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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 장혜령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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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장혜령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21년 07월 01일
  • 쪽수 : 148
  • ISBN : 97889546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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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는 내게 시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앞선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새로이 내며 걷는 일,
‘쓰다’와 ‘기억하다’를 양손에 가만히 쥔 채

장혜령 시인의 첫 시집을 문학동네시인선 156번으로 펴낸다. 작가는 2017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에 선정돼 등단했으며, 이후 산문집과 소설을 먼저 펴냈다. “앞으로도 특정 장르에 속하기보다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라는 작가 프로필의 마지막 문장을 독자에게, 작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처럼 되새기며 마침내 첫 시집을 선보인다. 40편의 시를 5부로 나누어 묶었으며, 각 부 제목에서 시인이 깊이 천착한 지점을 엿볼 수 있다.

출판사 서평

“그는 내게 시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앞선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새로이 내며 걷는 일,
‘쓰다’와 ‘기억하다’를 양손에 가만히 쥔 채

장혜령 시인의 첫 시집을 문학동네시인선 156번으로 펴낸다. 작가는 2017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에 선정돼 등단했으며, 이후 산문집과 소설을 먼저 펴냈다.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은 십 년에 걸쳐 혼자 묵묵히 써온 글들을 묶은 것으로, 소설가 김연수는 이 작품집에 대해 “이로써 그녀는 사랑의 글들을 소유하게 됐다. (…) 회복기에 맞는 바람처럼 은은하고 낯설고 서늘한 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주』는 민주화운동가였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자전적 소설이자, 그러한 아버지들을 담은 시대의 기록이었다. “지금의 르포이고, 지금의 시이고, 지금의 신화”(김혜순 시인)인 이야기였다. “앞으로도 특정 장르에 속하기보다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라는 작가 프로필의 마지막 문장을 독자에게, 작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처럼 되새기며 마침내 첫 시집을 선보인다.

어젯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시를 읽고 있었는데 그것의 마지막 행에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 적혀 있었다. ‘그대는 발자국 없이 눈길을 가는가, 그대는 지워지기 위해 걸어가는가.’ 내 문학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게 시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_「백」에서

40편의 시를 5부로 나누어 묶었다. 부 제목에서 시인이 깊이 천착한 지점을 엿볼 수 있으리라. 우선 1부 ‘받아쓰다, 눈의 언어’와 2부 ‘번역하다, 새의 울음’, 3부 ‘바라보다, 늙은 숲의 심장’에 실린 시들을 통해 쓰는 자의 의무, 기록하는 의미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시집의 서시인 「눈의 손등」을 살펴보자. 이 시는 발을 다친 ‘나’에게 무릎을 다친 ‘남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자’의 친구의 이야기로, 그 친구에게는 병으로 죽은, ‘유키’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유키는 눈(雪)을 뜻하는 일본어이지만 그에게 유키는 ‘Snow’가 아닌 ‘죽음과 아름다움 사이의 것’으로 각인되었을 터. 친구 부부에게는 몇 년 뒤 또다른 딸이 생겼고 그 딸아이가 일본어를 배우며 ‘유’로 시작하는 첫 단어인 ‘유키’를 알게 된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묘한 탄성과 탄식 사이의 한숨을 내뱉게 한다.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으로 이어져 백 년 전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데…… ‘눈의 고장-백지-흰 손의 손등-흰 꽃잎’의 이미지는 꿈속에서 딸을 본 유키의 아버지가 술잔에서 건져낸 ‘꽃잎’이라는 글자를 거쳐, 명동으로 가는 4호선 전철 안,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든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투명한 ‘흰빛’으로 이어지며 마무리된다. 박상수 시인이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혜령의 시쓰기야말로 잃어버린 존재의 귀환을 위해 바쳐진 것으로 보인다. 장혜령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과거의 존재가 문을 두드리고 이쪽으로 건너온다. (…) 두고두고 떠오르면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방식으로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시공간을 과감히 넘나들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직조해낸 풍경들은 읽는 이를 가만히 사로잡는다. 찢고 해체함으로써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는 반면, 이렇듯 오래 바라보고 신중히 모은 부서진 조각들을 자기만의 문장으로 이음으로써 생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이가 있다.

검은 돌은 검은 돌. 검은 돌은 다만 검은 돌이었고, 검은 돌은 아주 작고 가벼운 검은 돌일 뿐이었을 뿐이지만, 검은 돌은 걸어가고자 했고, 걸어가고자 하는 하나의 정신이었으므로, 걸어가고자 하는 것만이 그의 정신이며 또 마음이었으므로, 걸어가고자 하는 돌은 영원히 걸어가고 있었다.
_「검은 돌은 걷는다」에서

4부 ‘꿈을 꾸다, 아버지를 토하는’ 그리고 5부 ‘노래하다, 발이 없는 나의 여인’으로 이어지며 중심 축은 ‘쓰는 일’에서 ‘기억하는 일’로 이동한다. 잊지 않는 일, 두고두고 기억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몰두는 앞선 산문집과 소설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보이지 않고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닌 존재들의 역사, ‘대문자 역사가 아닌 소문자 역사’를 쓰는 것이 시인의 삶에 비중 있게 자리한 과제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시편들이 담겨 있다.

부서지는 골목이 있다
영원히 부서지고 있는 나의 골목, 골목 끝에는
이곳이 미로임을 알아볼 수 없도록
희고 높고 빛나는 교회가 있고

그 속에
신을 가두고 찬송하는
사람들의 밤

아직도 눈감으면
인어의 운명을 지닌 여인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비가 내리고
모든 것이 꿈처럼 흐른다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전부를 껴안아다오

발이 없는
나의 벌거벗은 여인은 노래한다
_「세이렌의 노래」에서

“무수한 생들이 무한히 손을 맞잡은 실루엣”(「후쿠시마에서 인간은 기차처럼 긴 심연 모를 그림자다」)을 돌아보는 일, 자신이 그 역사의 매개자가 되어 묵묵히 써내려가는 일이 그 존재들에 대한, 삶에 대한, 벌어진 일과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 작업을 통해 사적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를 창안해내고자 하는 노력임을, 시인은 이렇게 40편의 시편으로 또 한번 두고두고 남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윤리를 추동하고 진리를 향한 시도를 고양시킨다. 장혜령의 심미주의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 장혜령은 ‘답설무흔(踏雪無痕)’, 즉 앞서 찍힌 희미한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잇대어 길을 내려고 한다. 원래 ‘답설무흔’은 무협소설에 나오는 경공술의 일종으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듯이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로 공중을 날아가는 기예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장혜령에게는 자신의 존재론이자 예술론을 비유적으로 암시하는 말이 된다. “눈이 다 녹기 전에 나는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당신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포개며 걸었다. 당신은 없고 당신은 보이지 않고 오직 이것만이 길이라는 듯”(「새벽의 창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해서 1」)과 같은 문장은 그래서 처연하고 한없이 애틋하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은 쉽게 녹아버릴 테지만 이 무용하고 허무한 걸음이 아니라면 무엇이 당신과 나를 잇고, 무엇이 사랑을 가능케 할까. 당신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겹치며, 우리는 그렇게 장혜령의 시를 읽고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박상수 해설, 「당신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내며 걸었다」에서

목차

시인의 말

1부 받아쓰다, 눈의 언어
눈의 손등 / 백 / 백지는 구두점의 무덤이다 / 눈 한 송이와 눈 한 송이 사이 / 검은 돌은 걷는다 / 모래의 책 / 천 하룻밤의 꿈 / 토성의 고리

2부 번역하다, 새의 울음
번역자 / 비유는 흐르지 않는다 / 새벽의 창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해서 1 / 새벽의 창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해서 2 / 휘파람새 / 앵무 / 불법승 / 이별하는 정오

3부 바라보다, 늙은 숲의 심장
물의 언어 / 물결의 말 / 정원사 / 흰 불 / 청량리 / 쥐불놀이 / 교향시 / 불새의 춤

4부 꿈을 꾸다, 아버지를 토하는
이방인 / 폴림니아 성시 / 파도가 묻다 / 낙하하는 온점 / 어두운 숲의 서커스 / 고해(呱咳) / 겨울밤의 연인 / 은영에게

5부 노래하다, 발이 없는 나의 여인
기도하는 저 손을 / 사과를 그리는 법 / 죽은 꽃이 우리를 지켜본다 / 시리아의 유령들 / 후쿠시마에서 인간은 기차처럼 긴 심연 모를 그림자다 / 나라 없는 사람 / 버려진 여자들이 박쥐가 되어 다시 태어났다 / 세이렌의 노래

해설_당신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내며 걸었다
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본문중에서

자기 자신을 부수면서 쓰는 문장이 있다. 부서지면서 쓰이는 문장이 있다. 그것은 자신보다 오래, 파손의 고통보다도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구두점은 그렇게 믿으며, 온몸으로 자기 자신을 밀어내고, 온힘으로 자기 자신을 통과하며. 거리의 행렬처럼, 행렬에 자신을 내어놓은 거리처럼. 구두점은 구두점으로 이동한다.
_「백지는 구두점의 무덤이다」에서

검은 돌은 고요가 침묵과 다르다는 것을 비에게서 배웠다. 비는 부딪히면서 빛났고 부서지면서 끝없이 말하고 있었다. 비는 냇물이 되어 흘렀고, 흐르는 냇물은 거침이 없었고, 막힘이 없었으며, 자면서도 흘렀고, 흐르면서도 꿈꾸고 있었다.
_「검은 돌은 걷는다」에서

보르헤스는, 오래된 책에는 그 책에 머물렀던 이들의 눈길과 시간이, 그들의 피와 맥박이 깃든다고 한다. 내가 그것 을 펼칠 때, 페이지의 주름마다 숨어 있던 혼들이 함께 책을 읽는다. 책 속 거리에 일몰이 오고 바람이 부는 동안, 내가 빈집의 그네를 흔들며 앉아 있는 동안, 낯선 새 울음소리로 여름밤의 공기가 물결치고, 저멀리 응답처럼, 명멸하는 신호처럼, 그러나 결코 꺼지지 않는 푸른 불처럼, 거울에 빛을 되쏘아 내게로 보내는 누군가 있다.
_「천 하룻밤의 꿈」에서

그날 이후, 오직 선만이 나와 함께였지. 선은 불타면서, 영원히 불타면서 나를 따라왔어. 나는 이제 지도에 없는 땅 을 걷고 있지. 나의 고향은 불타는 날개를 가진 검은 새. 세계의 혀처럼 붉은 선은 언제까지고 나의 뒤를 쫓고 있지. 아니, 내가 바로 그 붉은 선이지. 국경을 넘는 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제 영혼마저 떠나보낸 자를 놓아주지 않는, 그자를 삼켜버린 채 말하고 있는 내가 이 세계의 붉은 선이지.
_「불새의 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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