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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세계 : 백은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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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시 전체를 포말처럼 둘러싼 정서로 감촉되는 시

    [가능세계]에서 백은선은 시적 고민의 흔적을 반복적으로 정직하게 드러내는 반면, 시적 정황이나 이미지 들을 친절하게 전달하려 애쓰지는 않는다. 쌓았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면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모아 쓴 것이 그의 시다. 명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서로 엮이지 않는 이미지들이 쉼 없이 밀려온다. 선명한 이미지와 또렷한 의미가 아니라, 시 전체를 포말처럼 둘러싼 정서로 감촉되는 시. 책장을 덮어도 계속 생산될 것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획득한 언어의 포말들이 이곳에 가득하다.

    출판사 서평

    끝의 끝에서 씌어진 시
    단단한 침묵으로 채워진 무의미의 사전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백은선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긴 호흡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유려한 리듬"과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대결의식"으로 장차 "장시의 새로운 미학"을 보여줄 것이라는 등단 당시의 예측은, 4년 동안의 결과물을 모아 엮은 시집 [가능세계]에서 적중하였다.

    한 편이 열 페이지에 달하곤 하는 백은선의 장시에서 범람하는 문장들은 쉼 없이 이미지를 나열한다. 이미지들은 숨은 의미를 위한 힌트로써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씌어지는 즉시 휘발"되기 위해 서로를 밀어낸다. "무의미의 사전"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백은선이 끝장날 듯하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희망도 완전한 종말도 불가능한 ‘가능세계’를 즉흥적으로 갈겨쓴 포말 같은 문장들로 채우는 장면이다. 오랜 아픔인 기억과 갓 태어난 슬픔인 사랑을 기반으로 불가해한 것에 도달하기 위한 백은선의 시적 실험은 ‘지금’을 만나 그 어떤 시보다 유효해진다.

    우리는 함께 끝장나는 중이다. 진짜 끝장은 일어나지 않지만 영원히 전투태세만을 유지해야 하는 무력한 상황에서 지쳐가고 있다. 끝장과 실패가 반복되며 절망이 일상이 되어, 마침내 영혼이 텅 빈 상태일 때 과연 시는 씌어질 수 있을까. 백은선의 시에서 이러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 시대의 시는 더 이상 특별한 무언가가 될 수 없다. ‘낭만’이 될 수 없고 어떤 피난처가 될 수 없으며 선언이 될 수도 없다. 파국의 상황 속에서, 그것이 단어들의 무의미한 나열일지언정 그저 멈추지 않고 터져 나오는 어떤 말, 그 자체가 시인지도 모른다. 이런 ‘소진의 글쓰기’는 결국 절망과 파국의 시대에 유일하게 가능한 시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완벽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쓰기라는 행위 역시, 시도되는 즉시 휘발되고 사라지는 것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조연정 / 문학평론가

    갈겨쓰는 시, 분명한 염원
    ㅡ"끝장났으면 좋겠다 이게 끝이면 좋겠다"
    왜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지 못할까


    끝을 안다고 적어놓고서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서
    (/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중에서)

    과장을 섞지 않아도 세상은 충분히 절망적이다. 사토리 세대(일본, 출세에 관심 없이 달관함), 니니 세대(스페인, 일도 공부도 안 함), 시리어스 세대(노르웨이, 상시화된 위험에 공포를 느낌)처럼 오늘의 세대를 명명하는 말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무심한 고통이 일상이 되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자각한 어느 날, 차라리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백은선 시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은 리셋 버튼을 누르기 직전 혹은 직후의 언제쯤, 어딘가인 듯 보인다. "어째서 세상은 이 따위고, 어째서 새나 강물 같은 것을 보며 평화롭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슬픈 마음을 슬프다고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서"([종이배 호수]) 화자는 줄곧 바란다. 차라리 "그냥 다 끝장났으면" 좋겠다고,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가능세계])고. 그리고 묻는다. 대체 ‘홍수는 언제 와?’([변성])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가능세계]에서 끝없이 지속되는 이러한 무력감이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나 문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소진의 정서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주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사랑을 통해 무심한 슬픔을 드러내는 백은선의 시에서 연인 혹은 함께 시를 쓰는 친구(전우) 사이로 자주 등장하는 ‘우리’는 모두 파국적 상황에 놓여 있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삶의 실감이란 "나는 지워지는 것 같다"([고백놀이])는 감각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억은 상처를 되새길 뿐인데 잊히지 않고, 사랑은 끝장을 앞당기는 일("달리는 차 안에서 남녀가 서로의 눈을 가리고 웃는다", [청혼])인데 멈출 수 없다. 모든 것을 갈아 엎고 폐허 위에 무언가를 새로 건축한다면 차라리 희망적일까? 글쎄, 지금은 멈추지 않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다시’ 실패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또다시 시도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백은선은 범람하는 문장들을 잇기 시작한다.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
    나는 현상과 감정에 무연해지고 있다. 너도 그렇다고 했다. 그 이후에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한다고. 나도 생각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이후와 이후에 씌어진 시와 그 시의 이후에서부터 다시 씌어진 이후와...... 이것을 무수히 반복한 다음.
    (/ '사랑의 역사' 중에서)

    소란을 가장한 침묵
    ㅡ"세상의 모든 접속사를 이어 만든 커다란 이불"

    만 명의 울음소리를 겹치고 웃음소리를 겹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짖음을 얻게 됩니다. 거기서 의도하지 않은 언어와 같은 형태가 생겨났고 [......] 때로 겹쳐진 소리들을 다시 겹치거나 해체하는 작업이 시행되었습니다. [......] 무한히 반복되는 동시에 무한히 끝나는 [......] 그것은 절망과 유사한 풍경이다. [......] 저고는 웃지 않습니다. 저고는 울지도 않습니다. 저고는 소리의 집합체로 만들어진 단단한 침묵입니다. [......] 혹자는 그 단어들을 모아 무의미의 사전을 편찬하려고 합니다
    (/ '저고' 중에서)

    "영혼을 발명"하기 위해 태어난 "저고"의 "실험"처럼, 백은선의 시는 "추락"하고 "의심"하여 소진된 상태에 "단단한 침묵" 같은 소리의 집합체에서 "반지, 구름, 껌, 지갑" 같은 단어들을 불쑥 길어 올린다([저고]). "나는 우리가 삭제한 문장들을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문장들을 모두 모아 상자에 집어넣고 손을 넣어 하나씩 꺼내보고 싶었다 그 조각들을 맞춰 시를 쓰면 어떨까 궁금해"진 것이다. "끝없이 적어 내려갈 때, 그건 그냥 동물 울음소리. 진동하는 공백"([파충])임을 자각하고 있지만, "길 끝을 돌면 다른 세계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래오래 걸었어. 물론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이상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가장 불가해한 것에 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비신비]).

    [가능세계]에서 백은선은 이처럼 시적 고민의 흔적을 반복적으로 정직하게 드러내는 반면, 시적 정황이나 이미지 들을 친절하게 전달하려 애쓰지는 않는다. 즉흥적으로 씌어진 문장들은 실상 몇 번이나 시인 자신 안에서의 ‘의심’과 ‘필터’를 거친 ‘조각 모음’이며, "통속적인 말로 이루어진 시일까" "이게 시 같니 이게 시가 되니"([동세포 생물]), "ㅡ찾을 수 있을까?/ㅡ뭘?/ㅡ원인을, 원인의 원인을"([야맹증])이라는 구절들에서 드러나듯 자문자답("질문과 대답"), 그리고 자책과 자괴를 거듭한 뒤의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쌓았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면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모아 쓴 것이 그의 시다. 명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서로 엮이지 않는 이미지들이 쉼 없이 밀려온다. 선명한 이미지와 또렷한 의미가 아니라, 시 전체를 포말처럼 둘러싼 정서로 감촉되는 시. "내일은 또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거다 그것이 무섭고 좋았다"([멸종위기]). 책장을 덮어도 계속 생산될 것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획득한 언어의 포말들이 이곳에 가득하다.

    목차

    1부
    어려운 일들
    명륜동 성당
    유리도시
    변성
    범람하는 집
    어려운 일들
    눈보라의 끝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중력의 대화자들
    발생연습
    병원 손님 의자 테이블
    청혼

    2부
    야맹증
    파충
    나이트 크루징
    가능세계
    아홉 가지 색과 온도에 대한 마음
    터널, 절대영도
    미장아빔
    음악 이전의 책
    독순
    사랑의 역사
    종이배 호수
    질문과 대답
    질문과 대답
    고백놀이

    3부
    자매
    멸종위기
    여름시
    언플러그드 朔
    木浦
    목격자
    혈액병동 라디오
    기면발작
    열대병
    모자이크
    저고

    4부
    동세포 생물
    동세포 생물
    호텔 밀라파숨
    샹주망 아버지
    성스러운 피
    가장 죽은 이상하고 아픈
    파델의 숟가락
    뼈와 그림자
    비신비
    비신비
    박쥐
    도움의 돌

    해설 | 소진된 우리-조연정

    본문중에서

    우리는 사랑에 관한 비유들로 낱말 놀이를 하기로 했어

    너는 치즈, 소금, 얼음이라고 말했어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어

    왜 사라진 것들뿐이니

    구름, 바람, 비라고 내가 대답했어

    그렇다면 도처에 사랑이 있겠네

    빈정대며 네가 말했지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우리라고
    (/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중에서)

    우리는 모든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생각을 한다. 시장 앞 골목에 서서 고등어와 갈치 매달려 있는 돼지의 몸통과 잘린 머리를 본다. 차곡히 쌓여 있는 백합향 비누와 반쯤 돌아선 여배우의 얼굴이 늘어선 샴푸를 본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포터 트럭이 시동을 건다. 나는 너무 느린 스스로를 원망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어떤 흐름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간이나 미러볼 혹은 죽음과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특별한 것 센 것이 근원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실종된 형제에 대해 쓰고 폭력과 근친에 대해 썼다. 수치스럽고 즐거웠다. 파란 트럭의 속력처럼. 마침내 불을 밝힌 가로등 아래 연인들의 포개진 어깨처럼. 거대한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므로. 사랑한다고 죽어버리라고 했다.

    강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찢어진 타이어 속을 오가는 민물고기나 오래전에 투신해 앙상해진 몸을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씩 반복해서 말해야만 하고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중요하다. 잘린 머리들은 모두 다른 표정이라서 끔찍하고 남의 글을 훔쳐볼 때 쉽게 느끼곤 하는 자괴처럼 단순하다. 나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 뼈에서 유추할 수 없는 원래의 모습, 마지막 목소리 같은 것에 몰두해야만 한다.

    혼종에 대해 말하거나 쓰는 것 그런 담론 속으로 이끌려가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혼종은 없으므로. 우리는 혼종에 대한 혼종, 일종의 갈망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사라진 마을에 대한 복기이고, 그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 '도움의 돌' 전문)

    나는 프레임 바깥에 서 있다. 너는 종을 치고 나는 잊히지 않는 한 단어를 생각한다. 너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나는 너를 생각한다. 이 소설은 죽은 사람이 들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구름이 간다. 첫 문장이다. 이제 시작되어야 하는 건 섬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 섬. 너는 얼음의 입김 속에서 태어났다. 나는 침묵하는 화자. 나는 눈이 먼 숲. 섬의 손끝이 볼에 닿자 차가운 물이 발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이것은 빛을 숲이라고 믿은 망자에 대한 소설이다. 구름이 깜박이며 네 얼굴 위로 그림자 쏟는다. 두번째 문장이다. 나는 창백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 번 불리면 결국 돌아보게 될까. 나는 너를 부르고 너는 불 속에 누워 있다. 눈을 꽉 감고 귀를 틀어막고 노래해봐. 섬. 서랍 속에서 흔들린 것은 숨이었다. 열번째 문장. 네가 잊힌 것을 떠올리며 돌아설 때. 텅 빈 길 위에서 소리쳐 내 이름을 꺼낼 때. 섬. 나는 감은 눈 속에서 끝없이 되감기 중인 영원과 같은 장면. 차가운 이마를 짚는 손. 나는 이제 청각을 믿어. 섬. 누군가 물질과 투명에 대한 의심을 시작하고. 입술 끝에서 떨어진 것은 미움이었어. 사랑보다 앞서 나를 만들었어.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해 책을 뒤적였다. 남의 단어를 훔치려고. 섬. 너는 갖고 있었지 많은 말들을. 징그럽고 아름다운 섬. 너를 가득 채운 어둠으로 숲이 부푼다. 통각만으로 열린 채.
    (/ '뒤표지글-시인의 글' 중에서)

    단정한 기계들 깊은 밤

    투명한 구름 속을 헤맨다면

    서서히 지워질 수 있다면

    이토록 차가운, 붉은

    고깃덩어리들 그러면 나는

    불 속에서 너를 지켜볼게

    2016년
    백은선
    (/ '시인의 말'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가능세계]는 백은선의 첫 시집이다.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백은선(viesecrete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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