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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서 사물과 사람들은 따로 놀지 않는다. 그것들은 밀어내지 않고, 접속하며, 서로에게 스며든다.
이복현의 시세계,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분석과 쪼갬의 로고스logos가 아니라, 통섭과 흘러듦, 스밈의 미소스mythos이다. 그의 세계 안에서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다른 것의 에너지가 되며, 상호 내주perichoresis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입자들을 뿌리며, 세계의 관계성과 합일성을 누리고 경하慶賀한다.
이복현 시인은 많은 모더니스트 시인들처럼 병든 다리를 내놓고 구걸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과 절망으로 세계를 채색하지 않고, 따뜻한 환대의 세계를 소환해낸다. 그에게 있어서 어둠은 어둠 속에서 밝아지지 않는다. 어둠은 오로지 빛의 스밈에 의하며 검은 주름을 벗겨낸다. 황폐한 현실에 황폐한 거울을 들이대는 것은 그의 전략이 아니다. 그는 분열과 차단의 상징계에 분리 이전의 상상계를 들이댐으로써 어두워진 존재의 주름에 빛을 밝힌다.
─ 오민석(문학평론가 · 단국대 교수) 해설 중에서

이 시집에서 사물과 사람들은 따로 놀지 않는다. 그것들은 밀어내지 않고, 접속하며, 서로에게 스며든다.
이복현의 시세계,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분석과 쪼갬의 로고스logos가 아니라, 통섭과 흘러듦, 스밈의 미소스mythos이다. 그의 세계 안에서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다른 것의 에너지가 되며, 상호 내주perichoresis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입자들을 뿌리며, 세계의 관계성과 합일성을 누리고 경하慶賀한다.
이복현 시인은 많은 모더니스트 시인들처럼 병든 다리를 내놓고 구걸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과 절망으로 세계를 채색하지 않고, 따뜻한 환대의 세계를 소환해낸다. 그에게 있어서 어둠은 어둠 속에서 밝아지지 않는다. 어둠은 오로지 빛의 스밈에 의하며 검은 주름을 벗겨낸다. 황폐한 현실에 황폐한 거울을 들이대는 것은 그의 전략이 아니다. 그는 분열과 차단의 상징계에 분리 이전의 상상계를 들이댐으로써 어두워진 존재의 주름에 빛을 밝힌다.
─ 오민석(문학평론가 · 단국대 교수)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1부 폭포의 깃털을 받아가려고
풍경風磬
새와 나무
호랑나비를 베끼다
폭포의 깃털을 받아가려고
선인장 꽃이 필 때
산수유 열매가 익을 무렵
수도하는 돌멩이
사랑은 우산을 쓰고 오네
우체국이 없는 나라
빛의 출산
양자養子
유리 집
버드나무 작곡
희망
말 주머니
쾌청!
해일
월척

2부 한쪽 볼이 붉은 사과
비어있음의 무게
보름달
가을 들길을 걷다
한쪽 볼이 붉은 사과
한참을 살다 보면
유전遺傳
오래된 구두
발가락이 붉다
너를 위해 비워둔 의자
내가 흔들릴 때는
청개구리 말씀
운상運喪
그믐밤, 아버지 생각
못난 것에 정이 간다
꽃자리
마음의 우물
그대가 별인 것처럼
예쁜 궁둥이에 깔린 나무그림자

3부 슬픔이라는 새
빈손
소 울음
알프스
도마뱀
마중물 2
소나기
위대한 산
슬픔이라는 새
바이올린에게
노도怒濤
크리넥스 티슈
가을 하늘
나의 바다는 지금
나뭇잎 궁전
완두콩을 까다
가난한 날들의 꿈
오래된 비문碑文
빗소리를 적다

4부 내 안을 흐르는 시냇물
의자
별이 빛나는 밤
내 안을 흐르는 시냇물
나누기
이장移葬
무궁화
태산을 앞에 두고
별 총총
고요
낮은 곳으로
북극성
헌혈
눈물지우개
푸른 눈의 천사에게
다비식茶毘式
나에게
풀씨
얼음에 새긴 별자리

해설
스밈의 미학 혹은 사랑의 연쇄 주름│오민석(문학평론가 · 단국대 교수)

-새와 나무

새가
휘어질 듯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를 때

나무는 새를
공중으로 힘껏 밀어 올려 주었다

새를 하늘로 떠나보낸 후에
나무는 한참 동안이나
떨리는 손가락을 추스르고 있었다.

-폭포의 깃털을 받아가려고

칼새가 떼를 지어
이구아수 폭포 하얀 날개의 깃털을 뽑아 물고
절벽 위를 무수히 오르내린다.

하늘은 그것을 받아가려고
절벽 쪽으로 손을 내밀어
힘껏
오색 밧줄을 묶어 당기고 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밧줄이
팽팽해질 때까지
폭포수 아래로 팔을 뻗는다.

폭포의 깃털을 받은 하늘이 기우뚱
한쪽으로 쏠리면서 맞은 편 언덕으로
우윳빛 안개가 흘러내린다.

-한쪽 볼이 붉은 사과

암 병동에 문병 와서
병원 뒤뜰을 무심히 걷다가
문득, 사과나무 앞에
허리 굽혀 엎드린다.

방금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사과 하나를
풀밭에서 주워 들고
벌레 먹은 부위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쓰다듬는다.

한 생을 건너가자면
나무인들 어찌 아픔이 없겠으며
헤어지는 슬픔 또한 없겠는가!

가지 끝에 아슬아슬 매달렸다가
더는 견딜 수 없을 즈음
신음마저 삼키며,
투욱! 손을 놓았을 사과
한쪽 볼이 볼그레하다

말기 암을 앓는
친구의 얼굴이 조용히 오버랩 된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모습

두려움 이기고, 창백한 볼에
끝물 사과처럼 볼그스름한
꽃을 피운, 그가

-슬픔이라는 새

슬픔은 늘 불안하다

내 안에는
날개 다친 새들이 무수히 많아

뚜껑을 열면
다친 새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날 것만 같아
모른 척 닫아두는,

내 안에는
꺼낼 수 없는 새들이 무수히 많다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나는
날개 다친 새들

-내 안을 흐르는 시냇물

어느 날 한 청년이 내게로 와
마른 땅에 도랑을 내고
시냇물을 풀어놓았다

시냇물은 새처럼 즐거이 노래하며
죽어가는 나무의 뿌리에 닿고
시드는 풀잎을 일으켜 세우며
먼 바다로 흘러갔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기쁨을 매어 달며
연약한 매듭마다 환한 등불을 내어 걸며
땅의 깊은 골짜기마다 빛으로 가득 채웠다.

구부러진 길들을 쓰다듬으며
거룩한 곳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돌돌 돌
소리 맑게 흐르는 내 안의 시냇물…
그 청년은 지금도 쉼 없이 내 귀에
맑은 시내처럼 속삭이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고,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