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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궁색을 뛰어넘은 생의 끈기

고성문인협회 회장을 맡는 등 지역에서 시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김진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차마 다 건넬 수 없는』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356으로 출간되었다. 김진엽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꽃이 꽃을 피우는 일보다 힘든 일임을 알고, 모란 같은 한 줄의 시를 얻기 위해 늘 노력하는 시인이다. 인생은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내야 할 의지도 중요하다는 걸 몸소 체험으로 터득한 김진엽 시인에게 시가 얼마나 큰 위로이며 선물인지 이 시집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정일근(시인, 경남대 석좌교수)
마당에 피는 동백 한 송이에도 김진엽의 시안은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이월 아침에 꽃송이를 내미는, 동백나무의 일까지 시인은 그냥 놓치지 않습니다. 김진엽은 자연에서 얻은 경의를 시로 풀며 시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입추 무렵’에 닿아 시인은 죽음으로 가는 베짱이를 통해 겸손을 배우기도 합니다. 시인은 거기서 “이 작은 짐승이 오늘 내 스승이다”(「주인」)라는 하심(下心)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김진엽이 인생의 가을을 보내며 견지해야 하는 마음이 바로 이 하심일 것입니다. 하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시는 결코 마음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자연에서 시를 얻는 시인의 자세가 그러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동백꽃에서 꿀을 찾는 동박새처럼, 시인은 제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갈 것입니다.


소나무로 만든 책상에 앉아 나이테를 본다.
나이테 간격이 한결같지 않다.
목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다 그러함을 본다.
주머니에 단돈 십 원이 없는데 가슴 그득했던 나날이 있었다.
그런 날을 함께 보낸 사람이 만들어준 소나무 책장에
수많은 시인들이 줄지어 꽂혀 있다. 저들 틈에 내가 있다.
부러 유명 시인들 한복판에 무명인 나를 꽂았다.
몹시 민망했다. 그날의 부끄러움 침묵으로 눌러놓고
내 안에 울고 있는 어린 나를 위로하며 끊임없이 시를 썼다.
미처 성숙하지 못한 내가 나의 창작물이었다.

2022년 11월
김진엽

제1부

미완의 봄 13/2월 14/궁생원(窮生員) 16/몸살에 극성 18/가묘(假墓) 19/미나리는 힘이 세다 22/꾼 24/새가슴의 배후 25/오래된 오늘 26/봄눈 28/눈물 30/아비, 지아비 31/눈의 달란트 32/노을 34


제2부

열 살을 한꺼번에 먹고 37/수화(手話)의 말 38/칠월 셋째 날 40/빈집 42/생일의 손 43/기울어지는 것의 순간 44/봄비 내리는데 46/그녀 48/동행 49/소설 클레멘타인 50/백로에 다녀간 산타 54/봄, 오일쯤이면 55/초록 지팡이 56/두릅 58


제3부

소소 1 61/조립한 꿈 62/봄 도다리쑥국 64/손대지 마세요 65/아닌데 66/입추 무렵 68/넉넉한 품 69/천지에서 싸우다 70/흑백사진 1 72/흑백사진 2 74/부창부수 75/해당화 76/환불 78/소소 2 80


제4부

시는 후회를 낳고 83/시를 준 새 84/남자의 이유 85/신이 존재하는 이유 86/서커스를 보다 88/흑심(黑心) 89/왜 안 됩니까 90/자리 92/내가 졌다 94/동백나무에 일 났다 95/그는 외로워서 죽었다 96/행진 98/주인 100

발문 정일근(시인, 경남대 석좌교수) 101

피는 꽃 그리려는 사이 꽃이 지고 있다

붓 대롱에 댓잎 대꽃 다 피도록 한 송이 모란 못 그리다니
시에는 영 소질이 없나 보다

미끄러지며 겨우 그은 일 획
한 줄조차 엉망이다

올봄에는 딱 한 줄 제대로 써보려 했지만
- 「미완의 봄」 전문


미나리꽝에다 집을 지었다
미나리는 절망하지 않고
내 집 뿌리가 되었다
마당 여기저기 미나리가 돋았다
흙 채워 서너 자는 돋운 마당에
흙이며 자갈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들여다보니 순한 조선의 얼굴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저 미나리 자손처럼
우리 식솔 힘차게 솟아라
번지고 번져서 번성하고
번성하여 힘을 기르길
미나리에는 사람 모으는 힘이 있다
나물밥 나눌 때 그렇고
가을 전어 초미나리무침 한 대야 버무리면
저절로 사람이 모인다
어머니가 모이고 아버지가 모인다
일가친척이 다 모인다
모이는 것이 뭉치는 힘
미나리의 힘이다
- 「미나리는 힘이 세다」 전문


사람 없는 집에서 한 이틀 몸살 앓았다 일터로 나가고 장가가고 불렀지만 대답할 사람 없는 줄 알면서 아이 이름을 부르며 문을 밀고 나간다

당연한 일인데 서운하다 절간이 따로 없다 다리가 휘청하고 몸살이 한 번 더 농익는다 몸에 남아 있던 것이 우수수 빠져나간다 열 살을 한꺼번에 먹어버린 것만 같다

적막은 햇살에 부서지고
힘겨워 박살 난 설운 어깨
햇빛과 바람에 맡기고
며칠 만에 올려다본 하늘
새 한 마리 날아간다
- 「열 살을 한꺼번에 먹고」 전문


손이 참 거칠다 둘러보면 다 비슷비슷하게 사는데 손은 내 손이 제일 거칠다

쉴 틈 없이 부려먹었다 거칠긴 당연한데 습관인 듯 조금 나아 보이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는다

누구는 거친 제 손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열심히 살았으므로 떳떳했다 그건 무엇인가 해낸 자에게 허용된 말
나는 손이 먼저 늙었다

이 손으로 막히면 뚫고 허물어지면 일으켜 세우며 이 악물고 여기까지 왔다 어제가 내 생일인데 식구는 아예 모르는 것 같다 우두커니 앉아서 굵은 손마디 자꾸 문질러 본다 크림을 듬뿍 발라가며 문질러 보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는 손

손이 참 많이 늙었다
- 「생일의 손」 전문


호미로 우물 하나 파는 데 몇 년이나 걸릴까 시가 묻혀 있는 우물을 판 지 이십삼 년째 되는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 호미 삽 괭이 연필 볼펜 만년필 모든 연장을 동원해 파고 또 판다 물길은 좀처럼 안 터진다 애당초 맥을 잘못 짚은 것일까 길라잡이 없이 나선 외로운 길 이 길을 영 잘못 든 것일까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돌아가기엔 인생을 너무 탕진했다

차라리 그때 뿌리 있는 나무를 심었더라면 지금쯤 그 나무 얼마나 자랐을까 사람을 길렀으면 청년이 될 시간 맞아 그때 나무를 심었더라면 그 나무 그늘에 앉아 찻잔이나 기울이며 차향에 흠뻑 취한 매미랑 주거니 받거니 놀 것을 아이를 이토록 지극정성으로 길렀더라면 늘그막에 극진한 효도나 받을 것을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 「시는 후회를 낳고」 전문


시집 서너 권 들고 이걸 뒤적 저걸 뒤적 마루에 엎디어서 보다가 반듯이 누워서 읽는데 이렇게 놀면 되나 시 걱정하는데

쿵

새가 창문을 아주 세차게 들이받았다 땅에 굴러떨어지지는 않고 휘청하다 날아간다 천만다행이다 담 밖 뽕나무에 앉았다

나는 여기까지 재빨리 쓰고 슬쩍 내다보니

날아가고 없다 얼마나 아플까 멍이 시퍼렇게 들었을 텐데 해가 지도록 빈둥거리다 깜짝 놀라 연필을 들다 새가 시 속으로 들어오는데 닫힌 창문을 들이받고 들어오는데 죽지 않을 만큼 온몸 던져 들어오는데

멀리 날지 못할 텐데
사나흘은 고생할 텐데
시가 된 새를 품어보는데
- 「시를 준 새」 전문

■ 발문 엿보기

이번에 두 번째 시집을 펴내는 김진엽 시인의 시편을 꼼꼼하게 읽다가 ‘궁생원(窮生員)’이란 말을, 무릎을 ‘탁!’ 치면서 즐겁게 배웠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인 우리 나이에 궁색하고 궁핍한 유년의 아픈 기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시인에게 궁색은 상처가 아니라 시로 가는 비상구라는 것에 한 수 배웠습니다. 궁생원이란 ‘곤궁한 서생’이란 뜻이란 걸, 사실 이번에 알았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을 스스로 궁생원이라 칭하고, 저 느티나무 아래에 버려진 의자 하나에까지 깊은 애정을 주면서 숨어 있는 시를 찾아내고 있었습니다.
궁색이 시를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시인이기에 세상을 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에 누구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에 궁색해진 시인은 사물이 가진 DNA에 대한 애정이 큰 법입니다. 통영 사량도란 섬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이기에, 삶이나 사람 대하는 다정이 깊은데 생의 후반부에 시를 만나 시를 보는 눈 또한 그러합니다.

주워온 의자에 앉아 시를 쓴다

낯선 동네 느티나무 아래 버려진 너를 주웠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시오 단정하고 기품 있는 손글씨
얼른 좌우로 밀어본다 삐걱삐걱 날개 다친 새소리
난다 삐걱삐걱 그 집에서 쫓겨난 사연 궁금했는데

통나무 앉음판 닳아서 희끗희끗
앉을깨가 닳도록 뭉그적뭉그적
누가 눌러앉아 무슨 공부했을까
단박에 애착심까지 생겨
버려졌으나 궁색하지 않은 나무 의자
이 정도면 충분해 적당히 낡아서 더 좋아
가자 의자야 여기가 끝이 아니야
버려진 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시무룩하게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나하고 가자 버려진 내가
버려진 너를 어떻게 버리고 가니

데려온 의자 위해 앉은뱅이책상에
같이 살자며 튼튼한 다리 달았다
난데없이 다리가 생긴 것이 이상한지
제 아래 내려다보며 책상은 골똘해지는데

느티나무 아래서 주워온 의자로
서로 다른 것의 환골탈태로
내 오랜 시의 궁색을 면한다
- 「궁생원(窮生員)」 전문

이렇듯 시인은 아내로, 어머니로 살면서 시인의 자리에 늘 시간에 쫓기며 삶에 궁색하지만, 그 곤궁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세상을 보는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시인입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이 정도면 충분해 적당히 낡아서 더 좋아/가자 의자야 여기가 끝이 아니야/버려진 날 다시 시작하는 거야/시무룩하게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나하고 가자 버려진 내가 버려진 너를 어떻게 버리고 가니”라는 따스한 구절이 빚어졌습니다.
“버려진 날 다시 시작하”자는 그의 도전은, 버려진 것에 대한 애정입니다. 궁색의 가르침이며 궁색을 견디며 이겨나가는 힘 또한 사실은 궁색에서 나옵니다. 그 힘이 시인의 힘입니다. 나는 그 따뜻함이 시인의 정체성이며, 시인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힘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궁색과 곤궁에서도 사람의 온기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차(茶)를 유난히 사랑하는 김진엽 시인에게 개인적으로 차 빚이 많은 사람입니다. 시인은 고향 사량도와 고성 당항포에 작은 차밭을 가지고 알뜰하게 차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벌써 스무 해 넘게 차나무에 새순이 나면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듭니다. 그 힘든 노동의 시간을 즐기며 녹차와 황차를 빚고 시인 특유의 고유한 차 맛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차를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차를 좋아해서 차를 만들고, 그 차를 아낌없이 이웃과 친구들과 나눕니다. 그 덕에 저도 시인에게 해마다 차 빚을 집니다. 그런 열성이 시인의 차를 한 번이라도 마셔본 사람 사이에서 ‘명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술꾼에게 술시가 있듯 차꾼에게 차시가 있다 차시가 되면 목이 타 안절부절못하다가 찻물 먼저 올려놓고 혹시 누가 안 오나 주섬주섬 다기 챙기며 창밖을 기웃기웃 기척 없는 손전화기 열어보고 이내 또 열어보고 끓는 찻물 식히는 둥 마는 둥 거푸 몇 잔 들이켜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데

비 오면 비가 와서 한 잔 바람 불면 바람이 좋아 한 잔 시집 읽다 멋진 시가 부러워서 한 잔 부용꽃 피었다고 반가워서 한 잔 부처꽃 흔들린다며 흥얼거리며 한 잔 제비꽃 색깔이 고와서 또 한 잔 꾼은 어째 이토록 마셔야 할 이유가 많은지 생각하다 또 한 잔
- 「꾼」 전문

그의 시 「꾼」에서 시인은 차를 마시는 이유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합니다. 차를 마시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소리 ‘단가(短歌)’의 한 대목을 듣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비 오면 비가 와서” “바람 불면 바람이 좋아” 차 한 잔을 마시는 시인의 여유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언젠가 시인의 댁을 방문해 찻잎을 황차로 발효시키는 과정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노역과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시인의 황차는 봄에 찻잎을 따 슬쩍 뚝딱 세상에 나오는 차가 아니었습니다. 6개월 동안 어린아이 돌보듯 모든 정성을 다한 뒤에 제 몸을 푸는 차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차를 아낌없이 나누는데, 저는 그 과정을 알면서 염치없이 해마다 차 빚을 지면서 얻어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인사를 나눈 지 스무 해가 지났지만, 시인과 저 사이에는 시인이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과 은은한 차향이 있어 늘 고마울 따름입니다.
- 정일근(시인, 경남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