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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의 둘레 : 고진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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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고진하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15년 11월 10일
  • 쪽수 : 148
  • ISBN : 9788954638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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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고진하의 시집『명랑의 둘레』. 저자의 시는 일상에서도 가장 소박한 우리의 착한 심성을 끄집어내 보여준다. 일상의 기적, 그 일상의 처음과 끝에 우리의 나고 감을 은근슬쩍 얹어놓을 줄 안다.

출판사 서평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뒤 지금껏 활발한 시작활동을 이어온 중견 시인 고진하의 여덟번째 시집을 펴낸다. 지난 2013년 8월에 출간한 『꽃 먹는 소』이후 2년 3개월 만에 펼쳐 보이는 새 세계이니 부지런한 그의 시력을 충분히 엿보고도 남음이다. 총 4부로 나뉘어 담긴 시들은 근 칠십 편에 이르는바, 적게는 열네 편에서 많게는 스물두 편에 이르기까지 소반에 받쳐 말리는 무말랭이의 아삭하면서도 신선하며 익숙한 맛을 느끼게 한다.
여전히 맑고 여전히 밝은 그의 시들은 여전히 좋은 시력 또한 자랑하고 있다. 가까이 놓고도 쉽게들 몰라보는 ‘요강’부터 멀리 있어서 보기를 주저하는 ‘월식’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야에서 속속들이 관찰이 되는 사소함이랄까 일상이랄까 싶은 이야기들은 그러나 생과 사의 고락을 한데 품고 있는 것들이 족족이다.

저 언덕 위에 실버타운이 있는 거야 뭐야

바람이 은발들의 머리칼을 온종일 빗질하고 있잖아

꾸벅꾸벅 절하는 듯한 저 포즈는 또 뭐야

고집 센 은발들이 어찌 저리도 순해진 거야
-「억새」에서

어디 그뿐일까. 눈이 현미경인 만큼 귀도 무전기인 것이 그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의 숨소리를 골라낼 줄 아는 그만의 청력은 귓밥이란 걸 도통 쌓을 새도 없이 싹싹 싸락눈을 비질하듯 부지런히 청소해가며 그간 미처 듣지 못한, 예컨대 짜글짜글 뽀글뽀글 “마른 쌀 붇는 저 세미한 소리”가 “우리 식구들 살리는 소리”이자 “첫 아이 임신했을 때 아내 뱃속에서 들릴 듯 말 듯 들리던 태동”이라는 생명의 심박동임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물론 이즈음의 그로 보자면 “이젠 세상의 모든 큰 소리들을 거절”할 줄 안다. “대개 큰 소리들은 생명을 죽이는 소리”임을 아는 까닭에 말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부엌에 있던 아내가 쪼르르 달려와 들어보라고, 내 귀에 갖다댄
물 담긴 쌀바가지 속, 쌀 붇는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잘 들리지 않았네.

안 들려요? 안 들려. 안 들린단 말예요? 안 들려…… 아,아, 들려, 조금씩 들려…… 짜글짜글…… 뽀글뽀글…… 무려 30년이 넘도록 쌀을 불렸지만 처음 들어본다는 그 소리……

그래, 그 방면의 전문가가 30년 만에 들었다면 난 거의 공짜로 들은 셈인데
아예 들은 체도 알은체도 말아야지……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에서

고진하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힌다. 이때의 그 쉬움은 시인이 손수 파를 다듬듯 시 끝의 노랗게 마른 부분을 떼어내고, 시 뿌리의 흙을 털어내고, 시 마디의 거친 살결을 벗겨낸 까닭이다. 우리에게 남은 일이라곤 잘 다듬어진 ‘시’라를 파를 씻고 송송 썰어 요리마다 제대로 기본양념을 삼는 손쉬움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에게 쉽게 읽히는 시는 시인이 그만큼 어렵게 쓴 시라는 얘기도 될 것이다. 그 고심의 과정을 시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감출 이유가 따로 있겠냐며 함께 사유해가는 과정을 공유하자며 술술 풀어낸다. 그 과정의 아름다움은 다음의 시에서 가장 적절하게 드러난다.

된장국을 끓이겠다고
겨우내 바람벽에 매달려 흔들리던
마른 시래기를 떼어다 달라고 아내가 말했다.
시래기가 된 무청은 영양가가 풍부하다고.
그렇다면
평생 숱한 시련의 바람을 맞으며
시래기보다 더 시달린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왜 영양가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왜 지혜가 풍부해지고
슬기가 자라지 못했을까
왜 저 인간은
저승사자도 안 데려가는 거야,
그런 소리나 자꾸 들어야 할까
시래기 된장국 끓는 냄새가
집 밖까지 솔솔 새어나오는 아침
여직 장독대에 쌓인 눈과
이마에 얹히는 햇귀와
함께 식탁에 앉을 생각에 행복해하면서도
어떻게 무청처럼 영양가 높은
청청한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골똘해진다
-「무청」전문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떻게 가는 존재인가.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라는 운둔자의 책을 어쩌다 「밤길」이라는 시의 첫머리에 인용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지만 그가 제 자신과 저를 둘러싼 이 세상에 가지는 호기심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왕성해지는 것 같다. 질문하는 어린이, 그게 우리들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들은 질문은 잊고 대답만을 찾게 되었다.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어른이라는 건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간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더욱 생보다 사에 질문을 해야 하는 게 옳지 않겠나.
고진하 시의 미덕은 바로 그 천진함과 무구함에 있다. 안다고, 쉽다고, 의문 한번 품어보지 않은 일에 언제나 브레이크를 건다. 살짝 발을 건다고 해도 좋겠다. 그래서 걸려 넘어지면 그 순간에 우리는 왜 그랬을까 바로 그 생각이란 걸 하게 되니까. 그 생각이란 걸 하다보면 내 모자람과 내 부족함을 깨닫고 살짝 겸손해지기도 하고 보다 용감해지기도 하니까. 보라. 그런 그인 까닭에 “나를 어둡게 하는 건 바로 나”라는 ‘한 지구인의 인증 샷’도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닌가.
더불어 그의 시심(詩心)은 “이슬처럼 몸이 가벼워진 노모”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더욱 풍부해졌다. “눈멀고 귀먹고 정신줄마저 놓아버린 삼중고(三重苦)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자식으로서의 마음에 휘파람 같은 맑은 바람을 들락거리게 한 것이다. 이는 억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생기는 마음이 아니라 진정 난 몰랐는데 저절로 어느 날 불게 되었더라 하는 자연스러운 바람에서 오는 그 바람이 맞을 게다. 인위적이지 않고 가공하지 않은 데서 오는 무공해란 과연 이런 바람을 맞고 자란 생명들이지 않을까. “울 엄마, 이제 겨우 두 살!” 그러하니 아래 시와 같은 ‘말썽쟁이 울 엄마’가 나날이 저지르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아가의 율동.

아그그 까꿍, 하면 분홍빛 보조개를 지으며 방긋 웃음 짓는 아가의 모습을 쏙 빼닮았다

끼니 거르지 않고 꼬박 진지를 챙겨 드시지만 숟가락질이 서툴러서 이불이나 방바닥에 흘리기 일쑤이고

똥오줌을 못 가려 언제 철이 들꼬, 지청구를 듣지만 천진무구 저 천상의 유희법을 벗어날 뜻은 없으신가보다

울 엄마 아직 요강에 눈 배설물을 마시는 오줌 요법은 모르시지만

이따금 사방 벽에 빛깔도 찬란한 황금 벽화를 그리시는데 그 화풍은 내 소견에도 매우 전위적이시다

엊그젠 14인치 텔레비전 안테나 줄을 뚝 끊어 잇몸으로 잘근잘근 맛있게 씹고 계셨는데

그 깊은 속내야 다 알 순 없지만 이제 지상의 교신은 두절하고 천상과 직접 교신하시려나보다

가끔씩 콜콜 코를 골며 주무시다 옹알이하듯 들려주는 교신 내용을 해독해보면,

천상의 쌀 창고는 늘 비었는지 배가 고픈데 왜 밥을 안 주냐는 투정이시다 말썽쟁이
-「말썽쟁이 울 엄마」에서

고진하 시인은 아픈 어머니를 식물이라 여기는 듯도 하다. 봄나물 같은 경우 봄철에 살짝 돋았다 간대도 내년에 또 돋을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안다. 봄이 지나 나물이 다 뜯겨지고 없어도 우리는 그 생명이 다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돋을 것을 아니까. 흙의 힘을 믿으니까. 어머니의 유골이 “절구에 곱게 빻은 한 줌 재”가 되어 난분분 난분분 흩날린다. 내가 사는 하늘 아래 어디 안 흘러드는 데가 없이 그 품 한번 크기도 하다. 그렇게 시인은 어머니의 나고 감을 통해 ‘존재’라는 방식을 또 한번 깊이 생각하고 나선 것이다. ‘영원’이란 것을 물고늘어지는 것이다.
고진하의 시는 우리와 보폭을 함께한다. 그의 시는 우리와 읽는 호흡을 함께한다. 그의 시는 일상에 놓여 있으며 그의 시는 일상에서도 가장 소박한 우리의 착한 심성을 끄집어낼 줄 알고 그의 시는 일상의 기적, 그 일상의 처음과 끝에 우리의 나고 감을 은근슬쩍 얹어놓을 줄 안다. 일상을 일상으로 그려내되 삶이라는 우주를 그 안에서 발견하고 캐내서 먹인 뒤에 싸는 일까지 도와줄 줄 안다는 얘기다.
그는 다 자란 어른이지만 그는 여전히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의 눈매에 흘겨봄이란 없다. 꽈배기 같은 어른으로 꼬이지 않는 그의 시선 끝에 단련되어 있는 힘을 느낀다. 마주잡자는 손이다. 꼭 움켜쥐자는 손이다. 그 손을 잡고 따뜻하게 이 한 세상 살아보자는 손이다.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손이다. 사실은 그의 심장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향기 수업
명랑의 둘레
대문
웃음 세 송이
초록 스크랩
억새
박쥐
나무도 움직인다
푸른 쉼표
첫 불
엘리제를 위하여
물물 교환
사순절 무렵
고로쇠나무 우물
아지랑이야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

2부
입춘 무렵
고해
제비가 다녀가셨다
울음 농사
인동초야, 용서하지 말거라
잡초비빔밥
모란
대대적 사건
해토머리
똥 속의 보석
예수
성(聖)모자상
움직이는 사원
달의 걸음걸이
큰 고요에 대고 빌다
봄의 첫 문장
오리무중
황금 그늘 속으로
봄의 우울
무청
뒷간
월식

3부
생일
그림자의 속삭임
함박눈
고도에서
육식을 포기함
날개
귀뚜라미야
밤길
풍부한 시심(詩心)
말썽쟁이 울 엄마
봄 처녀
은가락지
청맹과니
좁은 방, 넓은 들
티끌의 증언
맨드라미
수목장

4부
재활용
지금 이 순간을
밭고랑 구름
호젓한 밤과 이별하는 방식에 대해
돈, 요놈!
야크
보리밭에서
똥 탑
마근 스님
요강
그 식당 옆 와송
가묘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제야(除夜)

발문|연민 사이로 새어나오는 울음과 웃음|최창근(극작가?시인)

본문중에서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오리를 가고 나면 또 오리가 무중이다
답답한 마음 달래려 호숫가를 걷다가
물속을 자맥질하고
또 자맥질하는 오리들을 본다
쬐고만 창자를 채워줄 물속도
물속 시계(視界)도 오리무중인 모양이다
그래도 또 자맥질하길 그치지 않는
잔잔한 수면에 이는 파문이 뭉클하다
파문당한 어떤 생의 헛발질처럼
쉴 새 없이 헤적이는 갈퀴발질이 생생하다
물의 심장처럼 두근두근 떠 있다가
저녁놀 머금고 날아오르는 오리들처럼
생생한 물음 머금고 그냥 가야 할 모양이다
한 모롱이 두 모롱이 감돌아 오리를 가고
또 오리를 가도 오리무중
아득한 하늘길을 너도 가고 나도 가고
그렇게 하루가 캄캄하게 갔다
어디 방점 한 점 찍을 데 없는 하루가
그렇게 가볍게 갔다
-「오리무중」 전문

택배로, 쌀이 한 포대 왔다 이런!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지난겨울 생면부지의 어떤 노인이 전화로, 시집을 읽고 감동받았다며 대뜸 자기네 선산에 세울 비문을 써달라고 하기에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얼마 뒤 눈보라치는 악천후 뚫고 직접 찾아와 떼쓰는 통에 차마 거절 못하고 써주마 하며 좀 기다리시라 했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 내 목구멍 속으로 다짜고짜 밀고 들어왔다
전라도 어디 청룡등이라던가, 그 산자락에 세울 비에
뭐라 써줄지 아직 감감하기만 한데
비문과 바꿀 쌀 30킬로로 우격다짐 밀고 들어왔다

전에도 어느 시 잡지에서 원고료 대신 보내준 쌀을 받은 적 있지만

이제 내 생계는 이러구러 물물 교환으로 가는 것이냐

허 참, 이래도 되나 이래도 되나
-「물물 교환」전문

아빠, 박쥐가 나타났어 얼른 와 무서워

난 빗자루를 들고 마루로 달려가 미친놈처럼 빗자루를 휘둘러

기어코 놈을 때려잡았지

딸의 성화에 못 이겨 그렇게 잡고 보니

날아다닐 땐 덩치가 커 보였는데 작은 조약돌보다도 작았어

연민이 일어

죽은 놈의 몸을 요리조리 만져보니

몸속엔 먹이도 똥도 내장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

아, 그래서 밤하늘을

그렇게 가벼이 날아다닐 수 있었구나

문득 난 손으로

밤의 천사의 날개를 조심조심 펼친 후

가만히 들여다보았지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내가 천사로 변할 일은 없겠지만

천사의 가벼운 날갯짓만은 배우고 싶어
-「박쥐」전문

저자소개

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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