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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간, 다른 배열 : 이성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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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간을 앞서는 예술, 그 세계는 끝났다.”
[칠 일이 지나고 오늘]의 저자 이성미 7년 만의 신간


2020년 문학과지성사의 마지막 신간 시집은 이성미의 [다른 시간, 다른 배열]이다. 시인은 2001년 실험적인 상상력과 전복적이면서 경쾌한 문법을 선보이며 등장한 이래, 두 권의 시집을[[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2005), [칠 일이 지나고 오늘](2013)]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7년 만의 신간으로 그의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즐거운 연말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이번 시집은 2014년부터 근래에 걸쳐 씌어진 시들을 묶었다. 1, 2부에서 낯선 체험과 감정, 또는 시간의 공간화 등의 주제에 집중하는 데에 반해 3, 4부는 현실에서 발생한 사건들로 촉발된 고민이 담긴 시들로 채워졌다. 특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운동이 시작된 이후 이성미는 “2016년 10월, 내 마음속에서 시가 죽은 달이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시를 쓸 때의 “하얗고 보드라운” 마음이 죽었다(「뒤표지 글」)는 단언과 함께 시집의 후반부는 화자의 흔들리는 내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2016년 10월 이전과 이후의 시들이 함께 수록된 이 시집은 시인이 오래 집중해온 기존의 시적 주제와 동시에 앞으로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무정형의 에너지가 함께 존재하는, 그야말로 “다른 배열, 다른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출판사 서평

믿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순간,
끝없이 흔들리는 내면의 초상


나는 돌의 몸이 되었다가
까마귀처럼 울었다가
희미한 경고음이었다가

분노라는 이름이 붙은
침묵이 되었다

[……]

새로운 질서가
힘의 새로운 배열이 필요함
- 「부분과 연결」 부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운동 이후 씌어진 시에서 화자는 “돌의 몸”에서 “까마귀”로 거기서 다시 “희미한 경고음”이 되었다가, 결국엔 “침묵”에 이른다. 딱딱하게 굳은 상태의 몸이었다가 모든 이에게 다 들리도록 울어대는 새였다가, 결국은 분노를 품은 채 침묵하는 방식으로 몸의 형태와 발화의 방식을 여러 차례 바꾼다. 이뿐만이 아니다. 압축적으로 간결한 장면들을 만들어내던 그간의 창작법을 멀리 둔 채 “좋아하던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한 믿음이 부서졌다. 어떤 비유도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며 “입이 사라졌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문단_내_성폭력」)라고 산문의 문법을 빌려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성미의 시가 변하려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그는 말한다. “저는 방향이 제일 어렵습니다”. 오래 믿어왔던 것이 산산이 부서졌을 때 누구나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을 겪곤 한다. “새로운 질서”를 “새로운 배열”(「부분과 연결」)을 만들기 위해서 시인의 방황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너무 많은 단어들을 잃어”(「손가락과 흰콩」)버렸을 때엔 다시 단어들을 찾아낼 만큼의 시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이성미의 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성급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이 시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2016년 10월 이후 문단 전체의 숙제로 남겨진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 중일 시인의 고민의 흔적이다.

계속되는 ‘오늘’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화자
오늘을 사는 사람의 작고 단단한 안부


내가 있는 곳에서 터널을 통과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 우체국까지, 투명한 길을 그었다. 어제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오늘 우체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우체국이 없다. 또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우체국은 내게서 더 먼 쪽으로. 하루만큼 더 먼 쪽으로. 내가 하루에 걷는 길의 길이만큼 더.

[……]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 「우체국에 가려면」 부분

우리는 앞서 이 시집에서 드러난 시적 화자의 고민과 혼란에 대해 얘기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이성미가 유지해오던 시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다수의 시편에서 시인이 오래 고민해온 추상적인 것들의 물질화, 특히 시간을 형체가 있는 물체로 다루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우체국에 가려면」에서 화자는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라고 다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체국은 참으로 신기한 곳이어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지나면 우체국도 “하루만큼 더 먼 쪽으로” 이동한다. 내 하루의 길이만큼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딱 그 정도의 거리만큼 이동하는 것이 우체국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우체국을 ‘내일’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에서 하루가 더 지난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내일이니 말이다. 바로 여기서 시적 화자가 느끼는 낯설고 납득하기 어려운 느낌이 배가된다. ‘내일’을 ‘우체국’처럼 공간성을 가진 특정한 자리라고 본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내일’이라는 자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위치하는 자리는 늘 ‘오늘’ 이곳이다. 하루가 지났으면 내가 기대하던 ‘내일’이라는 곳에 도착해야 하는데, 여전히 나는 ‘오늘’에 머문다. 여기서 ‘오늘’이 계속해서 온다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이나 허망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들이 차례차례 덧붙어 “긴 피리”처럼 이어지는 것, 좀더 멀리 길어지는 “투명한 길”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향한 지나친 낙관을 지운 채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서부터 오늘의 나를 살아보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성미의 지난 시집 [칠 일이 지나고 오늘]에서 시인은 ‘파란 바통’이라고 이름 붙인 ‘오늘’을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보내는 ‘이어달리기’의 형태로 이미지화해낸 바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시 「부분과 연결」에서 다시 한번 이 이어달리기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손에서 손으로” ‘오늘’이라는 바통을 전한다. 이번엔 “붉고 작고 단단한 안부”와 함께 말이다.

뒤표지 글

2016년 10월, 내 마음속에서 시가 죽은 달이다.
시를 쓸 때의 마음이란 신비를 알고 싶고 그것을 두려워하며 선한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작은 의지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시를 쓸 때의 마음 같은 하얗고 보드라운 한 조각을 내면에 갖고 있으며, 시인도 시인이 아닌 사람도 시를 쓸 때는 그런 마음이 된다고 믿었다. 내가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그 하얗고 여리고 작은 조각이 여러 조각이 되고 더 많은 조각이 되어갈 거라고 믿고 다짐하곤 했다. 그것이 그때 죽었다.

나의 시도 거기서 멈췄다. 멈춘 자리에서 지극히 산문적인 시간이 시작되었다. 멈출 수 없어서 계속 움직였다. 멈춘다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소파에 앉아서 창밖의 산과 들판을 보는 시간이 온다. 물컵이 넘친 것처럼 슬픔이 쏟아진다.

움직이는 사람은 두려움 속에서 움직인다. 움직임의 동선은 단순해 보이겠지만, 복잡한 질문들을 품고 슬픔의 임계점을 넘나들며 움직인다. 움직이는 사람들 옆에서 움직이다 보면,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른 것들이 아주 작은 세계로 보였다. 우리는 그 작은 세계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인간보다 높이 두었다. 인간을 앞서는 예술, 그 세계는 끝났다.

작은 세계를 작은 세계로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다.

시인의 말

그러니 아무도 묻지 않는 일에 대해 적어보겠다.
다른 시간과
다른 배열이 시작되기를 오늘도 기다린다.

2020년 12월
이성미

목차

사과에 대해 쓰기

Ⅰ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터널과 터널 /우체국에 가려면 /직육면체 /동쪽과 서쪽 /접힌 하루 /잠깐 /일요일 아침의 창문 /정글짐이 있는 곳 /개와 늑대의 시간 /저녁의 감자수프 /일월의 발 /읽는 동안 /오늘 /저녁으로 가야겠다

Ⅱ 형식을 내놔
형식 /모더니스트의 발 /핫케이크 열다섯 장 /의자의 뿔 /밤 /파랑 /분홍 /친구의 친구들 /부등식 /가련해지는 이야기 /끝의 성격 /거짓말 /먼지의 도리 /집의 크기 /낙엽들의 방

Ⅲ 돌고래라니
매끄럽고 보드라운 검정 /돌고래라니 /내일에서 돌아온다

sⅣ #문단_내_성폭력
참고문헌 없음 /단일한 겨울 /망명지 /걷는다 빛났다 /손가락과 흰콩 /약속 /홀과 힐 /쳇, 절뚝 /#문단_내_성폭력 /단어의 삶 /크래커처럼 /캐비닛 시간표 /밤과 밤 /부분과 연결

본문중에서

사과가 되려 했지만. 사과가 되지 못한 사과의 경우에 대해 쓰고. 제목을 사과라고 붙여야지.

사과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 대해 써야지. 나무를 받치는 파이프도. 파이프 옆 사과향기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사과를 매달고 있는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모자를 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오기 전에. 노래에 맞춰, 장갑 낀 손을 일제히 들어 올리기 전에.

사과에 대한 글을 쓰다가 그만두어야지. 사과가 사과가 아닌 것이 되기 전에. 쓰다가 거기서 멈춰야지.
( '사과에 대해 쓰기' 중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시든 잎을 예고했다. 아름다운 색으로 몰락할 거야. 겨울 여왕의 차가운 입김을 보냈다. 코트의 단추를 꼭 잠그길.

눈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친구들이 말했다. 눈이 온다! 그래, 눈이 오겠구나. 나는 친구들의 말을 믿었다. 입을 벌린 채, 눈이 내 혓바닥 위에 떨어지길 기다렸다.
( '동쪽과 서쪽' 중에서)

저 문장은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에게 닿는 것이지. 공기 속으로 흩어지나. 햇빛에 증발할 건가. 다시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하나.
저 문장은 어딘가로 가서 완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저 문장을 들은 사람들이 할 일.
지금은 독백이 공허하게 울리며, 독백에 독백이 더해지는 중이다.
( '참고문헌 없음' 중에서)

좋아하던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한 믿음이 부서졌다. 어떤 비유도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잠과 식사가 사라졌다. 나는 잠을 잤고 먹었겠지만.
입이 사라졌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 '#문단_내_성폭력' 중에서)

다 죽었으니
해 지기 전의 저녁을 기다린다
나는 그곳으로 갈 거야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열쇠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 '손가락과 흰콩' 중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수가
흰 머리카락처럼 늘어갔다.
목록에서 이름들을 지워나갔다.

흰 마스크를 쓰고 웅얼거렸다.
어제도 서로 못 알아들었고 내일도 그럴 테지.
( '캐비닛 시간표'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시인 이성미는 2001년 『문학과사회』에 「나는 쓴다」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칠 일이 지나고 오늘』이 있다. 제5회 시로여는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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