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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없는 그림책 : 남지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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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남지은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24년 03월 25일
  • 쪽수 : 104
  • ISBN : 9788954698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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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림을 망친 아이처럼 당신이 운다면
다시 잠들 때까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세상 모든 그림책을 읽어줄게”

한 권의 동화책을 읽는 평온함과 첫 걸음마를 떼는 불안함
그 모든 순간을 보살피는 돌봄의 손길

동시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한국시의 목록을 새로이 쌓아가고 있는 문학동네시인선이 올해를 여는 첫 시집으로 남지은 시인의 『그림 없는 그림책』을 선보인다.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격렬함을 고요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재능”(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있으며 “언어를 절제한 만큼 의미-이야기가 증폭된다는 시의 ‘황금률’이 모범적으로 적용된 시”(시인 이문재)를 쓰고 있다는 찬사와 함께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12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긴 시간 섬세하게 퇴고를 거듭한 끝에 50편을 추린 이번 시집에는 한 권의 그림책을 읽듯 따뜻하고 평온한 시들과 첫 걸음마를 뗄 때의 위태로움을 담은 시가 함께 담겨 있다. 간결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세계의 면면을 포착해냄으로써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남지은 시의 처음을 기쁜 마음으로 소개한다.

출판사 서평

시집의 제목인 ‘그림 없는 그림책’은 안데르센의 동명의 동화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동화집에는 어떤 그림도 없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글자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는 그림이 보여주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있으며, 스스로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남지은의 시집 역시 이와 닮아 있다. 시집의 각 부를 숫자로 표기하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소제목만으로 구분하는 형식은 각 부를 한 시집의 구성요소라기보다는 각각의 개성을 지닌 단권의 그림책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지은의 시는 그림 없이도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하고 그 세계로 훌쩍 건너가게 하는 안데르센의 동화집처럼, 절제된 언어로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적게 말하고 작게 접어서/ 비우고 나면”(「마트료시카」)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가벼움의 미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식탁엔 꽃병을 두었다 꽃도 말도 정성으로
고르고 묶으면 화사한 자리가 되어서
곁이란 말이 볕이란 말처럼 따뜻한 데라서
홀로는 희미한 것들도 함께이면 선명했다
모두들 어디로 간 걸까 왜 나만 남았을까
그런 심정은 적게 말하고 작게 접어서
비우고 나면 친구들이 와
새롭게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식탁엔
커피잔을 들면 남는 동그란 자국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_「마트료시카」 부분

남지은의 시에서 가벼움은 시적 화자가 마음을 다해 돌보는 “어린 사람”(「귀신의 집」) 과 긴밀히 연결된다. 어린 사람은 “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이자 물리적으로도 “무척이나 가벼”(「기척」)운 사람이다. 모든 것이 처음인 어린 사람을 화자는 정성껏 돌보며 머리를 “다정히 묶어”(「성호를 그으며」)주고 “너는 나를 이런 식으로 닮아선 안 된다”(「잼잼」)고 스스로에게 되뇌듯 속삭인다.
또한 가벼움은 시인으로서 남지은이 시를 대하는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시인은 양육자가 아이의 얼굴에 묻은 침이나 콧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듯 감정적 서술과 긴 수식어들을 덜어내 말끔하게 다듬는다. 고요한 공간에서 아기의 “이마를 짚”(「호각」)고 “울고 싶은 사람을 울게 하는 약”(「말하기에 대한 강박」)을 입에 넣어주는 이의 애틋한 손길을 통해 아기를 향한 그의 사랑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 역시 자신의 진심을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내며 “더 큰 사랑을 이룩”(「잊었던 용기」)한다. 때문에 시인이 공들여 정리한 이 시들이 우리 앞에 놓일 때, 우리는 돌봄을 받는 어린 사람처럼 시들을 손으로 쥐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면서 시와 가까워진다. 우리는 남지은의 시를 읽으며 점점 가벼워지고 시인의 사려 깊은 돌봄에 의해 시와 함께 길러지는 것이다. “어린 독일가문비나무”(「표정 카드」)처럼, 어린 사람처럼 가볍고 연약했던 우리는 시인의 품에서 ‘그림 없는 그림책’을 통과하며 “지붕이 없어서” “키가 웃자”(「이미지 게임」)라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

기차, 기차, 기차, 그리고 기차들이
눈썹 끝에 모인다

이불 아래 주춤주춤 모여드는 구름

가슴 위로 코끼리가 발 하나를 얹는다
장마가 시작된다

하수구의 쥐들이 튀어오르고

지붕이 없어서
나무들의 키가 웃자란다
_「이미지 게임」 부분

하지만 『그림 없는 그림책』이 그저 편안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시집에는 어린 시절 깊은 상처로 남았을 법한 장면들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말을 하면 혼이 났”(「가정과 학습」)고 “말을 안 하면 그래도 혼났”(같은 시)던 일, “고모 아빠가 엄마 때려요/ 이모 엄마 좀 숨겨주세요”(「도움닫기」)라고 말해야 했던 일,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넝쿨장미」) 아버지를 마주했던 일이 그렇다. 크게 상처를 입었을 만한 상황들임에도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은 채 절제된 단어들로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양육하느라 “신발 신어본 지도 여러 날이 지”(「재생」)난 양육자의 마음 역시 감정이 크게 개입되지 않은 담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인은 시적 화자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상처가 남긴 오래된 흉터 위로 조용히 손을 포갠다. 잔인하고 괴로웠던 기억도, 따뜻한 보살핌의 기억도 모두 시로 승화시키며 시인은 돌봄을 받는 이에서 돌봄을 수행하는 이로 한 뼘 성장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로 인한 흉터가 시 곳곳에서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남지은의 시집이 한 권의 동화처럼 다정하게 독자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과 시적 화자 모두 자신의 상처와 흉터를 정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자신이 돌봄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었을 때 어린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 않으려 되뇌이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아? 춥지 않겠어? 다정한 물음이 있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하기 좋은 순간”(「테라스」)이나 “늦었네 들어가자/ 그런 말이 당신을 덜 다치게 하고/ 어딘지 모를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잊었던 용기」)는 말에는 온기와 애정이 담겨 있다. 자신만의 언어와 방식으로 상처를 인식하고 치유하며 같은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 담긴 남지은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다시 어린 사람이 되었다가 마침내 시의 다정한 손길 아래서 “난간에 기대어 자라던 식물들이 난간을 벗어나”(「테라스」)듯 또 한번 성장하게 될 것이다.

늦었네 들어가자
그런 말이 당신을 덜 다치게 하고
어딘지 모를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

그림을 망친 아이처럼 당신이 운다면
다시 잠들 때까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세상 모든 그림책을 읽어줄게
미술관에도 박물관에도 수목원에도 다 데려갈게

좋은 이모 되고 싶다
좋은 말을 고르고 빚어서 아기 손에 쥐여줄

우리가 꿈꾸는 가족
비어 있는 화면에 의미를 더하면서
더 큰 사랑을 이룩하게 될 때까지
_「잊었던 용기」 부분


남지은의 시를 읽는 시간이 한 권의 동화집을 읽는 시간처럼 평온했다거나 불온했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우리를 어린 사람으로 돌려놓는 일에 기여했다는 뜻일 것이다. 양육당하겠다고 자처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양육하겠다는 자들이 출몰하는 시대에 시의 양육자는 어떠한 결로 이 작은 등 아래에 손바닥을 두고 있는가. 더 많은 어린 사람들이 남지은의 시 안에서 길러지기를 원한다. 그 시로부터 걸어나와서 나무로 서기를 원한다. 『그림 없는 그림책』에 그림이 없는 것처럼 길러진 자들도 기른 자들도 이 시집 덕분에, 시집보다 크게 자라서 그 밖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서 있기를 원한다.
_김지은, 해설에서


■ 남지은 시인과의 미니인터뷰
Q1.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등단하신 이후 처음으로 펴내는 시집이에요. 첫 시집을 출간하신 감회가 남다르실 듯한데, 소감 한말씀 부탁드려요.

할 수 있다면 책을 내고 싶지 않았어요. 부끄럽고 어느 때는 두렵기까지 했어요. 시간이 흘렀고 저는 자랐어요. 도움을 구하고 용기를 냈어요. 마음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시를 모으고 마침내 책을 완성했습니다. 제게 맞는 호흡으로 최선을 다했어요. 출판사와의 오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Q2. ‘그림 없는 그림책’이라는, 모순을 담고 있는 제목이 인상적이에요. 제목을 어떻게 결정하게 되신 건지 궁금합니다.

말씀처럼, 그림이 없이는 그림책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제목은 〈인어 공주〉 〈미운 오리 새끼〉로 우리에게 익숙한 안데르센의 동화집 제목에서 가져왔어요. ‘그림 없는 그림책’을 발음해보면 단순하지만 반복과 운율이 담겼고, 제 시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생각하는 시쓰기를 설명하기에 좋은 제목 같아요. 저는 어떤 마음이 제 안에 들어서면 오래 들여다봐요. 마음의 형국과 내력을 따라가다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시 쓴다는 건 자기 안의 이미지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 같아요. 시집엔 글자뿐이지만, 시는 읽는 사람에게 가 기어코 새로운 장면으로 맺힙니다.

Q3. 이번 시집에는 ‘실뜨기’ ‘잼잼’ ‘하우스 피규어’ 같은 어린 시절의 놀이들이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이마를 짚”(「호각」)거나 “머리를 감”(「성호를 그으며」)겨주는 등 시적 화자가 어린 사람을 돌보는 시들도 눈에 띄어요. 저는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책임지고 돌보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이런 시들을 쓰실 때 어떤 마음으로 쓰시는지, 시를 쓰실 때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어린 사람의 모습과 그를 돌보는 사람의 지극함이 제 시에 깃든 건 자연스러운 데가 있어요. 저는 어린이 곁에서 오래 일해왔어요. 어린이책 편집자, 어린이병원 문화공간 운영자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가면서 지냈고, 지금도 글쓰기 수업을 열어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어요. 계속 눈을 두고 있기에,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 시선이 시에 묻어난 것 같네요. 작년 봄,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왜 어린이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충분히 답하지 못했다고 느껴요. 삶으로도 시로도 제게 중요한 화두임에는 틀림없어요. 시는 제 삶을 인용하거나 번역하면서 생기는 부산물이 아닐까 생각도 해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떠 옮기는 것과는 다르죠. 어린 존재들이 사는 세계에 단단히 발 디디고 감각하고 싶어요. 계속해보겠습니다.

Q4. 처음 시집 편집 작업을 시작할 때 이 시집의 각 장이 한 권의 그림책처럼 읽히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게 오래 기억에 남는데요, 일반적인 시인선처럼 숫자로 부 구분을 나누지 않은 것도 어떤 독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님께 그림책이란 어떤 의미인지, 이 시집이 왜 그림책처럼 독자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라셨는지 듣고 싶어요. 어떤 기준으로 부를 구성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시를 쓰겠다고 자리에 앉으면 금세 주눅이 들곤 해요. 제가 가진 말 주머니가 가난하게 느껴지거든요. 저는 시와 멀어진 동안 그림책을 탐닉하고 탐독했어요. 그림책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풀려났을 때, 제 몸은 달라져 있었어요.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한 연에서 다음 연으로 건너갈 때마다 그림책의 페이지를 넘긴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원래보다 조금 더 가볍게, 멀리 가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쓴 시를 모아 시들을 배치할 때에도 그 감각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시와 시가 기대어 있을 때 그 간극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과 넘김이 주는 긴장을 염두에 두었어요. 시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하자고 촘촘히 모인 것은 아니지만요.
한편 부에 숫자를 붙이지 않은 건, 부의 순서를 꼭 지켜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표하고 싶었어요. 총 세 개의 부, ‘어린독일가문비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쓰인다’ ‘유리 그리기’ ‘그럼에도 흰 눈이 그리는 곡선’은 각기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정답이 없으니 끌리는 대로 시집에 진입하시면 좋겠어요.

Q5. 마지막으로 『그림 없는 그림책』과 함께 봄을 시작하는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시집 뒷면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처럼 보이나요? 펼쳐진 책에서 글자들이 빠져나가고, 비스듬히 비행하는 새의 날갯짓이 보입니다. 오늘은 타오르는 입술,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성냥개비처럼 당신께 말을 붙이는 입술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그 입술은 당신만의 것이 됩니다. 그 환한 입술로 저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손 모아 기다릴게요.

추천사


초인종이 울린다.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귄다.
손님이 포기하고 발길을 돌릴 때까지
나는 잠자코 기다린다.

“넌 왜 너희 집에 나를 초대하지 않니?”
윤주가 물었다.
톡 쏘는 말투이지만 못내 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열두 살 윤주에게 뒤늦게 이 책으로 편지한다.
너에게만은 털어놓고 싶던 속비밀이 여기 있다고.

2024년 3월
남지은

목차

어린 독일가문비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쓰인다
귀신의 집/ 비상계단/ 모래 상자/ 표정 카드/ 오르간/ 모조/ 흉/ 탄력성/ 도마뱀/ 혼자 하는 실뜨기/ 일치/ 호각/ 오르간/ 고양이 보호자

유리 그리기
유리 그리기/ 잼잼/ 하우스 피규어/ 넝쿨장미/ 화단/ 양손/ 헤드뱅잉/ 목마/ 말하기에 대한 강박/ 가정과 학습/ 침습하는 목소리/ 도움닫기/ 재생/ 이미지 게임/ 글자 가족/ 양분/ 코스튬/ 커터

그럼에도 흰 눈이 그리는 곡선
성호를 그으며/ 헹가래, 헹가래/ 전염/ 젖은 발/ 캄파눌라/ 유수지에서/ 수평의 세계/ 기척/ 복기/ 그림 없는 그림책/ 크로키/ 새벽 탈출/ 잊었던 용기/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는 소리/ 테라스/ 참새 변주곡/ 혼자 가는 먼 집/ 마트료시카

해설_시가 기르는 작은 시
김지은(동화작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본문중에서

깜깜하고 차가운 하늘에
조각달이 비뚜름하게 걸려 있다
작은 토끼의 눈에
큰 토끼는 깨진 왕관을 쓴 왕처럼 보였다
활활 타오르는 집을
깊은 눈동자에 밤새도록 담으면서
작은 토끼는 조금씩밖에 자랄 수 없었다 _「비상계단」 부분

우린 열한번째 손가락
어쩌면 신이 떨어낸 모래 알갱이
뻥 뚫린 시간 속으로 튕겨진

개와 어린이의 영혼은 공터만 보면 뛰쳐나가도록 설계되었어
넓으면 넓을수록 비어 있으면 비어 있을수록
망치기 좋은 것들이 가득한 세계 _「모조」 부분

숨통이 조이는 방
폭염과 폭소가 뒤섞인 교실에서
어제와 내일의 손아귀에서

지루한 왕복을 알 수 없이 견디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게 시가 될 수 있다
침 튀겨 돈을 번 나는
뙤약볕 속 메마른
마음의 형편을 들키고서 지나치는 중이었다

차고 맑은
물 한 잔이 간절한 너희에게서

다음 주자를 향해 질주하는 너희에게서 _「탄력성」 부분

넌 날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자신했니

아름답다고 믿는 대부분이 껴안은 공통의 수수께끼

우리는 서로에게 답하기 위해
저기 저 빗방울을 좀더 바라보자고
굳게 약속한다

산산조각나기 위해 전속력으로
사랑을 나누는 우리가 _「도마뱀」 부분

하얀 해가 새로운 장면을 밝히듯이

내일은 괜찮을 거야 하고
언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생의 이마를 닦고 야옹 웃는다 _「고양이 보호자」 부분

울고 싶은 사람은 어디로 갈까
울고 싶은 사람을 울게 하는 약은 어디 있을까
어른들의 기도는 깊어지고 _「말하기에 대한 강박」 부분

뒤돌아보는 너의 얼굴이 삐죽거린다

나쁜 꿈을 빌려주고

단 한 사람을 여러 번 죽이는 일이
간결해진다 _「양분」 부분

어떤 마음은 붙박인 것들을
사랑하는구나 생각한다
뾰족한 잎들이 팽창하는 사이
밥알을 물에 불리는 사이
세모난 슬픔 속에서
젖은 사람이 더 젖은 사람의
둥근 어깨를 감싸는 게 보였다 _「캄파눌라」 부분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고갤 저어도 잠이 오는 것처럼
자꾸만 네가 물그릇을 쏟는 것처럼
어쩔 수가 없는 일과 어떤 말로도 불충분한 일이
이 땅을 뒤덮는가봐
메리가 하얀 배를 내보인다
그만 잠을 청하렴
눈이 오면 눈이 온다
일러줄게 늙은 개들은
작은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존재가 우리에게 필요하므로
그런 소식이 우리에게 찾아오므로 _「기척」 부분

오늘 달이 예쁘니 창을 열어두라는 말
달이 너만치 곱다는 말도 언니한테서 들었다

걸으면서 침도 뱉고

언니와 보던 달을 보고
언니가 읽던 책을 읽으면서

우린 같은 데서 멈추어 있었다

(…)

이쯤에서 쉬자는 말은 없었는데도

우리는 같은 데서 밑줄을 긋고 있었다
함께 보던 것을 저만 볼 때를 위해

운석처럼 곤두질하는 나의 마음 같은 것도
불길하게 타오르는 별이 감춘 꼬리 같은 것도

잿빛 하늘에 팔다리를 꿰입은 언니와
또 살아남아 침도 뱉고 하면서 _「복기」 부분

딴짓하듯 꿈 밖에 시를 만든다

그럼 좀 가벼워진다 _「새벽 탈출」 전문

늦었네 들어가자
그런 말이 당신을 덜 다치게 하고
어딘지 모를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

어딘지 슬픈 구석이 있는

네가 만든 그림책을 좋아해
네가 만드는 가장 첨단의 것
네가 네 힘을 들여 이루는 모든 것

(…)

그림책을 며칠씩 끌어안고
이 종이 이 판형 이 서체를 고집한
뜻을 헤아리다보면
눈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법이지

(…)

그림을 망친 아이처럼 당신이 운다면
다시 잠들 때까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세상 모든 그림책을 읽어줄게
미술관에도 박물관에도 수목원에도 다 데려갈게

좋은 이모 되고 싶다
좋은 말을 고르고 빚어서 아기 손에 쥐어줄

우리가 꿈꾸는 가족
비어 있는 화면에 의미를 더하면서
더 큰 사랑을 이룩하게 될 때까지 _「잊었던 용기」 부분

괜찮아? 춥지 않겠어? 다정한 물음이 있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하기 좋은 순간이 있다

조명이 어둡거나 테이블이 조금 흔들린대도
있잖아 하고 시작된 이야기가 그건 있잖아 하고 이어진다

옆 사람의 옷이 내 어깨에 걸리고
옆 사람의 말이 내 것처럼 들려서
옆 사람의 손에서 기울어진 찻잔같이 내 몸도 옆, 옆, 옆으로
기우뚱거리고

쏟아져도 괜찮아
낙관도 포기도 아닌 말이 마음에 닿기도 한다

난간에 기대어 자라던 식물들이 난간을 벗어나 _「테라스」 부분

문득 궁금했고 자주 궁금했던 친구들과 앉을
식탁엔 꽃병을 두었다 꽃도 말도 정성으로
고르고 묶으면 화사한 자리가 되어서
곁이란 말이 볕이란 말처럼 따뜻한 데라서
홀로는 희미한 것들도 함께이면 선명했다
모두들 어디로 간 걸까 왜 나만 남았을까
그런 심정은 적게 말하고 작게 접어서
비우고 나면 친구들이 와
새롭게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식탁엔
커피잔을 들면 남는 동그란 자국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_「마트료시카」 부분

저자소개

남지은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2012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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