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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기후 : 이민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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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환상을 기록하는 시인 이민하
각자의 기후를 살아가는 서로를 발견하는 우리들

전위시의 대표 주자로 낯선 세계를 열어 보이는 시인 이민하의 다섯번째 시집 『미기후』(문학과지성사, 2021)가 출간됐다. 2000년 『현대시』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시인은 “단 한 번도 상투적으로 말하지 않는”(황현산 문학평론가)다는 평을 받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적 비유의 도식을 해체하고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의 축조술을 선보여왔다. 이 책은 지난 시집 『세상의 모든 비밀』 이후 6년 만에 출간한 시집으로 조금씩 다듬어온 시편 63편이 수록되었다.
시집의 제목 “미기후”는 아주 작은 범위 내의 기후를 일컫는 말로서, 흔히 지면에서 1.5미터 정도 높이까지를 측정 대상으로 한다. 좁은 구역마다 서로 다른 기후를 지닌다면, 이 기후를 느끼기 위해선 직접 구역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이민하의 시집에서 ‘미기후’의 체험은 각자 ‘피의 날’이라고 부를 만큼 폭력적인 시간들을 견뎌온 여성들이 주변의 “어딘지 낯익은”(「문학 개론」) 서로를 발견할 때 시작된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낸 이들의 눈물방울이 “사과알만 한 핏방울”(「늙은 사과밭」)이 되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툭툭 바닥으로 떨어지면 화자는 ‘나’의 미기후 안으로 다가서는 가까운 곳의 ‘너’ 혹은 또 다른 ‘나’를 만난다. 시인은 “수많은 ‘나’의 얼굴을 발견하고 기록한다. ‘나’와 다르지 않은 모든 얼굴을 세세히 쓰다듬으며 네가 곧 ‘나’이고 ‘우리’라고” 말하면서 서로의 기후를 끝없이 가늠해볼 때 “‘우리’의 “끊을 수 없는 연대”는 더욱 견고해진다”(소유정 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무섭니? 이건 꿈이니까 괜찮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유영하는 화자들

낯선 혀가 불쑥 내 입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첫 키스입니까. 첫번째 개새끼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첫사랑을 만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양치질만 하다가 헤어졌으니까요.
엄마, 무서워요. 입에 안개가 낀 것 같아요. 앳된 엄마는 웃었습니다. 너는 꿈을 꾸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

나는 해피와 함께 자랐습니다. 마당에 묶여 있던 해피는 과묵했고 해피밖에 모르는 나는 과문해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습니다. 열한 살 때 나를 만진 개새끼도 해피는 조용히 묻어주었습니다. 2월 5일. 그날은 나의 해피버스데이입니다. 그런데 해피는 어디로 사라졌나요?
-「문학 개론」 부분

이민하의 시가 씌어지는 자리는 화자의 꿈속이다. 꿈 안에서 화자는 “어두운 백척간두 일인실에 누워”(「하류」) 있기도 하고,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기도(「흰 입 검은 입」)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기이한 이미지들은 대체로 아름답다기보다는 두렵거나 공포스러운 것들이고, 더러는 ‘나’를 추행하고 괴롭게 하는 것들이다. 여섯 살 때의 ‘나’를 침범한 “첫번째 개새끼”의 “낯선 혀”이거나, 열한 살 때 “나를 만진 개새끼”이기도 하고 “열아홉에 만난 개새끼”, 스물넷에 만난 한 무리의 개새끼들까지 주저주저하던 이야기들이 악몽의 틈새에서 주절주절 흘러나온다.
하지만 쏟아지던 이야기들은, “너는 꿈을 꾸는 것처럼 말하는구나”라는 엄마의 말, ‘희생과 정숙’을 강요하는 학교, 혹은 비뚤지 않도록 행동을 교정하려는 아빠의 가위질(「가위」)로 인해 다시 닫혀버리고야 만다. 해피는 불행했던 이야기와 함께 조용히 묻힌다. 나와 함께 자란 나의 강아지 ‘해피’도 나의 ‘해피(행복)’도 ‘개새끼’의 손에 의해 사라진다. 다시 꿈 안이다. 악몽 같은 꿈의 자리에서, 하지만 꿈이니까 어떤 무서운 꿈일지라도 이건 그냥 꿈이니까,라고 되뇌며 수만 가지 이야기를 품고 있는 화자가 있다.

“잘 잤니? 아직 꿈이지만 괜찮아”
서로를 발견하여 꿈 밖으로 끌어주는 여성들의 연대

뒷골목의 소녀들은 시린 깔창을 차고 견디는 피의 날들
달빛도 기어들지 않는 단칸방에서
소녀들은 물방울처럼 태어나

지구의 반이 울고 있다.
-「18」 부분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화자는 그 악몽들 속에서 “피의 날들”을 보낸다. “물방울처럼 태어”난 소녀들이 “사과알만 한 핏방울”(「늙은 사과밭」)이 될 때까지, 익을 대로 익어서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결국 “누군가의 발밑으로 떨어”질 때까지 말이다.
떨어진다. 사과 한 알만큼 굵어진 핏방울들이 가슴에 맺혀 더 이상 매달려 있을 수 없을 때 핏방울들은 바닥으로 떨어져버린다. 공중에 시간이 멈춘 듯 머물고 있을 때는 아무도 몰랐던 우리가 커다란 핏방울의 모양으로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발견된다. 추락하는 내가 다른 곳에서 추락하고 있는 너를, 혹은 떨어지는 내가 떨어지고 있는 과거의 나를 발견한다. 각자의 미기후, 1.5미터 높이 안쪽, 좁은 범위 속으로 누군가 떨어질 때 우리는 서로를 목격한다. “우리는 떨어지면서 발견”(「계단 위의 잠」)된다. 사실 ‘우리’는 “지구의 반”이다, 지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자들이 저마다의 핏방울을 키워가다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핏방울을 떨굴 때 서로를 발견하고 바로 그 순간에 이민하의 시가 씌어진다.

친구들을 찾아 꿈을 따라갔습니다. 안녕? 여기들 모여 있구나. 어딘지 낯익은 소녀들이 비좁은 창문가에서 웅성거립니다. 서로의 입술을 필사하려는 듯이. 이야기를 밧줄처럼 꼬아서 꿈 밖으로 서로를 구조하려는 듯이. 소설보다 길고 복잡하고 외로운 장르입니다.
-「문학 개론」 부분

여기서의 소녀는 사전적 의미대로 어린 여자아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론 할머니, 엄마, 혹은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 여성이 되기를 선택한 ‘라나’와 ‘릴리’일 수도 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어딘지 낯익은” 모습을 한 ‘지구의 절반’인 우리들은 “서로의 입술을 필사”하듯 각자의 아픈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따라 말하며 이 악몽 밖으로 “서로를 구조”하는 데 힘을 모은다. “우리가 있잖아!” “다시 시작하면 돼!” “돕겠다는 뜻이야”(「삭비數飛: 희고 끝없는 소녀들」)라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떨어지는 ‘나’들을 다시 끌어 올리려는 시도 속에서 아직 꿈이지만, 그래도 이 “끊을 수 없는 연대”(「밤과 꿈」)를 통해 꿈 밖으로 다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해피’의 ‘엔드’를 꿈꾸는 한, 우리는 언젠가 꿈속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zip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하류 /wave /흰 입 검은 입 /시간이 멈춘 듯이 /집zip -녹취록 /소년소녀 /18 /가위 /집zip -반복 구간 /보통의 평화 /두족류 /맛있는 인생 /옥탑방의 자매들

2zip 꽃무늬 돗자리에 앉아 있었다
밤과 꿈 /피크닉 /민달팽이가 새벽의 끝까지 점액을 바르듯이 /칼의 감정 /러시아 인형-인간극장 /라나와 릴리-인간극장 /낭독증 /빨간 마스크-인간극장 /마스크 /시간 속의 산책 /작고 연약하고 틀리는 마음 /Sound Cloud

3zip 모든 말을 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할까요
개들의 음악 /포지션 /죄의 맛 /혀 /야유회 /문학 개론 /비어 있는 사람 /거꾸로 가는 마차를 타고 /밀랍 /반복 구간 /사과후事過後 /시간을 나르는 사람 /누드비치

4zip 우리는 떨어지면서 발견됩니다
계단 위의 잠 /천국의 계단 /삭비數飛: 희고 끝없는 소녀들 /구름의 분위기 /졸업 앨범 /필사의 밤 /도마 위의 잠 /물 위의 잠 /죽음이 삶에게 /극야 /없는 사람 /Never Ending Story

5zip 여긴 누구의 꿈속일까
검은 새 /새장 속의 잠 /가정 방문 /유리 만담 /로드무비 /다족류 /베개 밑에서 /손가락을 손톱처럼 기르고 /늙은 사과밭 /내가 없는 곳에서2 /검은 숲 /한 바구니 안에서도 할퀴지 않는 과일들처럼 /생활

해설 소유정 문門과 문問이 열리는 시간

■ 뒤표지 글

처음 제목은 ‘새의 심장을 지닌 개의 노래를 듣는 밤’이었다. 묶었다 풀었다 시집을 목줄처럼 쥐고 2년여를 끄는 동안,
떨어져서 걸었다. 떨어져서 앉았다. 떨어져서 먹었다. 떨어져서 읽었다. 떨어져서 만났다. 떨어져서 헤어졌다. 떨어져서 잤다. 떨어져서 꿈꿨다. 떨어져서 있었다. 떨어져서 없었다.
한 사람과 한 사람, 아픈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는데 얼굴이 닮아 있었다. 같은 질환이나 증상을 앓으면서 공유하게 되는 표정이 있다. 이방인들의 표정과 소수집단의 표정이 있고, 가까이서 보면 생전의 병력에 따라 시체들의 표정도 다르다. 그런 고유함. 그런 다양함. 이 사람이 저기 가면 저 사람이 된다. 그런 얽힘들. 그런 겹침들.
죽을 때까지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걸 알아버렸다. 내가 누워 있던 내내 나와 조금씩 닮은 그들이 내 의자에 앉아 연필을 깎았다. 심지어 내가 죽었던 날에도 멈추지 않았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살이 깎이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몸속에서 연필심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일 센티씩 밖으로 나왔다. 말더듬이처럼 아홉 계절을 기어서 나왔다. 그물코 같은 마음들이 끌어주었다. 다 갚을 수 있을까. 이 시집은 그러므로 일 센티의 속도, 일 센티의 사랑. 세계적인 우울과 각자의 기후 속에서,
떨 어 져 서


본문중에서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가위」 부분

우리는 두 손을 한없이 내리고 앞을 보았다
거울의 깊이를 재려는 듯이

밖에는 검은 눈이 뭉텅뭉텅 떨어졌다
나는 거울 속에 앉아 바라보았다

이제 끝났습니다
다시 뭉칠 수 없는 밤들이 녹기도 전에 쓸려나가고
-「wave」 부분

언니는 돌아앉아 무얼 뜨는 거야? 산부인과에 다녀올 때마다
언니는 습관처럼 무얼 새기는 거야? 팔목이 도마도 아닌데 언니를 아무리 썰어도

언니는 언니를 삼키지 못하고
언니는 언니를 뱉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열여덟 살에 백나비가 되어
곱게 땋은 갈래머리가 칼바람에 잘릴 때까지
-「18」 부분

여자 옆에서 눈을 떴다. 남자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마주 누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깨어났을 때 사람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아니 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잠들었을 때 모두들 속삭이듯 인사했었다. 그들이 돌아갈 때 밖에는 눈이 내렸다. 장맛비였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썼다. 모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볍게 어둠을 털어냈다. 티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점 점 작아질 때까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아니 갈대밭이었는지도 모른다.
-「사과후事過後」 부분

저자소개

생년월일 -

시인 이민하는 2000년 『현대시』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이 있다. 2012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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