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가 처음으로 읽은 심청전에는 뺑덕 어멈이 없었다. 시간이 흐른 후 , 다시 읽은 심청전에는 뺑덕 어멈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녀의 우악스러운 성격뿐이다. 그동안 심청전을 읽은 사람들에게 뺑덕 어멈은 존재감조차 없는 철저한 조연일 뿐이다. 하지만 '뺑덕'은 달랐다.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지던 뺑덕 어멈과 뺑덕의 삶을 재조명했다.
병덕은 자신에게 친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가족 주위를 겉돌다 , 결국 집을 나와 바다로 간다. 바다에서 만난 동네 친구에 의지하여 지내지만 파도에 친구를 잃고 난 후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길을 떠난다. 병덕은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주막에서 같이 지내지만 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소문과 여러 고민들로 갈등하고 방황한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향해 걸어나간다.
사실 , 한 번도 뺑덕 어멈에 대해 궁금해 해 본 적이 없었다. 상심에 빠져있는 심봉사 앞에 갑자기 등장한 여인의 이름이 왜 '뺑덕 어멈'인지 , 뺑덕이는 누구인지 심청전을 알려주지 않았고 단지 심봉사의 재산을 빼엇어 도망친 악녀로 기록할 뿐이었다. 하지만 '뺑덕'에서는 뺑덕 어멈을 악녀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빼앗기고 , 다른 남자들에게 상처를 받은 탓에 바락바락 살게 될 수 밖에 없었던 한 어머니였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속된 말로 이르며 수군댈 수록 더욱더 우악스럽게 삶을 살아나갔다. 그래서 심청이의 효심보다 그녀의 상처입은 마음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세상을 향해 불퉁하게 굴지만 결고 포기하지 않은 삶의 끝이 병덕이를 되찾은 후에도 결고 순탄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 왕비가 되어 아버지를 모시고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심청보다 더 신경쓰였다.
그래서 적어도 나에게 '뺑덕'은 단순한 심청전의 외전 , 그 이상이다. 심청의 지극한 효성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 상처를 건드리지만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챙겨주고야 마는 뺑덕 모자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소설에서는 뺑덕이의 방황 이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병덕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가려 하는 부분에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허무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결말이다. 앞으로 펼쳐질 모자의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기 때문이다. 둘은 평생 행복하지는 못 할 것이다. 서로를 원망하고 , 상처를 건드리기도 할 것이며 추한 모습을 보이게도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가족이기에 ,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보듬고 행복할 것이다. 이 둘의 이야기는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하고 , 아름답지 않기에 아름답다.
p.80 거기서는 늙지도 않고, 근심 걱정도 없단다. 사시사철 꽃 피고 새 우는 향기로운 섬에서 서로 사랑하고 노래하며 산다더라. 땅에만 무릉도원이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바다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인연 묶인 대로 한세상,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파도가 안아 가 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거든.
p.196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바락바락, 그거 애쓰며 산 거 맞아요. 나는 어미가 산 세월을, 어떻게 해 볼 힘이 없어 혼자 버둥댄 흔적을 보듬어 안았다. 그러자 내가 어미에게 안기는 것 같았다. 아가야, 귓전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어머니. 내 안의 응어리가 조금씩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