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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 유종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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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칠흑에서 초록의 여름이 갈려 나올 때
내줄 수 있을 때까지 내주자고
가둘 수 없이 번져보자고”

무심히 흘러가는 삶의 방향으로 관조의 시선을 기울일 때
삶과 죽음 그 사이 여백에 번지는 그윽한 한 획

출판사 서평

문학동네시인선 215번으로 유종인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를 펴낸다. 1996년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훈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세계에 대한 해박한 고전적 이해에 기초해 있고, 바깥 풍경에 자신만의 내면을 세심하고 유려한 시구로 투영”(김만중문학상 심사평에서)한다는 평가를 받은 시인은 삼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시적 갱신을 게을리하지 않는 동시에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되며 장르를 넘나드는 유연한 글쓰기를 보여왔다. 『숲 선생』(2022, 시인의 일요일)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무심을 거쳐 무아를 엿보려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담긴 시와 함께 “글을 조기처럼 낚아 말리”(「장인」)듯 글쓰기와 생활이 겹쳐진 시인의 삶이 드러나는 시들이 엮여 있어 사람과 삶을 향한 시인의 진지한 애정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준다.


잠시라도 죽을 젓는 게 늦으면
활화산 분화구에
분을 삭이지 못한 용암처럼
죽 방울이 금방 튀어오르기에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슬그머니 끼어든 듯 죽을 젓는다
처음엔 노를 젓듯 젓다가
다음엔 독필(禿筆)의 나무 주걱으로
언제 적 당신 이름을 썼다가 지우고
진시황이 먹었다는 저잣거리의 음식 이름
사전에도 없는 획수 무진장한 한자도
더듬더듬 그리듯 쓰며 젓다가
엊그제 밤 소낙비에 꽃대가 꺾인 노란 겹삼잎국화도
그 이름 잊힐까 한번 야채죽 속에
부러진 꽃대 일으켜세우듯 써본다
가서 몇 해쯤 능놀고 싶은 섬의 이름도
옛 이름으로 써보는데 죽 방울이
그런 거보다 더 그럴싸한 이름 없느냐
내 손등에 죽 방울 침을 놓으며
그럴듯한 연애를 쓰라는데
나는 조금 당황하여 묵혀둔 술 이름도 써본다
역시 술은 초서로 써야 제맛이지
그런 내가 죽을 쑤는지
술을 푸는지 모르는 등뒤에서
타지 않게 살살 놀지 말고 저으란다
_「죽을 좀 저으라기에」 부분

시인의 눈을 거치면 평범한 삶에서도 고즈넉하고 넉넉한 운치가 느껴진다. 시인은 가족을 위해 죽을 젓고 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죽을 저으며 시인은 주걱으로 죽을 젓는 일이 마치 “노를 젓”는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주걱이 붓이라도 되는 양 죽 속에 “당신 이름”을 적어보기도 하고 “엊그제 밤 소낙비에 꽃대가 꺾인 노란 겹삼잎국화”의 이름도 적어본다. 죽이 끓어오르며 방울이 튀어오르자 시인은 그것을 “더 그럴싸한 이름”을 적으라는 꾸지람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렇듯 시인은 눈앞에 놓인 죽 너머, 죽을 먹으며 꾸려가는 삶 전체를 조망한다. 이런 그의 태도는 생활인 유종인과 시인 유종인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시인의 삶과 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고장난 전기밥솥을 보자기에 싸들고 서 있”(「네덜란드의 햇빛」)다가 사거리 아스팔트에 반사된 햇빛에서 “네덜란드의 햇빛”을 읽어내는 사람이며, “아내가 며칠 멀리 간다고”(「옥토끼와 옴두꺼비와 나」) 끓여놓은 곰탕을 먹으면서도 “옥토끼와 옴두꺼비”의 방문을 떠올리는 사람이다. 마치 눈앞에 놓인 심상한 정경에서도 시를 읽어내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편 시인은 ‘이끼’와 ‘조무래기’, ‘노각’과 같은 소외된 존재들을 지긋이 바라본다. 미미한 존재감을 지닌 이끼와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속성을 가진 조무래기, 그리고 한해살이 식물인 노각을 애정을 갖고 들여다봄으로써 그것들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낸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점차 쌓인 “돈독한 먼지들”(「골동-나[我]」)을 “씻겨주는”(「계곡물」) 것이다. 유종인의 시에서 유독 순우리말이 눈에 띄는 것도 대상을 향한 시인의 이러한 애틋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사람들의 시야 밖으로 밀려난 순우리말들을 “보듬고 쓰다듬고 끌어안”(「고건축」)으며 그를 향한 “다솜”(「들판에서」)의 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아, 아무래도 우리는 조무래기들
어떤 위대함을 혁명을 지구에 틔워도
우주의 촌구석에 윤똑똑이로 살다 지쳐가는 우리는 조무래기들,
그러고도 남은 말은 미친 누이가 파헤친
어머니 당신 가을 무덤에 바쳐야지
쓸쓸함과 위안의 낮달, 아버지의 부처님 귀에 달라붙던 여치들,
지구 땅별에 티끌보다 작은 시의 귀걸이를 다는
나는 섬을 옹립한 시인 그대 때문에 사랑 때문에
마음에 불이 들어오고 나가는 조무래기,
사랑은, 나의 변방에 사는 말더듬이 귀가 먼 애인
나의 우주 말석 변두리 외주물집 옆에
다리가 셋인 황고라말과 버드나무를 세우고
두꺼비 손을 잡고 파초 그늘에 쟁반만한 연못을 파는 누인(累人),
사방 다솜의 공깃돌을 매만져 허공에 올려주는
아무래도 누대에 걸친 시의 이끼를 번져보려는
나는 다솜의 조무래기
_「조무래기들」 부분

그렇다면 시인이란 어떤 존재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내내 굴비처럼 생활의 곡절을 엮고 돌부리처럼 시를 캐”(「장인」)내며 작은 존재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기울이고, 언어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시인은 시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얼 하느냐”(같은 시)는 질문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종인은 이런 질문에 쉽게 흔들리거나 시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생활은 새똥이 묻은 교회 십자가 옆 허공에/ 빈 펜촉을 들어/ 필사(筆寫)의 부리로 끄적이는 일”(「만년필」)이라고 묵묵하게 말하며 오히려 모든 것들에 가치를 매기고 평가하는 자본주의사회를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시인은 “천만장자의 롤스로이스”와 “짝퉁 핸드백”, “채권 추심 대행 현수막”이 즐비한 자본주의사회의 풍경을 시로 그려내며 “정신에 공황과 섬망과 불안을 가구처럼 들여놓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되레 “영혼의 깊이”(「조무래기들」)에 대해 묻는다. 그러면서 “우주”의 관점에선 우리 모두가 “윤똑똑이로 살다 지쳐가는” “조무래기들”(같은 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시인을 보고 있자면 “손가락에 생긴 펜 혹”(「만년필」)만큼이나 단단하고 굳건한, 시를 향한 시인의 진중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가 느껴진다.
깨끗한 화선지에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리듯, 시인은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여백 위에 시어들을 흘려놓는다. 그는 결코 시어들로 여백을 빽빽하게 채우지 않고 빈 공간을 남겨둠으로써 시어의 그윽한 향을 더욱 배가시킨다. “한낮 풀벌레 소리가/ 쏟아지는 햇빛”(「가을 무릎-회고」) 속에서, “비거스렁이”를 쐬기 위해 들른 “소낙비 그친 숲”(「계곡물」)에서, “좁은 책상머리”(「옥토끼와 옴두꺼비와 나」)에서, 즉 삶의 모든 순간에 그는 시를 쓴다. 일상과 시를 분리하지 않고 시 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은 ‘만년필의 펜촉’처럼 단단한 시 세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고양이 새끼처럼”(「고사리」) 부드러운 시를 빚어낸다.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다가도 어느 순간 한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유종인의 시는 “끝이 말랑말랑한 봄날 연둣빛 찔레 가시”(「원(圓)」)를 닮아 독자의 마음을 슬그머니 쓰다듬는다. 유종인의 시에 깃든 “말라가는 뿌리를 감싸”(「이끼 반야(般若)」)주는 다정함과 시어들에서 풍겨나오는 “심심하고 담담한 내음”이 이 땅의 모든 “미물”(「조무래기들」)들에게 전에 느끼지 못한 깊고 아늑한 위로와 평안을 선사할 것이다.

감추면 으늑해지지
문득, 가난마저 활짝 털어
흰옷 빨래처럼 바지랑대 높이 걸고
한번 바람을 쐬면,
문득 내다볼 들판도 없이
내 옆구리에 광야를 팔짱 끼는 것

나여,
어제는 나무젓가락이나 벌렸지만
오늘은
모종의 번민을 장작처럼 쪼개보자

늘 가던 길에서 갈라져
더 가보는 호기심의 행보,
드디어는 한번 더 갈라지는 길
나는 분열하는 즐거움,

편애하자
가벼워지자
길이 갈라지는 건
이 세상에 더 깊이 뿌리박고 싶은
그윽한 악착

모종의 일몰,
슬픔의 독차지,
낯선 길에서 스님 같은 개와 같이 바라는 노을,
언제나 나의 능사는 번뇌,
꽃이 시들자
드디어 얼굴로 가슴으로
들이는 모종의 꽃,

언제나
사랑이라는 미완의 능사
_「능사(能事)」 전문

언어가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듯이 문학도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 그중에서도 특히 시인은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남루하고 지루한 삶의 풍경 속에서도 “인간의 어떤 위대함을 폭죽처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진흙탕 속에서 구원을 만날 수 있는, 시들어가는 작은 들꽃에서 우주를 느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혼돈과 모순 속에서도 온몸으로 신화를 살아낼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거기에 더해, 이 모든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지향점의 시작은 현실이어야 합니다. 즉, 시인은 세속과 더불어 괴로워하고, 세속과 더불어 구원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 그에게 있어 시를 쓴다는 것은 세속의 현실에 깊이 몸을 담그는 것과 같은 의미인 듯합니다. 물질적 욕망 속에 갇힌 삶의 공허함을 매 순간 온몸으로 마주하면서 말입니다.
_최형심, 발문에서

추천사


기꺼이 초록으로 말하려 하네
다솜이 멀지만 가까이 번져가자고

그리운 모든 것들 내 그윽한 측근이 되어가자고

2024년 6월 일산에서
유종인

목차

1부 이번 여름은 빗소리가, 자주 붓을 들었다
고건축/ 노각/ 이끼 반야(般若)/ 신문/ 죽을 좀 저으라기에/ 여름의 낙관/ 만년필/ 염주와 묵주/ 열무/ 네덜란드의 햇빛/ 그러니까 만세/ 원(圓)/ 능사(能事)/ 저 봄비/ 마를 다듬다

2부 무감각에서 사랑의 살결을 꺼내보자는 당신,
계곡물/ 가을 무릎-회고/ 전자레인지/ 폭설과 동파육(東坡肉)/ 불멸의 시집/ 부추전/ 옥토끼와 옴두꺼비와 나-8월 31일/ 가시와 놀다/ 수묵(水墨)/ 근처 새-곤줄박이/ 저녁의 물음/ 당(黨)/ 아프리카 바지/ 무감각/ 언덕

3부 허물을 모으고 포개놓으니 꽃과 같다
철가방 형/ 조무래기들/ 고사리/ 입장문/ 텅 빈 기도/ 습득(拾得)/ 시방 나는/ 코사지/ 장인/ 무극(無極)/ 골동-나[我]/ 먼동/ 전대미문/ 역광/ 사월

4부 그대라는 말도 수국으로 시들었으니
가을 무릎-여음(餘音)/ 달빛의 추임새/ 점괘/ 생색/ 맨발로 지구를/ 풀밭에서/ 엘리베이터/ 땀과 눈물/ 무인점(無人店)/ 초가을 이부자리/ 개를 만진 손으로/ 잉어/ 괴석과 호박말랭이/ 들판에서/ 식물의 손길

발문_필멸의 경계에 서다
최형심(시인)

본문중에서

이 심심하고 담담한 내음의 빛깔을 반야의 속종으로 알 거야

인멸을 모르는 초록의 어스름, 결별을 모르는 만남의 먼동이 예 서렸으니

주검을 눕혀놓으면 너무 편안하다 가만 죽은 뒤에도 생각이 번지는 몸을 어쩌나

식물원에 수형된 풋것들은, 가끔 여길 떠올릴 때 호젓한 기색이 만연해

누군가 예 와서는 말이야, 생각 없이 눈물 흘리는데 너무 벅차고 고요해_「이끼 반야(般若)」 부분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거기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_「신문」 부분

이번 여름은 빗소리가, 자주 붓을 들었다

흘리듯 듣는 것으로 몸속엔 화선지가 자주 펼쳐졌다

매미 소리가 세찬 여울로 쓸고 가는 새벽엔 한 획이 만 획인 듯 새하얘졌다_「여름의 낙관」 부분

사거리 아스팔트에 반사된 햇빛이
네덜란드의 눈부심 같았다
암스테르담 뒷골목 어느 오후의 적막한 빛과 그늘 같았다
거기 가보지 않고 여기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들,
네덜란드, 다르게는 화란(和蘭)이라는 이름으로
겨울 거실에 붉은 제라늄도 피었다
한 나라가 한 나라 밖에도 번져나 살듯
그대는 내게 불쑥 얼굴을 맞댄
네덜란드의 어떤 눈망울,
암스테르담의 빛과 그늘로 짠 바람의 외투들
사랑 외에 더 추가할 것이 있는가_「네덜란드의 햇빛」 부분

나를 미워하고 또 사랑하는 이가 있어
그로부터 이리 떨어진 적막의 몸을
내게는 좌천된 자의 음식이라 굽거나 찌고 썰어서
메마른 속을 달래는
눈 그친 별밤이라 불러본다_「폭설과 동파육(東坡肉)」 부분

칠흑에서 초록의 여름이 갈려 나올 때
내줄 수 있을 때까지 내주자고
가둘 수 없이 번져보자고
연애의 먹을 갈아대지요_「수묵(水墨)」 부분

양말을 풀어 던지고 세숫대야에 발 씻어
과꽃 시드는 화단에 나비물 번져 버릴 때
두레상에 모처럼 식구 수대로 수저 내려앉는 된소리가 으늑한 내게
너의 번뇌는 얼마나 따스한 피곤인가
피곤한 눈맞춤은 얼마만한 다정인가_「저녁의 물음」 부분

무감각에서 사랑의 살결을 꺼내보자는 당신,
무감각에서 농담처럼
절창의 열매를 맺어보자는 기담,
저 청보랏빛 수국도
빛바랜 무감각을 밤바람에 헹궈내듯
아파트 화단에 전직 동대표처럼 헛기침을 하는 것이지요_「무감각」 부분

나는 조망의 천재처럼
조금씩 이야기를 모으나보다
조금만 더 살을 붙이면 사랑이 내 팔을 끌어
그윽한 언덕으로 가자 할 테니

거기, 허공에 등을 기대앉아
바다의 결혼식과 하늘의 장례식을 포갠 수평선을
그대 조망의 천재로 날 부르듯
아니 살까 아니 죽을 수 없듯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_「언덕」 부분

가만가만 웃고 벼락처럼 꾸짖고
버들처럼 능청맞고 이끼처럼 소슬하고
가을이 반 미쳐서 온 맑음이면
나머지 반은 내가 끝 모르게 미쳐갈 맑음들,
이 가을에 나는 습득되었다_「습득(拾得)」 부분

허물을 모으고 포개놓으니 꽃과 같다
생각은 어둠에 맞는 먼동의 옷을 입으려 하고
거꾸로 놓은 앞날의 모래시계를 되짚어놓고
나의 미래의 훗날을 오늘로서 되살리는,
가만히 노래하면 얼음 속에 수런대는 풀들
마음에 거둔 적 없는 다솜을 걸어가라 흔들리는_「시방 나는」 부분

꽃이 오는 보폭을 재는
역광과 반그늘의 눈금자,
그 곁에 제자리서도 엇박자를 놓는 나를
그대가 문득 다가와 내 가슴에
사다리를 놓듯
턱, 하니 그대 눈총을 드리우는 날_「무극(無極)」 부분

어느 날 나는 나로부터 가만히 배워 나온 물건,
그윽한 영혼을 꾸미기 전 옥생각을 주물러서
감정의 호흡마저 나무에게 건네주는
사막과 광야로부터 동터오는
나[我]라는 외딴 물건

그대 눈빛을 끌어 저울질하는 생각이라는 물질,
너무 번지거나 번지지 않아서
번민이 파다한 나[我]라는 물건,
햇빛을 부르는 그늘의 나에게
번민도 값진 물건, 다솜을 건사하는 반그늘 같은
언제부턴가 늦된 물건인 나를 버드나무 자란 육교를 걸리며
툭 트여갈까, 셈평을 흔드는 가을 여뀌 곁에
갓 맑은 쓸쓸함마저 골동이라네_「골동-나[我]」 부분

슬픔이 고요해진 눈빛 같은 거
사랑이
틀어놓은 옛 축음기 같은 거
내 무릎을 짚으면
방금처럼
그대 눈길이 다녀간다_「가을 무릎-여음(餘音)」 부분

저자소개

유종인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968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1996년 《문예중앙》 시, 2003년 《동아일보》 시조, 2011년 《조선일보》 미술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교유록』 『숲 시집』 외 다수, 시조집 『답청』, 미술책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등이 있다. 지훈문학상, 지리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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