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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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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구난희
  • 출판사 : 살림
  • 발행 : 2016년 06월 30일
  • 쪽수 : 164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5223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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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황제국이라 칭했던 '해동성국' 발해, 그 생생한 역사의 현장 속을 다시 걷는다!

    발해는 다양한 문화 요소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했고, 이후 당과 관계가 호전되면서 당나라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여기에 말갈의 고유문화,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에서 전해진 문화 요소가 또한 포함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발해만의 고유한 특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문화를 창조해냈다. 오늘날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급격히 진입하고 있는 우리에게 발해의 다양성, 포용성, 유연성은 깊이 성찰하고 본받아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적대와 배척보다 포섭과 융화를 택한 발해인의 지혜에서 우리의 미래를 일구어갈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출판사 서평

    왕대별 테마! 시대별 핵심!
    굵직한 사건을 정사 중심으로 서술한 한국사의 맥!

    문고본 최초로 시도되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
    [발해왕조실록] 출간!

    살림출판사에서는 지난 15여 년간 문, 사, 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과, 과학기술, 예술, 실용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살림지식총서]를 500종 이상 출간했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문고'임을 자처하는 [살림지식총서]가 이번에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전19권)'를 준비했다. 문고본으로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기획이다.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는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까지 반만 년을 지속한 한국사의 맥을 왕대별로 묶었다. 여기에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서고 고조선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는 요하문명도 포함시켰다. 이는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에 대항할 역사관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2015년 [조선왕조실록](전6권)을 시작으로 하여, 2016년 [고조선왕조실록], [고구려왕조실록](전2권), [백제왕조실록](전2권), [가야왕조실록]과 더불어, 이 책 [발해왕조실록]을 펴낸다.

    발해의 진면목을 찾아서
    '중국 둥베이지방(東北地方)과 연해주를 아우른 거대한 나라' '황제국이라 칭함' '중국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일컬음'. 모두 한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바로 발해다.
    발해는 실제로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영유했으며, 강력한 군사력과 문화력을 겸비한 채 주변 여러 민족들을 아울렀고, 탁월한 외교력으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 책 [발해왕조실록]에서 저자는 발해 역사의 영광스러운 일면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어느 나라든 부침이 있기 마련이며, 그런 고난의 극복 과정 역시 그 나라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발해 역사의 어두움과 찬란함 모두를 포괄하고, 아울러 성립 이전과 멸망 이후까지 다룸으로써 진정한 발해의 모습을 오늘에 되살려내고자 한다.

    황제국 발해의 위용
    잘 알다시피 발해는 고구려 출신인 대조영이 당나라의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현재의 지린성 둔화시)에서 건국한 나라다. 고왕 대조영이 고구려 옛 땅인 동모산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강력한 고구려 계승의식이 잘 드러난다.
    그렇지만 발해는 단일 민족, 단일 문화 국가가 아니라 시작부터 다민족, 다문화 국가였다. 이 점은 발해의 가장 독특한 특성이자 강점이기도 했다. 고왕 대조영은 고구려 옛 땅 수복이라는 기치 아래 영토 확장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고, 이는 제2대 무왕 대무예에게로 이어졌다. 무왕은 처음부터 당과 무력으로 맞대응하며 당당히 맞섰으며 이후 국제관계가 변화하자 유연한 자세로 당과 협력관계를 맺기를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자세는 어쩌면 다양한 요소를 아우르며 시작된 발해라는 나라의 본질이 몸에 밴 결과일지도 모른다.
    한편 제3대 문왕 대흠무는 외교에서 철저히 중립 노선을 견지하면서 현명하게 국가의 위상을 재고한다. 또한 안으로는 3성6부제의 중앙관제를 완비하고, 5경을 설치하는가 하면, 군사제도인 10위제도를 마련했다. 이러한 발전과 그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문왕은 발해가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표방했다. 제10대 선왕 대인수에 이르러 발해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고구려의 1.5~2배에 이르는 최대 영토를 확보했으며,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당, 신라, 왜는 물론, 서역과도 교류했다.
    그러나 제15대 대인성왕 대에 이르러, 당나라의 멸망과 5대10국의 혼란 속에서 급성장한 거란족에 의해 발해는 멸망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유민에 의한 부흥운동이 무려 2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그들의 고국 재건을 향한 염원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또렷이 보여준다.

    오늘날 본받아야 할 발해의 다양성, 포용성, 유연성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는 발해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문화 능력과 그 성과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발해는 여러 면에서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며 유연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견지하면서도 이민족과 이문화에 개방적이었다.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변용할 줄 알았고 다양한 통치 방식을 운영하면서 지역별 특성과 장점을 융합하고 통합할 줄 알았다. 발해가 남긴 다양한 문화 속에는 한국적 연원이나 감성으로부터 다소 이탈하는 문화 요소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를 간과하거나 배제할 것이 아니라 적극 포용해야 할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사와 한국 문화의 폭과 범위를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발해는 다양한 문화 요소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했고, 이후 당과 관계가 호전되면서 당나라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여기에 말갈의 고유문화,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에서 전해진 문화 요소가 또한 포함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발해만의 고유한 특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문화를 창조해냈다.
    오늘날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급격히 진입하고 있는 우리에게 발해의 다양성, 포용성, 유연성은 깊이 성찰하고 본받아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적대와 배척보다 포섭과 융화를 택한 발해인의 지혜에서 우리의 미래를 일구어갈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목차

    발해 건국의 전야
    제1대 고왕 대조영
    제2대 무왕 대무예
    제3대 문왕 대흠무
    제4대 대원의왕
    제5대 성왕 대화여
    제6대 강왕 대숭린
    제7대 정왕 대원유
    제8대 희왕 대언의
    제9대 간왕 대명충
    제10대 선왕 대인수
    제11대 대이진왕
    제12대 대건황왕
    제13대 대현석왕
    제14대 대위해왕
    제15대 대인선왕
    발해 유민의 고려 내투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변함없이 이어지는 발해인의 습속
    발해의 도성은 어떠했을까?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는 발해 문화

    본문중에서

    713년(고왕 16)에 당은 다시 최흔(崔炘)을 파견하여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이로부터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신당서]에 언급된 내용에 불과하다. 당시 발해가 스스로를 말갈이라 칭했다는 사실은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지 않으며, 책봉을 받은 뒤 발해가 스스로 진국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 칭했는지 여부 또한 정확하게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당이 말갈이 아닌 발해라는 정식 호칭을 붙였다는 것을 말해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발해가 자주 독립국가라는 것을 당 스스로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 p.19)

    한편 무왕의 대당 정책은 강경일변도로 지속되지만은 않았다. 735년(무왕 17)을 전후로 돌궐 세력이 붕괴하고 거란과 해(奚)는 다시 당에 복속되어 발해의 배후 세력이 와해되었으며, 같은 해 2월 당이 신라에 패강(浿江: 현재의 대동강) 이남을 인정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급속하게 긴밀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 정세 변화를 감지한 무왕은 736년(무왕 18) 대번(大蕃)을 파견하여 숙위 교체를 요구하고, 다시 대무경(大茂慶)을 파견하여 돌궐이 원군을 요청해 온 사실을 전하면서 당과 화해를 도모했다. 이에 당은 대문예 암살 사건 즈음에 파견되었다가 유배되었던 대낭아(大郎雅)를 귀국시키고 발해와 당의 전쟁 당시 붙잡혔던 전쟁포로도 귀환시켰다. 이로써 발해와 당은 대립과 갈등을 청산하고 우호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무왕의 대당 정책 전환은 대외 정세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등주 공격, 마도산 전투 참가, 대일 통교 등을 통해 형성된 대외적 위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하겠다.
    무왕은 이듬해 737년(무왕 19) 사망했다. '武王'이라는 시호(諡號)에서 보듯 그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대외 확장을 추진했으며 이를 견제하려는 당의 획책에 정면 승부로 대응하면서 발해의 대내외 위상을 확립했다. 무왕 대의 정황을 [신당서]에서는 "넓은 땅을 개척하여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pp.27~28)

    문왕은 재위 기간 동안 6차례에 걸쳐 높은 책봉을 받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안사의 난이 끝나갈 무렵인 762년(문왕 26)에는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되었다. 비록 명목상이긴 하지만 문왕 대에 와서 국제적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안으로 문물을 정비하고 밖으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문왕은 자신을 중국 황제에 버금가는 군주로, 발해를 황제국으로 인식했으며 이를 대내외에 공포했다. 이러한 문왕의 인식은 여러 부분에서 확인된다.
    먼저 774년(문왕 38)에는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寶曆)'으로 개칭했다. 보력이란 원래 천자가 백성에게 달력을 내리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문왕이 이를 연호로 정했다는 것은 스스로 천자에 버금가는 황제의 입지를 갖추었다는 자신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 pp.45~46)

    오소도와 오광찬 부자는 대를 이어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오소도는 872년 빈공과에 급제했는데 함께 응시한 신라인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가 발해에 밀린 것을 매우 분하게 생각했다. 2년 뒤인 874년 최치원은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급제했고 자신을 선발해준 당 예부시랑(禮部侍□) 배찬(裵瓚)에게 감사의 글을 보냈다. 그 글 가운데서 이전에 발해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사실을 두고 "관과 신발이 거꾸로 된 것[冠帽倒置]" "영원히 남을 나라의 수치[永胎一國之恥]"라고 표현하면서 그 당시 빈공과를 주관했던 담당 관리 최시랑(崔侍郞)의 판정이 "집안의 닭은 천하게 여기고 산에 있는 고니를 귀하게 여기는 혐의[賤鷄貴鵠]"라고 비꼬아댔다.
    오소도는 이후 발해에서 최고의 재상을 역임한 후 905년 다시 당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의 아들 오광찬도 아버지에 이어 빈공과에 도전했다. 급제는 했지만 함께 응시했던 신라인 최언위(崔彦 )보다 낮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오소도는 이전에 자신이 신라인보다 앞섰던 일을 말하면서 아들의 성적을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당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발해와 신라 간의 빈공과 합격 성적을 둘러싼 경쟁은 학문 업적만이 아니라 양국의 국제적 지위를 확인하는 정치적,외교적 의미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과 오소도 오공찬 부자가 빈공과 성적을 두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선왕 대 이래 9세기 말까지는 발해의 국제적 위상이 신라를 앞서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 pp.94~96)

    발해의 멸망으로 북방 영토가 한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안타까움은 발해의 급작스런 패망 원인을 밝혀보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것 중 하나가 일본 NHK 방송국이 방영한 '발해, 백두산에 묻힌 멸망의 진실'이었다.
    일본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町田洋)는 일본 도호쿠(東北)지방의 독특한 화산재에 주목하고, 그것이 서쪽으로 갈수록 두텁게 쌓여 있는 것을 단서로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p.115)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교수, 발해사·역사교육 전공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역사 이해를 지향하면서 발해사의 원형을 찾고 이를 보존하기 위한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련 저서로는 [발해왕조실록](2016), [발해유적사전](공저, 2015), [8세기 동아시아 역사상](공저, 2011) 등이 있다. 아울러 역사교육 분야에도 다양한 경험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 국내외 역사교육자들과 [우리 역사교육의 역사](2015), ['History Wars' and Reconciliation in Japan and Korea](2016), [日韓で考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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