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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스 : 이수명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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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시의 급진적 전위를 개척해온 이수명 신작 시집
“우리에게는 가스가 있다…… 도시가스 보급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전위의 최전선에서 현실 언어의 질서를 허무는 시인 이수명의 여덟번째 시집 『도시가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도시가스”라는 이름의 시는 총 여섯 편이 일련번호 없이 수록되었는데, 연작시가 으레 가질 법한 특징인 연속성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이수명은 전작 『물류창고』(문학과지성사, 2018)에서도 “물류창고”라는 동명의 시 열 편을 수록해 명확한 고유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으로서의 세계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인간마저도 사물처럼 배치되어 있는 평면적인 세계 속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상태의 ‘소진된 인간’이 등장한다. 내면의 감정을 빼앗기거나 기회를 부정당한 것이 아니라 행위의 목적을 잃은 존재, 행위의 이유 자체를 상실해버린 존재로 그에겐 돌아갈 과거도 앞으로의 미래도 부재한다. 말 그대로의 ‘무無’가 곳곳에 편재되어 있는 『도시가스』의 세계. 그러나 이수명은 이러한 세계 안에서도 여전히 장악되지 않은 장소, ‘도시가스 사용 고지서’와 같은 형태로 수치화되고 관리되지 않는 장소를 드문드문 발견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안한다. 시집을 따라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한 걸음씩 떠오르는 것처럼 걸어”(「해피 뉴 이어)」)가다 보면 “갑작스럽게 눈앞에 부상하는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강동호 문학평론가)할 것이다.

출판사 서평

서로 다른 시간대가 하나의 평면으로 기워지고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뒤에야 드러나는 세계의 표면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멩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꿈에 네가 나왔다」 부분

이수명의 시가 도달하려는 장소는 언제나 표면이다. “맨홀 뚜껑에는 도시가스라 씌어져”(「도시가스」, p. 24) 있는 곳이자, “가스관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가스관」)는 곳으로 항상 그 자리에 있기에 오히려 인간의 시야에 잘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표면에 도달하기 위해선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시간, 인식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오로지 세계가 보여주는 풍경에 집중해야 한다.
이 시집의 첫번째 시 「꿈에 네가 나왔다」에서 너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꿈속의 너는 누더기를 걸치다 못해 “누더기가 되어버”린다. 이수명의 시에서 화자가 입고 있는 옷은 말 그대로의 표면으로 그가 입고 있는 옷이야말로 화자가 속한 세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저런 옷가지들을 짜깁기하고, 구멍 난 곳을 또 다른 옷감으로 채워 넣어 너덜너덜하게 꿰매어진 누더기를 떠올려보자. 자칫 낡아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낡은 느낌은 누더기가 오래된 과거의 옷이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 조각들이 함께 기워져”(강동호) 과거-현재-미래가 구분되지 않은 채로 영원히 현재인 오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주체들은 전국으로 보급된 도시가스로 연결되어 있다. “도시가스 사용 고지서”(「도시가스」, p. 46)로 측량되고 계량화되는 공간과 평면화된 시간성 안에 소진된 주체만이 현존한다.

반복되던 행위들이 중단되고 지연될 때
곳곳에서 출몰하는 소진 불가능한 사태들

어제도 집 앞에 세우고 그제도 집 앞에 세우고 일주일 전에도 한 달 전에도 계속 계속 집 앞에 세우고 어김없이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세우지 못했다. 집 앞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집 주위를 빙빙 돌았는데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았는데 계속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계속 거기에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다. 어디에 차를 세울까

어두운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오니 아이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왜 우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땅을 내려다보며 울지 않았다고 대답할지도 모르는데 사라져버렸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세우고」 부분

도착할 과거도 도달할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주체의 행위는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일에 머문다. 행위에 대한 이유나 당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복적인 행위만이 거의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제도 집 앞에 세우고 그제도 집 앞에 세우고” 한 달 전에도 계속 계속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있다. 여기엔 어떠한 감정이나 내면의 풍경이 중요치 않다. 집 앞의 공간에 똑같이 차를 세우는 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세워야 할 자리에 ‘아이’가 등장하고, “어두운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예상 밖의 일이 발생한다. 물론 그날의 일은 바로 잊힐 것이고, 화자는 내일 다시 똑같은 자리에 차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문제는 “순간적으로 드러난 집 앞의 빈 공간”이다. “변함없는 세계의 동시대적 반복과 그 반복을 잠깐이나마 지연시키는 소규모의 미세한”(강동호) 중단 말이다. 소진되고 고갈된, 반복되는 세계의 표면에서 끝끝내 정복되지도 소진되지도 않은 사태가 출현하는 것이다.
“관건은 세계 자체 내에서, 세계에 의해 온전하게 장악되지 않는 장소를 발견하는 일”(강동호)이다. 그 장소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멀리 갈 필요가 없다./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면 된다”(「옥상)」). 다행스럽게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옥상과 같이 일상과 가까운 곳에 있다. “그곳에 이르게 된다면 시인이 펼쳐놓은 적나라한 표면의 세계, 세계로서의 표면이 예상보다 명랑하고, 생각보다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광활하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강동호).

목차

시인의 말
1부
꿈에 네가 나왔다 /6월 /창가에 서 있는 사람 /도시가스 /무단결석 /주기적 여름의 교체 / /도시가스 /물류창고 /비가 내리는데 /도시가스 /옥상 /물류창고 /빛을 세워도 좋을까 /도시가스 /차를 세우고 /물류창고 /밖에 있는 사람 /도시가스 /연못에 들어가면 안 돼요 /로비에서 보기로 했다 /올해의 마지막 날들 /겨울 /가스관

2부
이 노을 /처음부터 다시 /해피 뉴 이어 /유령처럼 /같이 비가 내려요 /철물점 /즐거운 여행 /눈 오는 날 /명랑한 커피 /페이크삭스 /최후의 산책 /풀 위에서 웃었다 /완전한 나무들 /음 소거 /4단지 /다른 날 /비와 춤을 춘다

3부
티타임 /잠자는 책 /조용한 생활 /적당한 사람 /에티오피아식 인사 /물푸레나무 /정적이 흐른다 /내일은 더 추워진다고 해요 /흑맥주 마시러 가는 오후 /팝콘 /근린공원 /아파트 공사장 /확실한 것은 아니야 /운동을 시작해볼까요 /그냥 내버려두었다

해설│무의 광장ㆍ강동호

본문중에서

그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의 사람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아무 창가에 서 있고

창은 네모난 창 마주 보는 변의 길이가 같은 창 마주 보는 각들이 평온한 창 거꾸로 세워도 똑같은 그러나 오늘은 전보다 조금 넓어진 듯 보이고

안녕,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건네면 안녕, 대답하고 요즘 좋아 보여, 하면 요즘 좋아, 똑같이 말하고
-「창가에 서 있는 사람」 부분

아침에는 읽던 책의 페이지를 찾을 수 없었고 저장했던 파일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왜 이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긴 그림자가 둥둥 떠다니는데
거리가 흔들리는 느낌이었고
오픈한 상가의 스카이댄스 인형이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었다.
-「주기적 여름의 교체」 부분

바닥에서 벽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실 부스러기들이 나온다. 보이지도 않게 옮겨 다닌다.

자꾸 말이 끊기고 있다. 끊어진 말 사이에서 청소를 한다. 청소 사이에 가구가 있다. 가구 사이에 올해의 마지막 날들이 있다. 마지막 날들의 실오라기를 집어 올린다. 이 날들에서 조금 더 지나면 다른 것이 끊어질 것이다. 이를테면 새로운 소식이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날들」 부분

당신이 가고 나무를 태웁니다. 당신이 가고 당신을 태웁니다. 너무 환합니다. 같이 식사를 해요 같이 풀밭을 건너요 풀밭에서 왜 우냐고 당신이 물어봅니다. 당신이 가고 사람들이 합창을 합니다. 같이 여기를 떠올려요 같이 잔을 들어요 착한 술을 기울여 조금 마시면 죽어가는 피부가 여기 있습니다.
-「같이 비가 내려요」 부분

■ 뒤표지 글

가스가 있다. 우리에게는 가스가 있다. 가스는 색깔이 없고 냄새가 없고 무게가 없고 가스는 소리가 없고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가스는 부드럽고 가스는 온화하고 가스는 은은하게 순조롭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가스는 우리를 어루만지고 우리의 생각은 온통 가스로 가득 차 있다. 도시가스 보급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저자소개

이수명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김구용 연구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연구서 '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번역서 '낭만주의', '라캉', '데리다', '조이스' 등을 펴냈다. 박인환문학상(2001년), 현대시작품상(2011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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