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이 지독히도 사랑스럽다. '책 사냥꾼'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책'이라니.
책과 관련된 책은 지금까지 에세이나 추천집을 맴돌았던 내게 책과 관련된 소설이라니.
더이상 볼 것도 없었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했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세계의 책>이라는 단 한 권의 완전한 책을 찾기 위한 단서인 <베니의 모험>이라는 책을 찾기 시작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있다.
솔직히 줄거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흥미진진한 것도 아니었고,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내린 것은 작가의 말장난 때문이었다. 너무 길어서 한 번에 파악할 수도 없는 문장, 신선한 비유 등등. 정체불명이지만 들여다 보게 되고, 나름의 애정도 가지게 된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책탐이 가득한 내게 새로운 동지들을 안겨준 느낌이다.


- 전 세계에서 1년에 출간되는 책이 100만 종. 한국에서 출간되는 책은 4만 종 이상. 하루에는 1,000종 이상. 부수로는 1억 부 이상. 그 대부분은 국가 자격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을 위한 문제집, 수험서, 참고서.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서적은 130만 종. 한편 보통 사람이 일하고 공부하고 밥 먹고 잠자고 남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매일 다섯 권씩 책을 읽는다면 1년에 1,825권. 이 짓을 100년간 하면 18만 2,500권.
한 실장은 말을 잠깐 멈췄다.
- 아무도 읽지 못한, 띠지도 벗기지 않은 1판 1쇄의 책들이, 제지 공장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책의 지옥이죠.
그 역시 책 사냥꾼이었다. 그것도 나처럼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은.

내가 구병모 작가님을 처음 만난 건 '위저드 베이커리'에서였다. 작가님만의 문체와 참신한 소재에 이끌려 다른 작품인 '피그말리온 아이들'도 읽었다. 그렇게 내가 읽은 작가님의 작품은 둘 다 청소년 소설이었고 일반소설은 '파과'가 처음이다.

 

주인공 '조각'의 직업은 살인 청부업자(이하 킬러)이지만 킬러 이야기는 아니다. 킬러라는 직업을 가진 한 여인의 이야기다. 얼마 전에 읽은 '살인자의 기억법'에 이어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은 두 번째다. 하지만 현직 킬러 이야기는 처음이다. 그것도 노인의 이야기는. 보통 킬러가 나오는 소설이라고 하면 젊고 뛰어난 미모에 월등한 실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고 짜릿한 반전과 빠른 전개속도, 자극적인 묘사 등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런 소설을 원한다면 작가님 말대로 번지수가 달라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소설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어 킬러로 살아온 조각은 감정을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자 파지 줍는 노인을 돕고, 킬러가 아닌 삶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다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일 뿐이었고 그녀는 한 남자의 손에서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다.

 

항상 느낀대로 작가님의 문장은 호흡이 길었다. 그래도 청소년 소설에서 만난 문장은 적당한 리듬이 있었지만 이번 소설은 끊어 읽기조차도 힘들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 이해가 될 정도로 길었다.

 

몸짓과 인상착의가 다른 이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겨줄 만큼은 아닌데, 보통 사람들이 전철에 오른 수많은 노인 가운데 유독 한 명에게 찰나 이상의 시선을 보낸다면 이유는 아마 그가 열차 끝 칸에서부터 쓸어 온 무가지 뭉치를 품에 안은 채 누군가 혹시 흘렸을 파지를 찾아 선반을 훑으며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치고 다니기 떄문이거나, 보랏빛 점무늬가 날염된 항아리 팬츠와 고무신 차림으로 들어서자마자 갓 짠 참기름과 생강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보퉁이를 명백히 통행에 방해되게 바닥에 내려놓고 그 옆에 보란 듯이 주저앉아서 아이구 아이구 앓는 바람에 결국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 서장 중

 

하지만 다행히도 서장에서 몇 개 눈에 띄었을 뿐 뒷 부분은 매끄럽게 읽혔지만 좋아하는 작가님의 작품인 만큼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숨가쁘게 읽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 싸우는 장면이 너무 분량을 할애했다는 말이 있지만 난 괜찮았다. 약간의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장면도 매끄럽게 읽혔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아무 생각 없이 작가의 말을 읽고 또다시 멈추었다.  제목인 '파과'에 두 가지 뜻이 있었기에.

 

파과의 첫 번째 뜻. 16세인 여성.

두 번째 뜻. 흠집이 난 과실.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선택이란 꼭 한 가지만을 선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 번쯤 읽어보기를 바란다. 지금의 행복을 느끼기 위하여.

 

 

드디어 정유정 작가를 만났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라는 청소년 소설로 한 번 만났었지만 그렇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 후, 정유정 작가의 책 중 널리 알려져 있는 '7년의 밤'을 읽어보려 했고 이렇게 읽어보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이 책의 첫문장이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해피 버스데이."

마지막 문장까지 순식간에 읽어내렸다. 뒷 표지에 적혀있는 대로 뒤돌아보지 않는 힘 있는 문장이었다. 이 책의 배경인 세령호가 실제 존재하는 곳인것만 같았고 속도감있는 전개가 숨가쁘게 펼쳐졌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우연히 한 소녀를 살해하고 그 사실을 숨기며 지내온 남자와 소녀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 복수하려 하는 소녀의 아빠. 그 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7년의 밤은 역동적이면서도 디테일한 요소를 놓치지 않는다.

서원의 아빠인 현수의 좌절감과 두려움, 세령의 아빠인 영제의 분노와 집착, 잔인함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그러한 묘사는 책장을 넘기는 내내 오로지 내용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또 등장인물을 완벽히 이해하게 만들어 어느 순간 내가 소설 속의 인물이 된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책의 두께는 두껍지만 너무나도 속도감있게 읽힌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정유정 작가의 매력에 감탄하게 된다.

앞으로 또 무슨 작품을 써 내려갈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