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 '10대의 정체성, 소통법, 진로, 가치관을 찾아가는 미술 에세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반신반의했다.미술과 정체성, 소통범, 진로, 가치관들을 어떻게 엮어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청소년의 내면을 다듬는 책을 가장한 고리타분한 미술 관련 책을 것이라고 생각한 점도 일부 있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책을 넘기자 내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각 주제별로 작가를 정해 그 작가의 삶의 일부와 작품 세계를 안내하면서 어느 새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저자가 건네고 싶은 말로 이어진다. 발라동, 칼로, 렘브란트, 드가, 뭉크, 박수근, 모네, 디즈니, 베르니니, 고흐, 콜비츠 등 훌륭한 작품 뒤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못했던 위대한 화가들의 마음과 작품 완성의 계기, 밝지 만은 않았던 삶을 비추어낸다.

 

화려하고 위대한 작품 뒤에는 항상 화가들이 있었다. 화가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고 우리가 지금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때로는 기쁘고 설레하며서 때로는 우울해하고 분노하면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

 

지금껏 우리는 작가들도 단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위대한 미술의 거장이 아닌 각각의 인간으로 서로를 대하는 순간 화려한 타이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보여준다. 각자의 정체성을 작품에 투영한 방법,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마음, 자신의 진로를 정해가기까지 있었던 일들, 꿋꿋이 지켜냈던 가치관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다보면 어느 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이 세상 모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면 언젠가는 나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이 한 권의 책으로 내가 완성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를 완성해 나가는 방법을 알게 된 느낌이다.

 

 

 

'장미란 선수가 렘브란트의 <34세의 자화상>과 <63세의 자화상> 중 어디에 더 오래 머물렀을까?' 신문을 읽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꽤 진지하게 마주했을 것으로 짐작해 보았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두 점의 그림이 아닌, 그 안에 비친 지금 자신의 현재를 말입니다. 장미란 선수의 경기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은 나의 비겁함을 인정하게 했던 것처럼요.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는, 그래서 남의 모습에서 내 민낯을 자주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 봅니다. - p.54

여행기는 오랜만이었다. 지금껏 책을 읽어오면서 이상하게도 여행기는 자주 읽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여행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그렇게 내가 오랜만에 읽은 여행기는 자유로웠다.

 

책의 저자는 감옥같았던 군대 생활 후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다 난 교통사고. 하지만 뜻밖에도 상대편 운전자가 음주운전 중이었다는 이유로 보험금을 받게 되고 그 돈으로 남미 여행을 떠난다.

 

계속 같이 다니는 친구와 지켜야 할 일정도 없이 마음이 맞으면 그 때 그 때 같이 다니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니며 중간에 강도를 만나 모든 걸 뺏겨도 결국 사람을 통해 도움을 얻어 여행을 계속해 나간다.

 

보통 유명한 관광지 중심으로 진행되는 여행기들과 달리 아메리카 심야특급은 사람이 중심에 있었다. 여행지의 모습을 그려내는 대신에 그 나라 사람들과 그곳에서 만난 다른 여행객들을 그려냈고 그들의 소소한 일상을 꾸밈없이 드러냈다. 책에 실린 사진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두 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진 속에 모두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따뜻하고 친근했다. 번지르르한 말로 그곳과 그곳의 사람들을 포장하지 않아 좋았다. 꼭 내가 그곳에 저자와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추악한 면까지 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저자처럼 혼자 여행을 떠나며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중간에 도둑도 만나보고 예기치 못한 상황가 마주치기도 하며 아슬아슬하게 여행하고도 싶었다. 그러면서 여행의 끝에선 결국 모두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싶다.

 

 

책을 덮으니 저자가 만났던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나도 아라미스를, 마우로를, 아나벨을, 알씨를 만날 수 있을까.

 

처음에 차를 타고 갈 때는 바다 위를 건너는 기분이었는데, 실제로 내려서 뛰어다니니 하늘 위에 놓인 기분이다. 물도 따뜻하고 햇빛에 반사된 물 안으로 구름이 가득하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사막)을 보면, 그 시야가 끝날 때까지 달려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한참을 뛰고 있으면 스스로 구름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고 믿게 된다. 전에 알지 못했던 걸 보는 것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더 놀랍고 신비했다. - p.152, 154

 

책의 노란 표지 속 빨간머리 아이는 유쾌하고 발랄해 보였다. 그래서 책도 마냥 그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펼쳐든 책은 유쾌하고 발랄하면서도 진지하고 무게있는 이야기였다.

 

이 책은 분량에 비해서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른 책이 이 정도 분량이었으면 금방 휘리릭 읽어버렸겠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책의 문장들이 날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핀, 그게 다른 거야. 잘 들어보라구. 사람들은 저마다의 관점, 그러니까 '보는 지점' 또는 '보는 위치'들을 가지고 있잖아. 그치만 미스터 갓은 '봐야 될 지점들'만 가지고 있어." - p. 74

 

'보는 지점'이라는 말은 정해진 자리에서 자기 중심으로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사용될 수 있지만, '봐야 될 지점들'이란 말은 자기중심을 탈피해서 상대방의 입장, 혹은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의 처지에 서서 어떤 대상을 들여다볼 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 p. 75

 

안나는 한마디의 말이라도 의미를 잔뜩 담아 던지는 아이였다. 그 애가 말하는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달콤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기를 돋우며 용기와 격려를 안겨다주는 말이었다. 상대방의 전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애는 '사랑'이라는 말을 썼다. "안나야, 나도 너를 사랑해." - p. 232

 

위의 세 문장들 모두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은 문장들이었다. 그 외에도 더 있지만 우선은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 책의 주인공인 안나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말하고 생각하며 우리에게 더 큰 생각거리를 전해준다.

 

여섯 살의 어린 아이인 안나와 스무 살의 핀이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순수한 안나의 시선과 핀의 시선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화자는 핀이지만 안나의 말들 만으로도 난 안나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안나에게 '미스터 갓'은 자신의 동심, 마음, 모든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느낀 모든 울림은 다 안나가 어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깨끗한 동심과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어른이라도 안나와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나의 물음은 모든 세상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이었기 때문이다. 점점 더 자라나면서 세상을 자신의 관점과 생각이 아닌 오로지 지식들과 고정관념, 타인의 생각으로 바라볼 때 인간은 동심과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물음 하나 던질 시간도 없던 내게, 이 책은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하면서 복잡한 휴식이었다.

 

Hi, 미스터갓,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