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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의 시집『유령이 사랑한 저녁』. 《옆구리의 표정》, 《멸치 자기소개서》, 《손틀 발틀 꿈틀》,《환희로 여는 아침》, 《불가촉 당신》 등 다양한 시를 수록했다.

‘현대시학시인선’ 027권. 고경숙 시인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하였다. 제4회 하나.네띠앙 인터넷문학상 대상, 제2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제3회 두레문학상, 2011경기예술인상, 2012 부천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을 수상했으며 현재 부천예총 부회장, 부천문인협회 회장, 수주문학상 운영위원장, 부천시 문화예술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에『모텔 캘리포니아』『달의 뒤편』『혈穴을 짚다』가 있다.
고경숙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유령이 사랑한 저녁』 은 어름산이의 세계와 다름없다 할 수 있다. 세상의 끝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시작인 국경에서 사물을 관조하는 모습은 위태롭거나 아슬아슬하여 관객(독자)으로 하여금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긴장은 상징이 지닌 다가성 때문이기도 하며, 불가시의 세계에 닿으려는 갈망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국경은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아닐 것이므로, 사람과 사람 혹은 삶과 삶의 접경지역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그래서 소소한 삶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국경지대의 서사들.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일테면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 시선을 둔 시인은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만질 수 없는 것들까지도 관계를 형성한다.
시는 도착이 아니라 진행이다. 시적 대상을 통해 시세계를 만드는 시인의 걸음은 지난하다. 그림자로 존재하는 국경의 사물들과 마주하는 순간 시인도 그 일부가 된다.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은 그늘을 덮고 밤하늘을 본다. 시인이 느끼는 그런 저녁은 얼마나 감미로울까.
『유령이 사랑한 저녁』 은 아픔을 아픔으로 다루지 않기에 아름다운 시간이다. 비록 전부를 만질 수는 없어 “만지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겨울” 일지라도 국경지대는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하나 둘 배제되는 많은 일들 중 맨 끝까지 내게 남아있는 것이 詩였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마지막이 詩였으면 좋겠습니다.

차주일(시인)
고경숙 시인은 나와 우리 사이에서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오래도록 지켜본 풍화된 풍경을 골라 심상에 파종한다. 풍경은 시인의 관점에 따라 본질과 현상으로 길항하며 의미로 자라난다. 그리하여 결국, 독자를 나와 우리 사이에 세워두며 갈등하게 한다. 나와 우리의 사이에 문이 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문고리가 퍽 닳아 있다. 이 흔적은 자위적 언어에 기댄 여타 시인들과 다른 품위를 증명한다. 고경숙 시인은 양념에 원재료를 투입하는 것과 원재료에 양념을 묻히는 차이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시인의 언어는 척박한 감성에서 더욱 굵어진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속엣 것 한 포기를 캐내 밖으로 옮겨 심어야 할 시간을 맞이했다.

시인의 말

1부
허름한 저녁을 지나는 기차

환희의 땅
애완
불가촉 당신
슬픈 레지스탕스
사막의 색
도리뱅뱅
썸머킹
권태의 지형도
접신몽
옆구리의 표정
사랑학―Chapter 1 링반데룽
오동梧桐
단막극
스페인 여자

2부
뻘을 뒤집어쓴 갯것들

갯것들
어린이의 천국
하마터면
젠가놀이
넘나들다
철쭉
생명의 나무
여자와 가방
효자손
주먹에 관하여
베이징 스모그
동물의 왕국
멸치 자기소개서

3부
기별처럼 별이 뜨고

명자꽃
소래습지 2―미이라
손틀 발틀 꿈틀
또 하나의 지구 2.0
옛날이야기
묵시적 갱신
사자의 변變
물고기 자리
아이노꼬
착한 독후감
안녕
비풍초똥팔삼

4부
야크의 붉은 두 눈으로

수박씨 뱉는 오후
카니발리즘
틈
환희로 여는 아침
택배
블랙아웃
그림자 연극
소래습지 1―염부
노근묵란도
유령이 사랑한 저녁
북향화―목련의 전설

해설 │ 국경지대의 사물들
최은묵 시인

자신을
고교 때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 뒤에 붙여져 있던 ‘매물’ 이란 쪽지
길 가던 여학생들이 키득거리며 하던 말 “안 사!”

일찍 장가 간 녀석은
자신을 판다는 일은 자랑이라고 했다

몇 줄로 자신을
눈길 안 주고 지나치는 여성들의 발목을 잡아
내 고유성을 인정해달라고 눈빛을 보내는 일

사십이 훌쩍 넘어서도 엄지로 푸시업을 몇 번 한다는 인증서
날아가지 못하게 돌멩이로 눌러놓는 일쯤이야,

인생은 프리마켓이다
팔 수 있는 건 모두 내다 팔아라

재활용 70%에 핸드메이드 30%라는 수칙을 슬쩍슬쩍 어겨가며
어디서 가져오는지 땡처리 물품까지 슬그머니 끼워 파는
상술 대신 마술을 배우고 싶었다

디오게네스처럼 손바닥을 치우고 잔 볕을 찾아본다

일몰까지는 그다지 오래남지 않았다
툭툭 무릎을 털며 하나 둘 일어서는 사람들
석양에 실루엣으로 털어내는 먼지가 뽀얗다

―「유령이 사랑한 저녁」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