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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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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 발행 : 2003년 12월 11일
  • 쪽수 : 128
  • ISBN : 978893201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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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황인숙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자 5년 만에 내놓는 시집. 이번 시집에는 누구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노년, 만년 아이처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감각의 선을 그릴 것만 같은 황인숙 시인조차 피해갈 수 없는 노년에 대한 기울임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예의 그 권태로움과 싫지 않은 투정도 잊지 않으면서 삶의 깊이, 연민, 쇠약함, 애잔함을 담아낸 시어들을 담아내고 있다.

출판사 서평

『자명한 산책』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자 그가 5년 만에 내놓는 시집이다. 그간 몇 권의 수필과 동화를 쓰기도 했던 시인이지만, 예의 그 경쾌하고 생기발랄한 언어 부림의 재주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그의 시집만 한 것이 없다. 더욱이 오랜만에 독자를 찾은 시집이라 그 반가움이 책장을 부산스레 넘기게 한다.
이번 시집은 누구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노년, 만년 아이처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감각의 선을 그릴 것만 같은 황인숙조차 피해갈 수 없는 그 노년에 대한 기울임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미래를 떠올리는 시선의 ‘애잔함’이 그것이다.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노인」 부분

기가 막히다
세월의 빠름이, 아니 사실
빠른 건 모르겠는데
세월의 많음이

균열이 포개진 주름. ―「주름과 균열」 부분

이쯤 되면 독자들은 은근히 우려의 목소리를 낼 법도 하다. 젊은 도시적 감수성, 톡톡 튀는 발랄함, 감각과 몽상에 이끌린 생의 탐미, 대충 이런 것들로 규정되는 시인을 다시 볼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나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고종석이 지적하고 있듯이, 황인숙의 “시각적이고 순간적이며 집중적인” 생의 노래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채 다만 ‘경쾌’의 외피를 입고 있던 사물과 세상살이의 풍경에서 그 외의 것을 발견하고 더욱 풍성해졌을 따름이다. 삶의 깊이, 연민, 쇠약함, 애잔함을 담아낸 시어는 백석에 견주어질 만큼 “긴장된 리듬감”을 타고 “발랄함으로 승화”(고종석)하고 있으며, 황인숙만이 품을 수 있는 응집된 상상력으로 현실의 남루함을 싱싱하게 변주한다. 이번 시집이 더욱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봄이 되면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닥다리를 세우겠네
은빛 사닥다리,
은빛 사닥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오르겠네
사닥다리, 뼈로만 이루어진 사닥다리
한 디딤마다 내 발은 후들후들 떨겠네
내 손은 악착같이 사닥다리를 쥐겠네
사닥다리, 발이 손을 따르는 사닥다리

구름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대추나무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종달새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돌멩이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땅바닥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내 사랑이 아슬아슬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봄이 되면 땅바닥은 누워 있는 사닥다리를 세우네. ―「사닥다리」 전문

또 황인숙은 예의 그 권태로움과 싫지 않은 투정도 잊지 않고 있다.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자명한 산책」 전문

“헛되이 문지르고 쥐어짠 것”(「광장, 착오, 책략」)이 결코 아닌, 될 수 없는 그의 시 산책은 그래서 늘 즐겁다. 이만하면 “내 시가 최소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소극적 바람은 그 목표치를 초과 달성한 셈이다.

“난 즐거움으로 달려요. 난 일로 달리기 싫어요”라고 말하는 달음박질꾼처럼 즐거움으로 시를 쓰고 싶다. 매혹적인 시의 길이 영원까지 뻗어 있었으면 좋겠다. _「뒤표지」 글에서



♧ 저자 소개

황인숙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 『슬픔이 나를 깨운다』(1990),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1994),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가 있다.
1999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골목길
냄새
무교동
거미의 달
갇힌 사람
남산, 11월
네 마흔 살
아주 외딴 골목길
모진 소리
폭풍 속으로 1
폭풍 속으로 2
르네 마그리트의 하늘
숨쉬는 명함들
화난, 환한 수풀
시리다
명아주

여기서부터
해방촌, 나의 언덕길
막다른 골목
코끼리
조용한 이웃
황사 바람 1
황사 바람 2
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안데르센

벚꽃 반쯤 떨어지고
시멘트 연못
희망
관광
거미의 밤
광장, 착오, 책략
주름과 균열
나무들
그날
그녀는 걸었다
수전증
노인
겨울밤

꿈들
그때는 설레었지요
사닥다리
석류 한 알
젖은 혀, 마른 혀
다른 삶
삶은 감자
악착같이
병든 사람
움찔, 아찔
그렇게 여름은 앉아 있고

열한시 반
밤과 고양이
삶의 음보
공터
어두운 장롱
복개천에서


아, 해가 나를
겨울 햇살 아래서
工作所 거리
가을밤 1
가을밤 2
나무들 아직 푸르른데
담쟁이
자명한 산책
눈길
봄의 꿈
불행의 나비, 행운의 나비
환청
나비
하늘로 뚫린 계단 풍경

해설: 자명한 산책길에 놓인 일곱 개의 푯말 - 고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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