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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녀

원제 : 聖少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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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독보적인 신인 작가로서의 문학적 재능이 번득이던 쿠라하시 유미꼬의 초기 작품!

무겁고 난해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섬세한 감성과 묘사의 힘으로 불쾌감 없이 독자들을 몽환적인 비현실 속으로 매끄럽게 이끌어 나가는 쿠라하시 유미꼬의 소설 『성소녀』. 참신하고 폭넓으면서도 엄정한 기획, 원작의 의도와 문체를 살려내는 적확하고 충실한 번역으로 세계문학 독서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자 하는 「창비세계문학」의 서른일곱 번째 작품이다. 강렬한 개성과 실험적인 작품세계로 독자적인 위치를 점한 쿠라하시 유미꼬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불가능한 사랑인 근친상간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주제 자체에 천착하거나 시공간과 인과의 질서로 짜인 리얼리티를 구축하려 애쓰지 않는다. 저자는 금기를 넘어서려는 것을 통해 성스러움에 도달하려는 인물로서 미키를 구현해내며 무겁고 난해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섬세한 감성과 묘사의 힘으로 불쾌감 없이 비현실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출판사 서평

독보적인 전후 신세대 작가 쿠라하시 유미꼬
강렬한 개성과 유미적 문체로 빚어낸 몽환적인 상상력


일본 현대문학에서 ‘제3의 신인’ 이후 등장한 젊은 작가군 중에서도 강렬한 개성과 실험적인 작품세계로 독자적인 위치를 점했던 쿠라하시 유미꼬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편소설 『성소녀』가 국내 초역되었다. 메이지 대학 불문학과 재학 중인 1960년에 모교의 총장상 공모에 『파르타이』가 입선하며 데뷔했는데 평론가 히라노 켄이 이례적으로 『마이니찌신분』의 문예시평을 할애하여 ‘오오에 켄자부로오를 발견했을 때의 흥분’을 느꼈다는 호평을 실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줄곧 오오에 켄자부로오를 비롯한 동시대 작가들과 한 그룹으로 거론되면서도, 구체적인 질서와 시공간에서 벗어난 세계, 섬세한 감성과 묘사가 강화하는 몽환적인 비현실성, 일본 사소설 전통에 대한 거부반응 등, 일본 문단에 예외적이고 논쟁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며 독특한 작가로 평가받아왔다. 『성소녀』는 독보적인 신인 작가로서의 문학적 재능이 번득이던 초기의 작품으로, 자극적인 주제를 인상적인 필치로 매끄럽게 다뤄내고 있다.

성스러움과 악, 검은 태양 같은 사랑의 두 얼굴

“나는 이때의 미키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의지라든가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새하얀 타원형 얼굴, 혹은 달덩이만큼이나 크고 반짝이던 검은 눈동자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미키의 용모라든가 몸매, 복장을 묘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키에게 수많은 언어를 붙여 독자 앞으로 끌어내려는 소설가에게 저주 있으라.”(8면)

소설은 “검은 속옷으로 애처롭게 감겨 있는 알몸”을(8면) 떠올리게 하는 기이한 미소녀 미키를 화자 K가 처음으로 만난 때를 회상하며 시작된다. 고교 시절, K는 친구들과 강도질로 번 돈으로 한바탕 놀러 가는 길에 “어디까지든”(8면) 태워달라는 수수께끼의 소녀 미키와 마주친다. 이후 그는 대학에 진학했고 학생운동에도 뛰어들었다가 지금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며 미국대사관의 비자 발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던 중에 동승한 어머니가 즉사할 정도의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미키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가면서 두사람은 재회한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미키는 자신이 쓰던 의문의 ‘노트’를 “마치 사막의 유적에서 파낸 이상한 비문처럼”(13면) 해독을 도와달라며 그녀의 일기를 건넨다. 문제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나’는 “무중력권을 떠다니는 듯한 곤혹”(13면)에 빠진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참이에요, 파파. 왜, 누구 때문에? 파파 때문에, 그리고 파파와 사랑을 나눴기 때문이지요, 물론.”(13면)

기억상실 전에 미키가 쓰던 일기와, ‘나’ 즉 K가 써내려가는 ‘소설’이 두 축을 이루며 두사람의 이야기 모두 사실인 듯 거짓인 듯 읽는 이들을 끊임없는 혼란에 빠뜨린다. 미키와 ‘파파’, ‘나’와 누나 L,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끝까지 알 수 없는 미궁 속에서 두사람은 불가능한 사랑을 갈망하며 “새카만 어둠”이자 “격렬한 태양”(220면) 같은 관계의 비밀을 공유한다.
쿠라하시 유미꼬는 이 소설에서 ‘불가능한 사랑인 근친상간을 성화(聖化)해보려 시도했다’고 밝히며, 금기를 넘어서려는 것을 통해 성스러움에 도달하려고 하는 인물로서 미키를 구현해낸다. ‘무거운 신(神)’인 파파를 향한 미키의 사랑은 “신과 그 일족에게만 허용되는 일”, “금지되어 있는 일을 굳이 하”는 것이고(133~35면) 그로써 신에게 대항하여 그의 일족임을 주장하고 스스로 성녀(聖女)가 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공허와 결여의 낯선 세계로 이끄는
어둡고 매혹적인 이야기


“어떤 남자가 일상생활 속에 열려 있는 바기나 입구 정도의 구멍을 발견해서 (…) 느닷없이 엄청난 힘에 의해 구멍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되는 거지. 그리고 이 남자와 함께 이 남자가 관계되어 있던 세계 전체가 바람이 빠져 쪼그라드는 낙하산처럼 질질 끌려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걸 깨닫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는 이야기인데, 나 자신도 날마다 그런 공포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 거야.”(146~47면)

『성소녀』 속에서 시공간의 연결은 자주 흐트러지고, 허구와 사실은 뒤섞이며, 인물들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예컨대 수수께끼의 중심에 놓인 ‘파파’는 세련된 플레이보이 치과 의사였다가, 뇌출혈로 쓰러질 법한 거구의 늙은 공업사 사장이었다가,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아내에게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근친상간을 실행하는 사내를 오간다. 또 K를 미키와 내밀한 연대감과 동류의식으로 묶어주는 것은 그와 누나 L의 관계 때문이지만, 이 두사람이 정말로 친남매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더구나 미키의 ‘노트’가 과연 일기인지, 아니면 소설에 불과한지, 그녀의 기억상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과연 기억상실이 맞는 건지도 모호하다. 독자들은 이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의문 속에서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의 질서와 인과에서 벗어난 다른 세계의 구멍으로 빨려들어간다.
작가는 “문학은 이런저런 문제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을 이용하여 ‘반(反)세계’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며, 창작의 중심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에 두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근친상간이라는 주제 자체에 천착하거나 시공간과 인과의 질서로 짜인 리얼리티를 구축하려 애쓰지 않는다. 쿠라하시가 창조하는 ‘반세계’에서는 근친상간이라는 사실 따위는 그저 이해의 범위 안에 있으며,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전혀 별개의 세상을 보여준다.

“괜찮아요, 얼마든지 내 안으로 들어오셔도 좋아요, 어차피 내 안은 텅 비어 있으니까요.”(71면)

“다만 공허만이, 동굴에 사는 박쥐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같은 것이 미키의 내면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89면)

‘반세계’라고 작가 스스로 설명한 이같은 독특한 리얼리티는 1960년대를 휩쓴 학생운동이나 패전 등 역사적 체험에 대해서도 기이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드러난다. 이를테면 작가와 같은 세대인 ‘나’라는 인물에서 잘 드러나는데, ‘나’의 체험을 다루면서도 좌익 정서나 역사적 기억, 사회변혁의 열망에 대해 오오에 켄자부로오 같은 당대 작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전후세대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허무, 냉소를 그려낸다. 이는 근대 이후 일본 문학의 바탕에 깔린 ‘제 이야기나 늘어놓는’ 사소설 전통에 대한 작가의 거부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어떻게’에 초점을 두고 실험을 거듭했던 고민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근친상간이라는 어두운 주제, “농후한 꿈과 같은 분위기”(91면), “죽음처럼 검은 태양”과(208면) “물고기 모양을 한 허무”만이(149면) 가득한 세계, 『성소녀』는 이처럼 무겁고 난해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섬세한 감성과 묘사의 힘으로 불쾌감 없이 독자들을 몽환적인 비현실 속으로 매끄럽게 이끌어간다. 일본 근현대문학을 장식한 견고한 남성 작가들의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아왔지만, 발표된 지 어느새 반세기 다 되어가는 이 작품이 보여주듯 쿠라하시 유미꼬는 여전히 일본 문단에서 ‘전위적’이라고 수식할 수 있는, 드문 작가일 것이다.

목차

성소녀

작품해설 / 일본 ‘안보’ 세대의 ‘반’세계
작가연보
발간사

본문중에서

괜찮아요, 얼마든지 내 안으로 들어오셔도 좋아요, 어차피 내 안은 텅 비어 있으니까요.(71면)

난 한때 코뮤니스트였지만 가난뱅이의 원한 때문에 코뮤니스트가 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비열한 원한 같은 건 꿀꺽 삼켜버린 근사한 괴물이 바로 나이고, 나는 무엇보다도 지적인 충동에서 혁명의 이미지를, 그리고 파괴 후의 폐허 너머로 망령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보는 것만을 바라며 닥치는 대로 벽 허무는 일을 시작한 것이라는 식으로 믿었던 듯해.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인간의 원한과 증오에는 역시 가난뱅이의 비열함이 스며들어 있는 거야. (74~75면)

나는 미키를 욕망하고 있었던 걸까? 알몸으로 내 눈 속을 헤엄치고 있는 미키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슬픔’은 적당한 낱말이 아니지만 어쨌든 미키는 나의 내장을 간질이기도 하고 잡아당기기도 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나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성적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내 주의를 끌었다기보다는 인식의 대상으로서 나를 도발하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물고기 같은 ‘눈’ 그 자체가 되어 미키를 먹어버리고 싶었다.(100면)

그것이 에로티즘의 바다에 빠져 죽을 때의 눈이라고 한다면, 보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을. 어쨌든 나는 투우 소의 부러진 뿔 같은 것을 지닌 채 방심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보는 L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눈부신 태양, 하지만 한줄기 빛도 발하지 못하는 죽음처럼 검은 태양,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의 우주 공간에 나타나는 한밤중의 태양.(208면)

오직 하나의 어두운 구멍, 끔찍한 것이 담겨 있음이 분명한 기억의 우물만 제외하고. 물론 그것은 파파. 거의 모든 것이 제게 되돌아왔지만, 파파만은 제 눈엔 어떤 의미도 퍼올릴 수 없는 새카만 어둠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의 눈을 지질 듯한 격렬한 태양이었습니다.(219~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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