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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섭 시집 『오동꽃을 보며』에서 화자는 “더딘 봄”을 안타까이 여기며 오동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리는 마음은 “오마지 않은 이를 기다려 본 이”는 알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서 “오동꽃까지는 나절가웃 길”이나 된다고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그렇다. 봄꽃들이 다 펴도 오동은 더디기만 하다.
예부터 오동은 딸이 시집갈 때 혼수가 되는 장롱 재료로 썼다. 하면 오동은 ‘사랑의 완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매년 오동꽃은 피고 진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랑이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제 꽃을 스스로 떨구고 마는 오동처럼 허무하게 지고 마는가. 그런데도 “더딘 봄”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꽃 피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별은 사랑의 그림자인가. 시인은 “오동꽃 이운 날”의 슬픈 뻐꾸기 소리를 통해 안타까운 ‘사랑의 그림자’를 아프게 그려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스스로 허공의 하현달이 되어 소리 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지켜보며 우리에게 전언한다. “고개를 들고 보라. 보라의 오동꽃을. 들어라. 그 꽃의 속삭임을.”
- 호병탁(시인·문학평론가)

우선 「시인의 말」을 들어본다. 시인은 “문단 한 모퉁이 묵정밭에 시의 터앝을 연 지 어언 마흔 해. 그 절반을 비슬산 밑, 뿔의 북쪽角北에서 살고 있다.”고 자신의 등단시기(1980년 한국일보)와 거주지를 소개한다. 이어 “해마다 오동꽃은 피건마는 그 꽃이 늦봄에 피는 까닭을 나는 모른다.”고 겸양의 자세를 보이지만 “늘 처음이면서 또 다른 처음을 꿈꾸는 시”를 지향한다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짧은 「시인의 말」은 작품 독해에 중요한 단초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대 울려거든
봄 하루를 울려거든
비슬산 남녘 기슭 복사꽃밭으로 가라
가서는 그냥 한 그루 복사나무로 서 있어라

그러면 될 일이다
까짓 울음 같은 것
분홍이든 다홍이든 치댈 만큼 치대서는
무참히 그냥 무참히 꽃 피우면 될 일이다
-「복사꽃 필 때」 전문

시집에 등장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두 연, 여덟 행으로 구성된 짧은 시지만 이번 작품집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이번 시집에는 많은 꽃들이 흔들리고 있다. 우선 시제만 해도 「복사꽃 필 때」, 「오동꽃을 보며」, 「오동꽃 저녁」, 「겹모란꽃」, 「연꽃 앞에서」, 「탐매행」, 「화엄 흑매」, 「접시꽃」이 있고 심지어 「시든 꽃」, 「꽃 아닌 꽃」까지 있다. 시제가 이 정도니 물론 본문에도 자귀나무 꽃, 고추꽃」, 깨꽃(「운주사」)들이 피어있을 것임에는 당연하다. 외에도 곁에 존재하며 우리의 정서를 건드리는 많은 자연물들이 여기저기 산견된다. 그래서 작품이 순해진 것인가. 하기야 아늑한 고향 산기슭에 화사하게 핀 복사꽃을 보며 사나운 감정에 휩싸일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설령 그랬던 사람도 온화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설 것이다.
작품은 “그대 울려거든/ 봄 하루를 울려거든” 고향의 산기슭 “복사꽃 밭으로 가”서 “그냥 한 그루 복사나무로 서” 있으라고 권유하고 있다. 첫 연이다. 독해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우리는 다음 연에서 화자가 왜 “복사나무로 서” 있으라고 하는지 그 이유가 설명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까짓 울음 같은 것”이라며 다시 ‘울음’을 거론한다. 그리고 그 울음이라는 것도 복사꽃처럼 “분홍이든 다홍이든” 적당히 섞여 “그냥” “꽃 피우면 될 일”이라고 말하며 작품을 끝내고 만다. 이 연도 독해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지지고 볶으며 세상 살다보면 울고 싶을 때도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이런 풍진의 세상을 약간 비켜나서 “한 그루 복사나무”처럼 초연하게 세상을 지켜보라는 의미인 것 같다. 또는 어딜 가서 있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 그곳이 바로 참된 자리(隨處作主立處皆眞)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작품 전체에 시인의 ‘임운자연任運自然’을 추구하는 정신세계가 담겨있음은 사실이다. 앞서 ‘선禪의 향기’가 어른댄다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문학비평처럼 한 편의 텍스트에서 ‘올바른 의미’ 또는 ‘작가의 의도’를 찾아내려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자세는 작품 속에는 하나의 유일한 의미가, 즉 하나의 진리가 내재해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리는 이중적 의미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어찌 이천 년에 걸친 호머의 해석은 항상 다른 해석을 위한 조건이 되고 있을 뿐인가. 작품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의 잠재적 가능성은 독자의 독서에서 이루어지는 개성적 실현인 셈이다. 독자에 따라 작품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심지어 같은 작품도 두 번째 읽을 때는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또한, 작품을 읽는다는 행위는 작품의 의미와 결부되어 있지만 ‘의미 파악’ 그 자체만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작품에서 ‘무엇’을 파악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있다. 이는 작품의 심미적 효과를 파악하는 것이고 우리의 ‘심미적 체험’과 직결된다.

문단 한 모퉁이 묵정밭에 시의 터앝을 연 지 어언 마흔 해. 그 절반을 비슬산 밑, 뿔의 북쪽角北에서 살고 있다. 해마다 오동꽃은 피건마는 그 꽃이 늦봄에 피는 까닭을 나는 모른다.

-늘 처음이면서 또 다른 처음을 꿈꾸는 시!

2020년 늦봄
박기섭

호병탁(시인·문학평론가)
박기섭 시집 『오동꽃을 보며』에서 화자는 “더딘 봄”을 안타까이 여기며 오동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리는 마음은 “오마지 않은 이를 기다려 본 이”는 알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서 “오동꽃까지는 나절가웃 길”이나 된다고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그렇다. 봄꽃들이 다 펴도 오동은 더디기만 하다.
예부터 오동은 딸이 시집갈 때 혼수가 되는 장롱 재료로 썼다. 하면 오동은 ‘사랑의 완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매년 오동꽃은 피고 진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랑이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제 꽃을 스스로 떨구고 마는 오동처럼 허무하게 지고 마는가. 그런데도 “더딘 봄”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꽃 피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별은 사랑의 그림자인가. 시인은 “오동꽃 이운 날”의 슬픈 뻐꾸기 소리를 통해 안타까운 ‘사랑의 그림자’를 아프게 그려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스스로 허공의 하현달이 되어 소리 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지켜보며 우리에게 전언한다. “고개를 들고 보라. 보라의 오동꽃을. 들어라. 그 꽃의 속삭임을.”

1부

복사꽃 필 때·12
오동꽃을 보며·13
오동꽃 저녁·14
한 권의 책이 왔다·15
비의 저녁·16
겹모란꽃·17
새벽길·18
연꽃 앞에서·19
내 열 번 전생의 일이라면·20
뼈 하나로 건너야 하리·22
너 내게 가을일 적에·23
쪽물 편지·24
가을, 메가폰을 들다·25
시지時至에서·26
시든 꽃·27

2부

허천난 봄·30
물의 저쪽·32
봄밤·33
탐매행·34
꽃, 아닌 꽃·35
꽃 앞에서·36
폭포·37
아닌, 춤·38
매부리코에 관한 기억·39
관계론·40
첼로가 있는 풍경·41
가을을 만나거든·42
눈표범·43
열창이 끝난 뒤·44

3부

이순 1·48
이순 2·49
묵편墨篇 1·50
묵편墨篇 2·51
묵편墨篇 3·52
묵편墨篇 4·53
묵편墨篇 5·54
묵편墨篇 6·55
묵편墨篇 7·56
우화 1·57
우화 2·58
우화 3·59
우화 4·60

4부

우두커니 서 있었다·62
독들이 입을 벌린 까닭·63
바큇자국·64
뱀을 본 기억·65
봄의 안부를 묻다·66
동행·67
종種의 종말·68
졸곡卒哭·69
달의 하숙집·70
하늘소금·71
흰 새벽·72
노루 발자국·73
별후·74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77

5부

화엄 흑매·80
접시꽃·81
가슬갑사·82
무연고의 가을·84
운주사·85
그늘의 풍경·86
먹빛·87
교촌校村 풍경·88
속이 다 탄 집·89
봄날은 간다·90
만행·91
임진강가에서·92
나 오늘 천지에 올라·93

해설 | 호병탁
‘마른 젖꼭지’ 물려보려고 ‘앞섶’ 걷어 올리는 옹당못·96

1부

복사꽃 필 때

그대 울려거든
봄 하루를 울려거든
비슬산 남녘 기슭 복사꽃 밭으로 가라
가서는 그냥 한 그루 복사나무로 서 있어라

그러면 될 일이다
까짓 울음 같은 것
분홍이든 다홍이든 치댈 만큼 치대서는
무참히 그냥 무참히 꽃 피우면 될 일이다

오동꽃을 보며

이승의 더딘 봄을 초록에 멱감으며
오마지 않은 이를 기다려 본 이는 알지
나 예서 오동꽃까지는 나절가웃 길임을

윗녘 윗절 파일등은 하마 다 내렸는데
햇전구 갈아 끼워 불 켜든 저 오동꽃
빗장도 아니 지른 채 재넘잇길 열어놨네

하현의 낮달로나 나 여기 떠 있거니
오동꽃 이운 날은 먼데 산 뻐꾸기도
헤식은 숭늉 그릇에 피를 쏟듯 울던 것을

오동꽃 저녁

너의 무릎을 베고
저무는 봄날이었으면

누른 국수에
날감자를 구워 놓고

아픈 데 아픈 데도 없이
그냥 그렇게 나른한

또 그런 봄날이었으면
너는 그예 나를 낳고

창밖에 남아 부신
뻐꾸기 소리나 듣는

다저녁 숭늉 그릇에
오동꽃이나 보는

한 권의 책이 왔다

그해 그 봄날에 한 권의 책이 왔다

겉장을 열자마자 요철凹凸의 활자 냄새

문선의 고른 치열들, 꽃씨를 물고 있었다

지형을 뜨는 순간 생금의 꽃이 벌고

문향聞香의 코끝에서 낯익어 낯선 향기

곳곳에 관주 비점을 아니 찍고는 못 배길

비의 저녁

햇연꽃 불 켜든 일은
햇연꽃 저만이 알고

들오리 길 떠난 일은
들오리 저만이 알지

늦도록 못둑에 붐비는
비의 속내는 누가 알꼬?

겹모란꽃

내 상사는 아무래도 토청土靑의 오월이다
회청回靑 회회청回回靑 아닌 토청의 오월이다
흐벅진 백자 항아리 볼기쯤에나 벙그는

그러니까 내 상사는 꼰사 푼사 아닌
꽃일사 겹모란꽃 환원염의 겹모란꽃
망댕이 불가마 속에 몸을 식힌 겹모란꽃

새벽길

희미한 저 외등의 불빛은 누가 먹나 길이 먹지 길이 먹어 눈먼 밤을 가지 눈먼 밤 눈먼 벼랑 끝 새벽을 낳지 너, 온다는…

연꽃 앞에서

내게로 오는 그대
나의 아미타여

오오 소슬한 광망
나의 관세음이여

돌 속에 억겁의 시간이
바스러지는 찰나!

찰나의 무량수를
한 잎 한 잎 열어놓고

한사코 진흙 위에
맨발로 섰는 그대

아수라 뻘물 게우며
아수라를 건넌 그대

내 열 번 전생의 일이라면

1
내 열 번 전생의 일이라면
그대 알겠는가

그 전생 그 가을의 일이라면
그대 알겠는가

그 가을 그 애저녁의 일이라면
알겠는가 그대

2
진흙 뻘밭이면
진흙 뻘밭을 넘고

얼음 수렁이면
얼음 수렁을 건너

마음이 마음을 만난다
몸이 몸을 만난다

3
이금泥金의 몸이었네 아편의 봄바다였네 박하 서향서껀 백단향의 길이었네 쇠도끼 시퍼런 허기를 어루만진 향기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