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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 : 김정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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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정환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16년 06월 05일
  • 쪽수 : 144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546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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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지난 3년 동안’쓰인 시를 모은 시집

    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 지난 3년 동안 쓰인 시들로, 이들 시편들이 총 3부에 나뉘어 담겨 있다. 1980년 데뷔 이후 그가 써왔던 시의 계보, 그러니까 역사를 담보로 현실을 증거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지경의 탄탄한 장시들을 독보적으로 선보인 김정환만의 시적 장기들이 유감없이 발휘된 한 권의 수작이다. 시의 정신과 시의 입말이 같은 보폭으로 그 궤를 맞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나 놀랍다. 정신이 앞지르면 시의 문체라는 가랑이가 찢어지고, 문체가 앞지르면 시의 정신이라는 옆구리가 터지는데 김정환 시인은 이 둘의 조합을 조화로이 이뤄낸다.

    출판사 서평

    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을 펴낸다. 시인의 말마따나 지난 3년 동안 쓰인 시들로, 이들 시편들이 총 3부에 나뉘어 담겨 있다. ‘지난 3년 동안’이라는 말에서 이번 시집의 힌트를 찾는다면 무리가 아니겠나 하겠지만, 오히려 그 밝힘이 이 시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안내 표지판이 된다는 걸 앞서 밝히고 싶다. 우리에게 지난 3년의 시간은 어떠했나. 매일같이 일어나고 습관처럼 빚어지는 사건 사고의 참혹함은 해결될 기미 없이 오늘도 현재진행형이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라는 정신은 뒤로 더 뒤로 더는 갈 데가 없음에도 계속 후퇴하며 벼랑 끝까지 밀려가고 있는 게 또한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고? 아 그러니까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우리 조국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까.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슬플까.
    김정환 시인의 이번 시집은 지난 1980년 데뷔 이후 그가 써왔던 시의 계보, 그러니까 역사를 담보로 현실을 증거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지경의 탄탄한 장시들을 독보적으로 선보인 김정환만의 시적 장기들이 유감없이 발휘된 한 권의 수작이다. 시의 정신과 시의 입말이 같은 보폭으로 그 궤를 맞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나 놀랍다. 정신이 앞지르면 시의 문체라는 가랑이가 찢어지고, 문체가 앞지르면 시의 정신이라는 옆구리가 터지는데 김정환 시인은 이 둘의 조합을 조화로이 이뤄낸다. "인간으로 살았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라는 자조 섞인 오묘한 인정이 언제나 그를 균형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게 하고 쓰게 하고 행동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시에서 그는 세상을 넓고 얕게 보기도 하고 좁고 깊게도 볼 줄 아는 까닭에 다면의 눈을 자유자재로 떴다 감는 입체성을 선보인다. 더불어 굵고 진한 테두리 속 유려하면서도 미려한 그의 시적 컬러를 나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쉽게 찾아내기도 한다.

    여보. 우리가 당분간 유지할 것은 연민의 각도다.
    산 자들의 번화가 아니면
    비린내 질펀한 어촌 근해 집어등 야경이 우리 앞에
    다시 출현할 때까지. 울음이 울음의 흔들림을
    선이 선의 흩어짐을, 수습할 때까지. 아니면
    할 수 없는 거다 여보. 그것은 우리 몫의 연민.
    바다가 멀리멀리 물러나 일직선에 가닿을 때까지.
    벽에 걸어두고 온 모자가 걸린다. 그 무게의
    부재가 많이 걸린다.
    (/ '각도' 중에서)

    옛사람이 글씨 쓴 것 아니고 옛 글씨가 사람 쓴 것 아니다.
    한용운이 영원히 살았다며 내게 보낸 한문 우편엽서
    답장으로 쓴다. 스스로 장한 너의 일을 하라. 알게 모르게
    죽음도 문제는 죽음이 아니고 생이다.
    아니, 자신이 생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 말고
    죽음이 무얼 더 알겠는가?
    (/ '고립의 역정' 중에서)

    우리가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
    그건 차라리 낫겟지. 그때 사라지지도 못한
    사람들 생각하면 생이, 잔존하는 생명이
    끔찍 그 자체일 수 있다.
    원전 노후,
    그것은 괴물이 스스로 그러기 전에 자신을 폐해달라는
    말. 괴물 자신의 마지막
    필사적인 인간 언어의
    말, 말의 마지막인 호소.
    왜 그것을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나?
    우리 마을에 나라를 집어삼킬,
    낯익은 괴물이 있다.
    호소하는 낯선 괴물이 있다.
    (/ '원전 노후(老朽)' 중에서)

    무엇보다 그라는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은 누구든 가르치려 드는 권위와 교조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물과 같은 사람이다. 흐르는 사람이다. 섞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로 흘러야 하고 흘러가야 하는지는 제 몸이 귀신같이 알아채서 제가 가지 말아야 할 길로는 절대 물 한 방울도 튀게 하지를 않는 사람이다. 마구 흩어져 있는 듯한 분산인데 그 나름의 공식이 존재하는 일사분란이다. 혀를 내두를 만한 숙련이라 하면 평생 시로 산 시인에게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일 테지만 솔직한 것이 얼마나 대범해질 수 있는지 그 대범함 속에 얼마나 많은 삶의 길항이 자연스럽게 머물다 갈 수 있는지 그는 제 시 속에 다양한 삶의 가지가지들이 놀다 갈 수 있게 자연스럽게 몸을 내어주는 대신 흥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흥은 흥을 만나 더한 흥으로 몸을 부풀리는 흥겨운 더하기이자 리듬의 곱셈. 굳이 리듬감을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이 시들을 노래처럼 흥얼거릴 수 있다면 이는 그가 부린 흥의 그물망이 참으로 탄력적이기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여지가 없겠다. 또한 다음의 시를 보자.

    아내가 출근 전에 팔팔 끓여놓고 간
    도미 대가리 매운탕 다시 끓여
    나 홀로 점심 먹는다. 땀을 뻘뻘 흘려도
    도미 대가리 매운탕
    새빨갛게 맵고 새까맣게 짜도
    소용이 없다.
    어두봉미* 눈알을 파먹는 거
    별거 아니고 잠깐이고
    동굴이다.
    춥고 끔찍하여 최소한
    아내와 내가 있었지.
    얼굴 살 뜯어먹으면 서서히
    드러나는 생선
    두개골, 광년 너머
    지질 연대의.
    특히 백악기의.
    인간이 먹는 죄가
    진화를 능가하고 그것이 참으로
    빠른 시간의 먼
    거리(距離)였구나. 아내와 나
    순식간 멀리 떨어져
    아내도 없고 나도 없다.
    소름 끼치는데 소름이라는 낱말이 없는 그

    백악기에 내가 있다. 아내는 어느 연대에?
    그리운, 그리운
    구석기여, 음식의
    죽음이 보였던. 인간 종(種)의
    희망이여, 살갗이었던.
    아내여, 이 모든 것이었던.

    * 魚頭鳳尾. ‘물고기는 머리 쪽, 새 고기는 꼬리 쪽이 맛있다.’
    (/ '도미 대가리 매운탕' 중에서)

    이 시집에서 특히나 주목해서 보아야 할 페이지가 있다면 바로 2부의 시편들이다. 신학철 선생의 그림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와 함께 펼쳐진 장시[構想의 具象, 혹은 중력의 수평]속에서 우리 현대사를 찬찬히 읽어나가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면, ‘세월호 참사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물 지옥 무지개]는 시인이 "2014년 5월 5일, 그러니까 참사의 수가 뒤늦게, 어처구니없이, 그러므로 더욱 지리하고 더욱 지리한 바로 그만큼 더 끔찍하게, 304로 변경 확인되기 전에 쓰"인 것으로, 그날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보 속에 있는 세월호 참사의 현장을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저마다의 주관적인 판단을 해보게끔 열어주는 의미로 시의 제 기능을 다해내고 있다.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을 뿐인데 참혹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라의 국상이라지 않는가. 나라가 다할 때까지 울어야 할 국상이라지 않는가.

    1
    자식 잃은 부모들, 슬픔에 희망이 없다. 슬픔을 모르는 자 더욱 희망이 없다.

    6
    죽은 어린이날이 있다. 죽은 어버이날이 있다. 죽은 스승의 날이 있다. 오 그 밖에 이러고도 세상이 돌아가다니, 우리가 살아 있기는 한 건가?

    10
    너무나 지리한 슬픔의 미분(微分)으로 넘어간다. 왜냐면 주검들의 소문만 끝없이 이어진다. 너무나 느닷없는 충격의 적분(積分)들로 넘어간다 왜냐면 끝까지 기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
    무지개 뜨지 않았다. 박제된 시간 위로 투명한 어깨들이 고개 숙이고 있다. 늦는 남편이 늦는 아내가 늦는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26
    무지개 뜨지 않았다. 열 달 품어 낳은 자식인데 열 며칠 만에 인양을 할 수는 없다...... 실종 학생 부모의 절규가 절규의 뒤늦은 등장을 알 수가 없다.

    29
    내 이름은 세월호 참사. 울음이 나라의 한몸일 때까지 울어보자.

    30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
    (/ '물 지옥 무지개-세월호 참사의 말' 중에서)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을 다 읽고 나면 내가 한 권의 시집을 읽은 것인지 한 편의 시를 읽은 것인지 가물가물 헷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한 호흡으로 쓴 시와 한 호흡으로 완성한 시집이라는 품은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질그릇이 아니다. 질그릇을 깨든 질그릇을 애지중지 여기든 이제 남은 몫은 읽는 자들의 것. 다만 이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를 짧게 요약해달라면 이렇게 덧붙일 수는 있겠다. "비운보다 인과/ 응보로 느껴져야 했다./ 조선 왕족들 자존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면 말이지./ 끔찍한 비만 틈틈 그 비좁은 길로 쏟아져나온/ 백성들의 인산(因山)/ 인산인해./ 통곡하는 슬픔보다 더 불쌍한 그 슬픔의 짐을/ 비좁은 길보다 더 비좁게 옥죄는 데 써야 했다."([한성부 지도]부분) 이것이 바로 우리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여전한, 우리로부터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우리를 가리키는 커다란 비유일 것이다.

    시인의 말

    최근 3년 동안 발표된 것들 위주로 모았다.
    해설은 누군가를 위해 비워둔다.

    2016년 5월
    김정환

    목차

    시인의 말

    1부
    ps.
    지명의 호의(好意)
    인쇄소
    각도
    좋은 여자 후배 시집
    액체 황홀
    고립의 역정
    시장→장터→시장, 서울 토박이 공지영과 김
    인숙에게
    성(城)
    내 몸에
    야구
    모기 실내
    사각(死角)
    한성부 지도
    분명

    생가 주변 편혜영에게
    선데이서울 김태희

    2부
    構想의 具象, 혹은 중력의 수평 신학철(1944~ )작, [한국현대사 갑순이와 갑돌이](2002, oil on canvas, 130x200cm, 8pieces/122x200cm, 8pieces). 좌에서 우로도 읽음.
    물 지옥 무지개 세월호 참사의 말
    최근 미국 사정 그리고 슬픈 순간의 영원, 1990년
    서라벌레코드사 발행 [The Classic Collection On Melodiya Of The USSR]

    3부
    건물 노후
    점, 뿐, 속
    31년
    격자의 강대나무
    신(神), 첫, 지구
    소리 김숨에게
    방해 이시영에게
    스캔들 혁명사
    나무 방 전망
    뉴질랜드 소
    이빨 빠지는 나날
    젖무덤 전망 햇살 체
    지명의 안식(安息)
    길찾기 이병창에게
    도미 대가리 매운탕
    성묘
    원전 노후(老朽)
    [미학 오디세이] 20년, 정말? 진중권에게
    보유(補遺): 발굴 바벨탑 토대

    본문중에서

    물 지옥 무지개
    세월호 참사의 말

    1
    자식 잃은 부모들, 슬픔에 희망이 없다. 슬픔을 모르는 자 더욱 희망이 없다.

    2
    죽은 자 아우성으로 더욱 급구(急救), 급구, 급물살 검은 맹골수로 속 입수 3분 수색 10분 감압 귀환 17분.

    3
    시신 안고 사선 넘는 잠수부 도로(徒勞)에 희망이 없다. 도로를 도로라 하는 자 더욱 희망이 없다.

    4
    나라에 국상(國喪)이 있다. 5백 년 전 국상. 나라가 다할 때까지 울어야 할 국상이다.

    5
    별도의 문상이 평소보다 더 잦았다. 죽은 자가 죽어가는 자를 추모하듯이 새벽길이 문상이고 죽음의 재탄생이고 나의 안방에 쉰내 가득했다.

    6
    죽은 어린이날이 있다. 죽은 어버이날이 있다. 죽은 스승의 날이 있다. 오 그 밖에 이러고도 세상이 돌아가다니, 우리가 살아 있기는 한 건가?

    7
    무엇을 했다는 사람들 무엇을 했다는 희망이 없다.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 무엇을 하고 있다는 희망이 없다. 어른들 희망이란 말에 희망이 없다.

    8
    살아 있다는 우리는 울음의 귀신들이지. 뒤늦은 소문이 거미줄 인맥의 악마처럼 달려들어 울음의 전신(全身)을 물어뜯는다.

    9
    여기가 퉁퉁 불은 물의 지옥이다. 실종자 숫자가 사망자 수 302*를 향해 넘어가고 또 넘어간다.

    10
    너무나 지리한 슬픔의 미분(微分)으로 넘어간다. 왜냐면 주검들의 소문만 끝없이 이어진다. 너무나 느닷없는 충격의 적분(積分)들로 넘어간다 왜냐면 끝까지 기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11
    여기가 자가용에 휘발유를 만땅 채우는 숫자로 참극의 양(量)을 잴밖에 없는 디지털 지옥이다.

    12
    나의 꿈이 살인이고 나의 깸이 처형이다. 떠돌고 밑도는 만신창이 슬픔의 거덜난 생이 시간보다 영영 더 길밖에 없는 지속의 절망이다.

    13
    이들의 죽음이 있다. 이들의 죽음에 뜻이 없다면 살아남은 생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있는가, 살아온 생과 살아갈 생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14
    어른의 희망이었던 아이들의 그 아픈 무지개가 있을까? 있단들 우리가 볼 수 있을까, 있단들 볼 자격이 있을까?

    15
    목숨도 살도 뼈도 없고 집단으로 숨이 끊기던
    바닷속 아비규환의 고통을
    아주 먼 옛날의 아주 희미한 참혹 정도로 기억하는
    어린 혼령들 있다.
    본능과 인연과 배운 지식과 쌓은 교양과 지닌 덕목이
    자연의 사물들 지닌 것만큼 남았다.
    그것이 자신들을 자각하는
    골격이자 등장이자 정체였다.
    ‘모처럼 시원하군.’
    바닷속에서 누가 말했다. 몇이 웅성거렸고 바다에 맨 먼저 떠서 그 누가 말했다.
    ‘올라와, 들. 우린 무지개를 만들어야 한대.’
    비가 내리고 그친단들 그들이
    비를 타고 올라 공중에
    물방울로 떠 있을 수 없다.
    바닷속 웅성거림이 충분히 잦아들자 그가 다시 말했다.
    ‘올라와, 들. 우리가 만드는 무지개가
    세상 사람들 보는 무지개래.’
    ......
    ‘그리고 세상 사람들 흘린 눈물이
    우리한테 내리는 비래.’
    ......
    ‘그 눈물을 타고, 올라가는 건 우리가 올라가야지.
    올라와, 들. 내가 먼저 누울 테니 내 위로 올라와.’
    그 말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바다 위 궁륭이 되었으나
    너무 흐려서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타고 오르며 둘째가 말했다.
    ‘보드랍구나 너는. 맞아 허리라는 게 있었어 옛날에......
    미끄러지지 않고 한없이 보드랍기만 한......
    만져보지 않아도 너무 짜릿했던......’
    그 말이 남색으로 물들며 보라색 궁륭에 얹고 얹혔다.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꽉 채우고 꽉 채워졌다.
    그 둘을 타고 오르며 셋째가 말했다.
    ‘다정하구나 너희는. 맞아. 소년과 소녀라는 게 있었지, 옛날에.
    터질 듯 두근대는 심장이 터지지 않고
    따스한 품일 수 있다는 게
    기적 같았던 나날이 있었어......
    그건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이와 오빠가, 그러니까 가족의
    (맞아 그런 게 있었어.)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을까?’
    그 말이 파랑으로 물들며, 자칫
    하늘 파랑으로 번지려다 가까스로 응축, 얹고 얹히는
    그, 응축의 포옹이
    육체 같았다.
    그 셋을 한걸음에 뛰어오르며 넷째가 말했다.
    ‘끈끈하구나, 너희는. 맞아, 학교라는 게 있었어, 옛날에......
    젊은 생명들이 도약하는 미래 희망의 포근한 울타리였지.
    우리는 그 도약으로 울타리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바깥세상 너무나 신기했지. 그건 도약하는 생명의
    희망이 아름다워서였나,
    울타리가 포근해서였나?’
    그 말이 초록으로 물들며 네번째 궁륭으로 얹고 얹혔다.
    완벽했고,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넷을 기어오르다 굴러떨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며 다섯째가 말했다.
    ‘알 수 없어, 그것 말고는.

    옛날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울타리 밖은 우리가 나가본 적이 없어.
    나갔더라도 나가본 적이 없어. 왜냐면 우리는 어렸으니까.
    우린 잘못한 게 없는데......
    원망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아, 옛날에.
    무엇을 원망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 말이 노랑으로 물들며 넷에게 마구 엎질러지자, 넷이 함께 말했다.
    ‘올라가, 올라가. 우린 무지개를 만들어야 한대.’
    다섯째가 계속 흐트러지며 물었다.
    ‘누가, 도대체 누가, 왜, 우리가, 왜?’
    넷이 순서대로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한테 어쩔 수 없는 일이 우리한테는 이룰 수 있는 일이니까’
    ‘세상 사람들한테 안 가본 곳과 알 수 없는 것이 우리한테는 시작이니까.’
    ‘세상 사람들한테 생명인 것이 우리한테는 죽음이니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뿐 결코 완벽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다섯째가 색을 추스르며 마침내 노랑 궁륭으로 얹고 얹혔다.

    그 ‘마침내’가 마침내 열린
    정신 같았다.
    각자의 말들이 각자의 색을 더 분명하게 하였으나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다섯을 성난 파도처럼 덮치며 여섯째가 포효했다.
    ‘아냐. 돌아갈 수 있어. 난 돌아갈 거야. 이건 아주 잘못된 거야.
    응징이라는 게 있었어, 옛날에......’
    다섯이 순서대로 여섯째를 달랬다.
    ‘그걸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실종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끝내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지.’
    ‘가슴에 묻었다고 하게 되었지.’
    ‘슬픔의 힘을 미래라고 부르게 되었지.’
    ......
    다섯이 모두 말했다.
    ‘우린 무지개를 만들어야 한대.’
    ‘그러면 나도 묻혀야겠구나, 너희 가슴에.’
    여섯째의 그 말이 주황으로 물들었고 물듦이 얹음이고 얹힘이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빨강은 여섯이 각자의 색을 더욱 밝히는 식(式)이고 각자의 색이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결과였다.
    그 식과 결과가 무지개의 말이고 보임이고 들림이었다,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맞아, 그런 게 있었어. 옛날에...... 우리를 위한
    도로(徒勞)가 있었어. ......그 생각이 무지개의 말이자 보임이자
    들림이었다,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벗고 단일(單一)로 펼쳐지기 직전
    각 궁륭의 생각에.

    무지개 떴다. 해가 맞은편으로 마중 나왔다.
    해가 가장 낯익은 동네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귀에 들리는 것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말하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참극은, 참극도, 지상에서도, 결국은
    다른 이들의 생을
    화사하게 하기 위해 있는 거겠지.
    왜냐면 참극을 초래한 자들이 결국은
    참극의 주인공이고 가장 불쌍한 참극이다.’
    그것이 가장 낯익은 동네인 태양의 말이자
    들림이자 보임이자 들음이자 봄이었다,

    16
    무지개 뜨지 않았다. 옳은 소리도 진전이 없다. 그러니까몇십 년 전 오대양 광신도 집단자살이 이제는 아이들을 집단 살해하고 있다고? 뜬소문도 진전이 없다.

    17
    무지개 뜨지 않았다. 비명만큼 크고 날카로운 새가 통유리창을 스친다. 소조(小潮) 끝나 유속 빨라지고 비가 내릴 듯 흐린 하늘이 퉁퉁 불은 시신 같다.

    18
    무지개 뜨지 않았다. 조금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다름 아닌 나의 영혼을 버리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내가 이리도 지지부진하다. 영혼이 남아 있나, 부끄러운 영혼이?

    19
    무지개 뜨지 않았다. 박제된 시간 위로 투명한 어깨들이 고개 숙이고 있다. 늦는 남편이 늦는 아내가 늦는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20
    무지개 뜨지 않았다. 떴다면 그건 무지개란, 비명을 일곱 단계로 질질 끈 가위눌림이 가위눌림으로 깨어나는 결정(結晶)이라는 소리였나?

    21
    무지개 뜨지 않았다. 비가 내렸고 평소가 돌아왔다. 그래야겠지...... 그런데 평소가 가장 음란한 포르노 같고, 가장 냄새나는 추문 같다.

    22
    만연한 죽음 회색을 배경으로 모든 생이 그래 보였고, 그래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것 같고,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여보. 저기 빠져들어 허우적대고 있는 거냐, 정말?

    23
    그럴 것 같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왜냐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아닌 나의, 다음 아닌 내 몸안의 온갖 악마들이. 이런 식으로라도, 정화(淨化)할 필요가 있다는 듯이.

    24
    무지개 뜨지 않았다. 살아서는 너무 뒤늦었다. 죽음의 등장과 등장인물들만 보인다. 모두의, 비명횡사의 뒤늦은 등장이 비명횡사의 뒤늦은 등장을 모른다.

    25
    살아 있다는, 아비규환만 있고 살아 있다는 아비규환의 뒤늦은 등장이 뒤늦은 등장을 모른다.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 이유가. 이유 없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지? 뒤늦은 이유들의 등장이 뒤늦은 등장을 모른다.

    26
    무지개 뜨지 않았다. 열 달 품어 낳은 자식인데 열 며칠 만에 인양을 할 수는 없다...... 실종 학생 부모의 절규가 절규의 뒤늦은 등장을 알 수가 없다.

    27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

    28
    울보들아. 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울어보자. 울음이 무지개 일곱 빛깔 찾아줄 때까지.

    29
    내 이름은 세월호 참사. 울음이 나라의 한몸일 때까지 울어보자.

    30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

    이 시는 2014년 5월 5일, 그러니까 참사의 수가 뒤늦게, 어처구니없이, 그러므로 더욱 지리하고 더욱 지리한 바로 그만큼 더 끔찍하게, 304로 변경 확인되기 전에 쓰였다. 그때까지 그 두 사람,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을까?
    (/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54.01.22~
    출생지 서울
    출간도서 44종
    판매수 3,066권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이다.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창작과비평]에 시 [마포, 강변에서]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문단에서 '이윤에도 성공에도 심지어 가독성에도 무심한 사람, 지독하게 무심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꼽힌다. 후배 시인 진은영은 "장사꾼도 혁명가도 번역가도 예술가도 늘 계산을 한다. 이 시집에는 없는게 없이 모든게 있지만, 유일하게 계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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