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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자의 시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서리꽃”과 “모소 대나무”와 “이팝꽃” 등 식물도 있고 “엄니”와 “할머니”와 “나” 등 사람도 있으며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이슈도 있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삶과 죽음 그리고 시에 주목한다. 김순자의 시는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아우른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삶과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탐구하고 특히 시 자체에 대한 심층적인 관심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시인에 따르면 죽음은 삶이고 사랑이며 생명이다. 또한 비움은 채움이고 어둠은 밝음이다. 그러므로 찰라, 또는 잠시는 영원 또는 무한이다. 김순자의 시를 읽으며 독자들은 역설의 가치를 깨닫는다. 없음은 있음이고 있음은 없음이다. 아픔이 사랑임을 깨닫는 자신, 본연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되어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살아볼 일이다.

김순자 시집 『서리꽃 진자리에』에서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로는 ‘역설’을 꼽을 수 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만약 당신이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아플 때까지 사랑한다면 거기에 더 이상의 아픔은 없고 다만 더 많은 사랑이 있을 뿐이며 나는 여기에서 역설을 발견한다(I have found the paradox, that if you love until it hurts, there can be no more hurt, only more love.).”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심리학자인 칼 로저스(Carl Rogers)는 “내가 스스로를 본연의 나로서 수용할 때 나는 변화할 수 있는데 이것은 특이한 역설이다(The curious paradox is that when I accept myself just as I am, then I can change.).”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앞날은 짧고
노년의 황금 같은 시간만
무참히 흘러간다

꼼짝없이 갇혀있는 지금
쉼 없이 내닫던 일상이 그립다

재앙이 혼탁한 세상을 정리하듯
지구를 휩쓴 코로나19 바이러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리움을 깨우쳐주고
누구도 막지 못했던 전생과 폭력도
비행기도 배도
미세먼지도 황사도 일단 중단시켰다
공기가 맑아졌다 물이 청정하다

알 수 없는 무한한 존재를 알려 준
코로나19 바이러스 덕분에 잠시
쉼표를 찍자
미지의 건강한 세계를 구상하며
-「그래 덕분이라 하자」 전문

2020년 벽두(劈頭)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구인을 괴롭힌다. 김순자는 4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불러온 장단점을 구분하여 기술한다. 1연과 2연은 단점을 이야기하는 대목으로서, 시인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를 빼앗기고 소중한 시간을 상실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더불어 그녀는 이전에는 너무나 당연시하던 일상을 향한 그리움을 피력한다.
3연과 4연은 장점을 이야기하는 대목으로서, 시인은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리움을” 알게 되고, “전쟁과 폭력도”, “미세먼지도 황사도 일단 중단”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공기가 맑아”지고 “물이 청정”해졌음에 감사한다. 이 작품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발생한 단점들과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일어난 장점들을 극명하게 대조함으로써 “건강한 세계”로서의 지구,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을 구현한다. 코로나 시대의 생태시, 생태문학을 논의할 때 적절한 사례로서 언급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시이다. 김순자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누군가의 탓을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발상의 전환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이야기이다. 누구 때문에가 아니다. 누구 덕분인 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죽음은 삶이고 사랑이며 생명이다. 또한 비움은 채움이고 어둠은 밝음이다. 그러므로 찰라, 또는 잠시는 영원 또는 무한이다. 김순자의 시를 읽으며 독자들은 역설의 가치를 깨닫는다. 없음은 있음이고 있음은 없음이다. 아픔이 사랑임을 깨닫는 자신, 본연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되어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살아볼 일이다.

1부

서리꽃 진자리에·12
누름돌·13
아카시 꽃필 무렵·14
꽃피던 시선·15
개나리꽃·16
껍데기 옆에 놓고·17
덩달이 엄마·18
박수를 보낸다·20
잃어버린 봄·21
코끝에 맴도는 한기寒氣·22
굴업도·24
섣달 그믐날·26
게으름뱅이가 되어·28
키질·29
노을·30
노을이 노을 속으로 진다·31
안부·32

2부

봄에게 미안하다·34
겨울 구곡폭포·36
사진의 뒷면·38
봄이 오는 소리·39
오월의 초대·40
예초를 하다·41
허기가 들다·42
거미줄에 걸린 가을·44
가을·45
가을밤·46
흔들리는 가을·47
송화가 피는 날에·48
야생마가 갈기를 휘날리듯·50
이팝꽃 피는 오월이 오면·52
봄날은 간다·54

3부

지켜보는 눈동자·56
수종사 1·58
반짝의 힘·59
시가 익는 마을·60
대관령 고갯길 서리꽃 피면·62
명동에 비가 오다·63
어둠을 지우다·64
까치밥·66
수종사 2·68
지구가 아프다·70
달빛 연구소·72
감나무 아래 골고다 언덕·74
소백산맥을 좋아하는 그 사람·75
새침데기 꽁이길·76
부개 공원·78
고단한 삶의 끈·79
입장·80

4부

기도·82
시간의 마디 속에·83
백양사를 떠메고·84
짧은 만남 긴 여운·85
환절기·86
그래 덕분이라 하자·87
봄바람에 기대어·88
팔순·89
낭랑 이십 세·90
몰두·92
내가 모시고 길들여 온 나의 상전·93
모소대나무·94
한 걸음의 행복·96
맘만 먹으면·98
쯤이야·99
순자·100

해설 | 권온_역설의 미학, 순간의 시학·101

1부

서리꽃 진자리에


넘어지고 흔들리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뒤척이다 지친 서리꽃
피었다 진자리
찬 서리 젖은 바람 제치고
대지 위에 떨어진
씨앗

봄!
봄이다
발광하듯 만물이 소생하는
죽음으로 깊어진 사랑
저리도 환하다


누름돌


깊고 굵은 선하나
순간을 스치는 바람길에
기억을 열면
보고 있어도 그리운 그 사내를 만나
초여름 향기처럼 풋열매로 매달렸지

어둡고 긴 골목을 돌아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던가
서리꽃 허옇게 호통치듯 달라붙은 늦은 오후
어디에도 없는 그 사내 가슴에 품고
가을 냄새를 맡고 있었네

회색 구름이 내리누르는
하루하루 그 하루
내 손 놓고 떠난 미운 그 사내
야속한 배신에 울분이 끓어
울고 웃다 흔들리는 웅크린 서러움
잠깐 살았고 오래도록 죽어있는 삶 속에
계곡처럼 깊게 꾹꾹 눌러 놓은 돌덩이 하나


아카시 꽃필 무렵


언덕배기 못자리 논
못짐 나를 때
지게 짐을 떠밀듯 글을 읽는
개구리
기억, 니은, 디귿, 리을
낭창낭창 글 읽는 소리 언덕에 닿아
알알이 맺혀 아카시꽃 피운 것도
볶아치는 농사일 또한 네 탓이려니

써레를 짊어지고
논둑길 돌아가면
개구리 울음소리 구름밭에 멎고
잊었던 옛 얘기 송알송알 눈물난다
꽃피던 시선

나긋한 기척이 하트로 날아와
등 뒤에 꽃피는 시선

돌아서면 맞부딪쳐 스파크가 일세라
차마, 마주하지 못한 아쉬움

세월이 저만큼 지난 후
그 순간이 박제되어 꿈속이 설렌다

어느 하늘 아래 맴맴 맴돌다
막무가내 찾아와 다가서는 그대

놓친 미련이 봄빛에 완연하다


개나리꽃


눈짓인 줄 알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피하라
담장 밖으로 내민 조그만
노란 얼굴

거짓말인 줄 알았다

4월 첫날 만우절
잠시 멈추다 가라 머뭇거리는
사거리 신호등 노란불 같은

길옆에 서서 힘내라 응원하는
여백 없는 우리네 삶의 쉼표 같은
작은 손 흔들며 환하게 웃는 개나리꽃


껍데기 옆에 놓고


베란다 화분에 심은 파
겨우내 쏘옥 쏙 돋는 잎
살림 내듯 한 잎 두 잎 뽑아 먹고
마지막 봉우리 세우려다
속빈 엉성한 대궁이 쓰러진다

거미 새끼가 제 어미를 파먹고 자라듯
파도 잎마다 진기를 다 빼주고
우렁이 또한 어미가 첫 밥이듯
어미는 잉태된 새끼로부터의 밥이다

빈 병 줍고 폐지 줍던 할머니
찬밥에 체하여 급사하셨다
유서처럼 남겨진 베개 속에 이천육백만 원
자식들 오 남매 모두 모여
껍데기 옆에 앉아 옥신각신
급히 먹고 체할라 나눠 먹기를 한다


덩달이 엄마


눈과 귀를 닫아건 지 삼십여 년
살림만 하다 문화원에 처음 가는 날
설레고 긴장된 가방을 챙기려는데
막내딸이 볼펜을 건네준다
‘볼펜 참 근사하다’ 하자
‘예쁘죠! 십만 이천 오백 원인걸요’
와 정말 비싸다
조심스레 쥐어보며
파카 만년필이 생각났다
옛날 한때는 결혼 예물이기도 한
그 귀한 파카 만년필
‘아끼지 말고 쓰세요
얼마든지 또 사드릴게요’
‘십만 이천오백 원짜리를 어떻게’
‘걱정 마셔요’
그깟 심 하나 갈아 끼우는 건데요‘
뭐? 심이라고?
볼펜심만 이천 오백 원

밖으로 내딛는 한걸음에
번쩍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리는


박수를 보낸다


등에 땀을 지고
걸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었다
부모자식 간의 끈을 붙들고
눈보라 속에서도 꽃길인 듯
달렸다

한 줌 티끌에도 무너져 내릴 듯
자갈 험한 가시밭길
한 줄기 햇볕에 행복을 꿈꾸며
마음 비운 자리에 하늘을 채워도
까마득히 머언
돌아갈 수 없는 길

명분이 실질을 담아
부질없는 세월에게 박수를 보낸다


잃어버린 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악마다

공포로 이미 세상은 얼어붙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며
이웃과 이웃 그대와 나 사이 방패를 세워
두렵고도 외로운 방어를 한다

활기차게 봄을 퍼 올리던 열기마저
엉거주춤 멈춘 호수공원
악마에게 쫓겨 마스크를 눌러쓰고
피신 나온 사람들
노천탕 바윗돌에 앉아 털 고르는 원숭이들처럼
의자마다 등 돌리고 볕 바라기를 한다

형상도 보이지 않는 악마
천방지축 날뛰며 멈출 줄을 모른다
대적 한 번 못하고 천하무적 앞에 주눅 든
웅크린 어깨에 불안이 얹혀있다

찬란한 그 봄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