]

그물을 펼치고 그의 모든 이미지를 포획하려 한다 그리고
종말을 향해 첫걸음을 떼었다
검은 공포가 서 있다 ─「검은 나무」 부분


당신과 마주서서―거리에 당신이 있습니다 햇빛의 방에 당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입술 해에 물들었습니다 손바가지로 입술 위의 빛살 움키면 당신의 숨결 손 위에서 춤을 춥니다 당신에게 손 내밀면 당신과 나의 경계 허물어집니다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태양의 연대기」 [2. 다른 날의 다른 공간의] 부분


‘당신’에 대한 그의 ‘연민’은 사랑이다. ‘당신’에 대한 ‘증오’도 사랑이다. 그의 ‘공포’ 역시 사랑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니다. 이 분명한 역설은 밝은 태양빛 아래서 이성의 빛을 내뿜는 ‘반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대해 조강석은 “(이 시집에는) 두 개의 원환운동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당신’에서 ‘당신’으로 이르는 하나의 환운동과 ‘멜랑콜리한 광장’의 세계로 이끄는 ‘반성’으로의 운동이 그것이다. 그러한 반성은 대상을 ‘나’로 국한하지 않고 더 멀리까지 확장한다. ‘나’를 향하는 모든 귀속의 출발점은 ‘당신’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아나키스트’에게 반성되는 세계는 바로 지금이며 그 시작은 조강석의 분석대로 광장에서 시작된다. 광장은 어떤 곳인가. 모두가 평등하게 모이는 곳, ‘아고라’가 아니던가. 이번 시집의 백미이자 시집 중앙에 놓인 연작시 「태양의 연대기는 바로 광장의 시라 할 수 있다.

석양에 흡착된 저녁 여섯시에
나는 열린 구멍이 되었다

[……]

모든 것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실패했다네 동정은 마약
어제는 회개를 생각했고
오늘은 미래를 기획했는데
태양이라니, 혁명이라니
나는 피라미에 불과한데
역사 앞에서 흐느적거렸던
겨우 화염병이나 날랐던 관측병이었는데

가을 이후로 나는 낭만에 몰두하였고
낭만은 내 양식이었고 독이었으니
여기 겨울의 마로니에 밑에서
나는 야위어 가네 슬슬 지겨워지네
우리에게 어제는 있었을까? 여기는 어딘데?

여기는 낙관주의자들의 파티장
미래에서 건너온 트랭크스가 적을 물리친 곳
미래의 검으로 적을 단칼에 베어버린
트랭크스, 나의 영웅이 강림한 곳

우리 우울을 모른다
우리 증오도 잃었다
우리 늙어가지만 꿈을 잃지 않는 초식동물
내가 먹어치운 것들을
이제는 상기시키지 말아줘요

어떤 일이 벌어졌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고해와 밀고와 자백으로 가득 찬 공기 속에
우리는 정주했다네
나 또한 사라져간다네
─「무서운 해체의 순간 나는 낡은 사물」 부분

생존권을 외치는 노동자들 교문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 깔깔대는 여고생들 아이스바를 먹고 있는 아이, 콜비츠의 사람들
패배당한 나뭇잎들의 표정

[……]

홀로 교문 앞에 서 있었다
불 붙인 화염병을 들고 발걸음을 떼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유령이었다
최루탄 연기가 걷히자 나는 사라졌고
아스팔트 위의 불꽃은 사그러들었다

[……]

소주 920cc와 맥주 18253cc를 마셨을 뿐인데 취해 광화문에서 오줌을 누던 천사 때문에 때아닌 홍수가 일어났다 천사의 오줌에 6697명이 수장되었고 이재민은 825364명이었다 가혹했다

[……]

나는 빗속을 지나왔다
이렇게 지워져 가는 것이다

5분 동안 혼자였는데……
나는 결빙된, 거부된, 분쇄된 얼굴이다
나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시월에 총성이 있었다

[……]

거리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잎잎에 불 지피는 화염나무

나는 천천히 광화문 쪽으로 걸어간다
그날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태양의 연대기」 부분
‘연대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 어려 있다. 회한이라고? 아니다. 회한이 아니라, 너무나 눈부신, 너무나 뜨거웠던 그때로 지금을 반성하고 반성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반성이며, 동시에 긍정적인 회의(懷疑)다. “표면적인 회의적 태도와 달리 시인은 이미 잊어버린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바꾸어서 계속 소유”하고 있으나, 이 잊힌 대상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바로 주체라는 점에서 회한이 아니라 회의다. 그리고 이 ‘건전한’ 회의는 시인을 ‘혁명가’로 만들 수는 없지만, ‘혁명적’ 시를 쓸 수 있게 만든다. 이 혁명적인 시/시어들은 멜랑콜리와 아이러니 사이에서 진동하며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을 만든다.

한 선동가가 말한다

―전체를 따지지 마라. 체제는 살과 뼈와 피와 눈물로 유전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 나와 그의 관계. 자유는 집단의 문제인데, 구성원 개인의 욕망과 사랑이라는 부분의 문제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 현실에 충실하라. 나와 당신의 관계를 분석하면 무엇이 남는가. 나와 그의 관계를 분석하면 무엇이 남는가. 남겨진 것의 실체를 본 적 있는가. 알려고 하지 마라. 나와 당신이 이루는 관계, 나와 당신 사이에 존재하는 전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 당신과 나의 싸움, 사랑하는 싸움, 사랑과 죽음의 싸움. 현실의 바람 속에 나부끼는 잎새들.

나는 선동가에게 말한다

―모퉁이를 돌면 건너편 거리에 그가 있다. 태양이 모퉁이를 돌아 빛으로 거리를 가득 채울 때, 삶보다 더 기이하고 광적인 것은 없다. 그의 죽음이 보인다. 지금 그는 없다. 여기 있지 않기 때문에 그를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849년 런던에서 그는 어둠의 후작처럼 서 있었지만, 지금은 결단코 없는 것이다. 가령,

태양 아래서 나의 품에 안겨 산 채로 재가 된 그대여, 사라진 그대를 재현해내는 일, 나비가 되는 일, 마르크스가 되는 일, 불원천리 흘러가는 일…… ─「태양의 연대기」 부분

이 시집을 통해 비평가 조강석은 혁명을 “로고스이자 텔로스” 였으며 광장은 “그것의 토포스” 였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광장의 시어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그 목적이 노정하는 바는 바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혁명은 실패가 될 것이 자명하다. 연대기는 그 자체로 과거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두 환운동은 이질적이다. 그러나, 과연, ‘당신’에게서 ‘당신’으로, ‘광장’에서 ‘광장’으로 움직이는 두 개의 원환운동이 서로 다른 것이며, 그 궤적은 겉돌 수밖에 없는가. 시인은 이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지난날의 긍정적 회의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음에 가능성, 이것이 ‘시’고 ‘시인’이다. “왜 아직도 이런 철 지난 애도가 계속 되고 있느냐 라고는 묻지 말자. 질문은 오히려 그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거꾸로 던져져야 할지도 모”른다 는 비평가 함돈균의 말을 굳이 빌릴 것도 없다. 잊었다고 말하기에 그때 우리는 너무 뜨거웠고, 빛났다. 모두 사랑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시절을 잊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려하는 지금 출간된 시집 『태양의 연대기』는 빠짐없는 지금에 대한, 지금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시인은 고백한다. 우리는“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조강석의 말처럼 “다시금 사랑이 어디 하나뿐이랴, 사랑이 이제 숲 속에서 장년의 생을 시작하려나 보다”.

당신은 지금 허공에 물려 있다
당신은 절반의 그림자
당신은 돌아서려는 것일까 등 뒤로
당신은 손을 내미는군

이곳에서 영원히 멈추려는 것인가 당신
햇빛 쪽으로 한 발 내딛어
바람처럼 넓어지려는 것인가
당신은 정말로?

당신의 겨울을 통과하네
그 밖의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은 혼자 울고 있는 것인가
그 밖의 모든 것들 때문에
당신은 문득 나를 생각하겠지만

플랫폼과 역사 지붕 너머
여덟시의 은행나무 한 그루 떠올리겠지만
이곳의 당신은 지금 막
나를 지나쳐 흘러가고 있다

안녕 당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형식」 전문


●●`시집 미리 읽기
牛岩목욕탕으로 갔어요 손가방 하나 들고 당신은 담배를 피우며
맛있게 입맛을 다시며 옷을 벗고 옷을 벗기고 장산곶 마루를 흥얼거리며
수증기 속으로 잠입했어요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거품으로
내 등을 가슴을 허벅지를 닦아주었어요 너무나 깨끗하고 상쾌하고
더욱 달아오르고 나는 쇳덩이가 무엇인지 폭발은 왜 일어나는지
알았어요 절정은 오래 가지 않았기에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당신은 안개였나요? 그렇게 멀리 떠나가 부나비처럼 부서지고 싶었나요?
내 엉덩이의 푸른 반점은 당신의 형해 그날의 나는 지워지지 않았어요
바가지로 물을 쏟아 붓는 당신과 물에 용해되는 나와 물 따라 흘러간 당신
촛농처럼 간지러운 물의 손가락이 나를 훑고 더듬고 맛봐요
사포 같은 수건이 샅을 지나요 젖니가 다시 돋아요 나는 쓸렸어요
당신과 나는 입냄새도 비슷해요 細毛의 구름이 지나가는데
물속에서 당신이 일어서요 물 때문에 당신이 길어져요
철근을 구부러뜨리듯 당신은 나를 휘어지게 해요 숨이 막혀요
너무 뜨거운 탕에는 넣지 마세요 자꾸 빨개지고 융모처럼 부드러워져요
당신은 옷을 입지 않았어요 목덜미에서 물이 흘러내려요
허리가 운천교의 상판 같아요 그날 나는 뚫린 양말처럼 불안했어요
나는 황소의 아들 下草가 단단해지고 뿔 하나 자라나요
나도 남자가 되었어요 서글픈 그물을 들고 돌아올 당신을 기다려요 ─「발열」 전문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적막
이레이저 헤드
어제
오래전, 깊은 곳으로 떠나간
거미
검은 나무
초록들
청년 학생들은 무사히 무사히 영원히
우리 고장엔 일꾼들이 많지
아케이드, 초콜릿 케이크, 로가디스 그린과 함께
저녁의 고릴라……國家,
다시 무성해지는 어둠
무서운 해체의 순간 나는 낡은 사물
더 많은 계획
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제2부
초대장
플라테오사우루스 철학
화학 가족 발견
식탁과 아버지의 지구과학
白色 비가역반응
하남 가는 심야 좌석 버스의 떡 장사
동화물리학
현충일 현충원에서
늙은 악기
미각
지워지지 않는 것
톰에게 춤 가르치기
눈부신 맹목
멜랑콜리아

제3부
태양의 연대기

제4부
빗물처럼 내려와 입술에 닿는
발열
우암동 수체
이상한 슬픔
탐닉
항아리처럼 입을 벌리고
저녁의 봉인
인간의 먼지
식물
완전한 중립 상태
유리와 돌멩이
赤記
당신의 형식

해설l광장의 오후와 사랑의 형식.조강석

본문중에서

●●`시인의 말
조금 더, 가까이
침묵 쪽으로.

나의 절반인 당신께.

2008년 11월
장석원

●●`표2 글
시집 『태양의 연대기』는 두 개의 원환운동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당신’에서 ‘당신’으로, 그리고 ‘광장’에서 ‘광장’으로의 이 재귀적 운동은 동일성을 위한 회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이 아니다. 석양의 적기(赤記)마저 뒤로 하고 밤의 숲에 든 시인은, 지나온 길을 모두 잃고 다시금 뒤를 돌아본다. 사랑이 어디 하나뿐이랴, 사랑이 이제 숲 속에서 장년의 생을 시작하려나 보다.

●●`표4 글
사랑 후의 떨림. 눈 뜬 침묵. 한 시절의 사랑. 깊은 곳으로 떠나간. 어두운 입구. 검은 혀. 겨울나무 껍질. 슬픔과 배반. 붉은 단련. 셔터 뒤의 고요. 부서져야 할 세계. 정지. 트랭크스, 나의 영웅. 별과 낫. 서울역 광장. 예상 밖의 엔딩. 순응하는 공룡. 우리의 세계. 여러분의 질서. 뉴 드럭. 그녀의 몸속. 캐터필러. 죽은 대통령. 번지 없는 주막. 절제는 악덕. 톱니바퀴 사이로 윤활유. 가족의 탄생. 변검. 흰 구멍. 6월의 태양. 용주사. 황소의 아들. 기억의 피막 너머. 열셋의 중학교실. 시동 걸린 트럭 뒤. 마르는 소금 냄새. 계단처럼 박명 속에 묻혀. 흩날리는 먼지. 물의 시작, 물의 서쪽. 불룩한 고요. 두려움에 파 먹힌 저녁의 거미. 봉선사의 단풍. 안녕, 당신.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9

시인 장석원은 1969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 '아나키스트'와 평론집 '낯선 피의 침입'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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