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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전당 시인선〉 249 2012년 제16회 <경기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2013년 《문학광장》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경순 시인의 첫 시집. 시집 한 권으로 밀어 올린 시적 세계는 일상에서 환기되거나 불현듯 찾아오는 근심과 불안을 ‘꽃’이나 ‘나무’와 같은 식물성 세계의 낯익은 사물들을 통해 내면화하거나 극복하려는 의지로 구축했다. 식물성 세계는 서로를 품어주고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는 삶의 자세를 지켜나가면서 점차 확장된다. 이 시집이 가진 식물적 호의가 가녀린 세계를 보듬어주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잠 속에 잠겨 있고 싶었던 새벽 시간들
창문을 열어젖히는 첫 새소리는
새로운 하루를 물고 와 나를 채근하곤 했다.
새소리에 묻어나는 시를 발견한 건
내 삶의 거대한 발견이었다.
새벽달을 향하여
질문과 대답을 번갈아가며
달빛의 온기를 느낀다.
새벽을 즐기던 나의 시들을 모아
세상 속으로 내보낸다.
이 행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배두순(시인)
최경순 시인은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가장 뜨거운 마음으로”(「다림질」) 시와 삶을 연주하는 시인이다. 평소에도 구겨진 옷을 다림질하듯 자신의 삶도 반듯하게 다릴 줄 아는 심성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세상 이치와 자연의 보편성을 귀히 여길 줄 아는 깊은 사유가 시인의 시 정신을 더욱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는 시인의 삶과 시가 둘로 나누어지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꽃이 피어 슬픔이 깊어지는지/슬픔이 깊어 꽃으로 피어나는지/내 생의 한복판에 피는 꽃들은/저처럼 붉고 뜨거웠으면 좋겠다”(「무엇으로 서야 하는가」)라는 기도와도 같은 염원으로 “잠시 흔들렸던 중심을” 바로잡을 줄 알고, 늘 희망을 곁에 둘 줄 아는 시인이다. “여기저기 꽃소식이 들려오지만/나는 꽃을 보러 일부러 나서지는 않았다/마음에 꽃 한 송이 피어”(「꽃을 보러 일부러 가지 않았다」)나는 봄날의 그 통증 같은 전율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마음가짐은 얼마나 결연한가? 마음의 꽃 한 송이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우주적 사유(思惟)가 최경순 시인을 더욱 시인답게 만들고 있다. 서정시의 본질을 흩트리지 않는 생생한 시인의 증언들이 그저 훈훈할 따름이다.

제1부

새들은 사라지고 13
유폐된 그리움 14
간극 16
말의 힘 18
풀씨 20
늙은 호박 21
수원 지하역에서 22
흘러가는 것들 24
벽시계 26
호접란 27
가끔은 그대로 28
8월의 사내 30
자전거 32
물꽃 그리고 불꽃 33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34

제2부
일출 37
꽃의 진통 38
분수 40
낙화 41
일상 탈출 42
정적 44
저수지 45
숲속의 아침 46
꽃을 보러 일부러 가지 않았다 48
꽃눈 내리는 날 49
낡은 의자 50
깨진 화분 52
모종 53
산수유 필 무렵 54
대한(大寒) 56

제3부
꽃등 59
동백꽃 60
꿈보다 해몽 62
목련 꽃그늘 아래 64
민들레 65
가족 66
매의 발톱을 닮은 꽃 68
별처럼 달처럼 69
다림질 70
길에게 길을 묻지 마라 72
차꽃 74
느티나무 76
무엇으로 서야 하는가 77
균형 78
입춘 80
월담 82

제4부
다시 반추하는 동안 85
반액세일 86
커피가 왔다 88
작은 충만 90
거꾸로 본 세상 92
쓸쓸한 찻집 93
오늘 94
기다림 96
악몽 98
상수리나무 99
그저 지켜볼 뿐 100
경칩 102
입춘대길 103
빈터 104
두물머리를 지나며 106
해설 | 생의 이슥한 불안과 희망 107 고영(시인)

창가에서 바라보는 감나무 한 그루
아침 새소리에
나뭇잎들이 팔랑팔랑 대꾸를 하고 있다
살짝 흔들리기도 하는 가지는
새소리를 덧입은 나무의 울음일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떨고 있는 가지의 미세한 느낌을
감지한 것은 내 어깨의 통증 때문일 것이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나무의 생
바람과 비와 폭설을 견디고
뇌성벽력에 한쪽 팔을 바치기도 하면서 지켜온
나무의 생은 고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가지가 내려앉을 만큼 선심을 베풀던 감나무
해거리를 하는지 풋감 몇 개뿐이다
구부러진 나무의 어깨를 보며
내 아픈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나를 지켜내고 감당하느라
무거운 짐 마다하지 않던 나의 두 어깨를,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전문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생각(나무의 울음)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가 아니라 나무의 속울음을 감지할 수 있게 한‘내 어깨의 통증’이다. “나를 지켜내고 감당하느라/무거운 짐 마다하지 않”았던 어깨는 사실, ‘꽃과 아이들’의 이미지로 거듭해서 등장하는 가족과 후세대를 위한 ‘나’의 희생적 자아로 읽어야 한다. 한 자리를 지키고 서서 해마다 열매를 맺어야 했던 감나무와의 동일시는 이번 시집을 끌어가는 최경순 시인의 주된 동력이자 시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저녁노을 속으로 새들이 사라지고
빈 들판의 억새들이 불타고 있다
?「새들은 사라지고」 부분

밀물처럼 넘실넘실 다가오는 아침을
갈매기가 이끌어주고 있다
?「일출」 부분

최경순 시인은 ‘아침과 저녁’, ‘봄과 겨울’처럼 이질적인 것 같지만 결국은 한데 묶여 있는 시간의 연쇄와 단절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간관이 의미하는 것은 하루, 또는 한 계절 단위로 반복하는 일상과 생활이다. 이를 시인은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인용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저녁과 아침’은 그저 소멸하거나 마지못해 밀려가고 밀려오는 기계적 반복의 결과가 아니다. 시인은 “사라진 새떼들을 벌써 기다”리고 있고, 아침이면 “내일에 무게를 싣지 않고/새의 날개보다 가벼운 마음으로/행복의 밑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눈부신 기다림의 시간이 열리고
노란 꽃잎을 받쳐 든 대궁 속을 보니
웃고 있는 모습이 우는 모습으로 보인다
나는 나의 산통을 기억해내곤
꽃들의 아름다운 진통을 느껴보는 것이다

수선화야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금씩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구나
우리는 서로에게 꽃, 그 이상의 의미를 나누고 있구나
?「꽃의 진통」 전문

시인은 ‘수선화’가 개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니 ‘대궁’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웃고 있는 모습이 우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토로한다. 사실 이 부분을 그저 비유적 사실만으로 읽으면 시인이 꽃처럼 예쁜 딸아이를 낳을 때의 ‘산통’을 기억해냈다고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꽃’이 ‘아이’와 중첩하면서 미래의 ‘희망’이라는 의미로 전치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