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두번의 외침을 제외하고는 이전의 왕조들에 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인 치세를 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안정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 청이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주변 이민족들을 억눌러 주면서 조선 역시 이들의 대규모 침입을 우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신 명이 쇠락하고 청으로 교체되자 조선 역시 그 여파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죠. 동아시아의 가장 변방인 일본은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거쳐 인도까지 점령하겠다는 허황된 망상을 꿈꾸지만 만약 그 시기가 백년이나 50년만 빨랐거나 또는 늦었다면 감히 그런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명나라가 왜구의 침략조차 막지 못할 만큼 쇠락해졌다고 판단했기에 그같은 망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평화롭기는 했지만 바꾸어 말해서 외부의 자극이 없다보니 국가 자체가 보수화되죠. 임금과 조정 신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부국강병이 아닌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쏠릴 수 밖에 없었죠. 동시기 전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발달된 관료 시스템은 조선을 번영시킨 장본인임과 동시에 쇠락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관료들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히 하면서 임금을 보필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파벌화됩니다. 이는 명백히 양면성이 있었는데 중국이나 일본, 무굴제국, 유럽 제국가들처럼 국왕이나 또는 국왕의 대리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일은 조선의 시스템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라도 함부로 사치와 항략을 벌이면 당장 삼사의 탄핵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반면, 권력이 분산되면서 사공이 많다보니 특히 국난이 닥쳤을 때 리더쉽이 부재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끝없이 벌입니다. 어느 가문 출신이냐, 고향이 어디냐, 어느 학파냐, 스승이 누구냐로 형성된 파벌은 임금조차 허수아비로 전락시킵니다. 조정이 제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이죠.
소위 "붕당 정치"에 대해 어느 한쪽은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몰락은 다양한 요인이 있으며 붕당 그 자체가 조선이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번의 대내외적인 위기가 있었음에도 500년의 치세가 지속되도록 국가를 안정시킨 요인으로 봐야 합니다. 청제국이나 무굴제국, 오스만제국,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짧은 전성기를 거친 후 무능한 지도자와 소수의 측근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금새 쇠락했다는 점에서 조선과 대비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근래 일부 교수들이 말하는 것처럼 붕당이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막고 서로 견제함으로서 마치 현대의 정당제도와 유사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이 역시 한쪽면만을 강조한 성급한 결론일 뿐입니다. 정당제도는 "상호 상생"이라는 전제 아래 정책을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만, 붕당은 학연, 지연을 배경으로 한 관료사회의 파벌에 불과합니다. 각 파벌들은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 자체가 수많은 이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자 모든 것을 얻느냐, 모든 것을 잃느냐라는 제로섬 게임이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말살하려고 했으며 보복은 보복으로 이어졌습니다. 관료사회는 성리학을 내세워 점점 교조주의화되었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새로운 세력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였습니다. 관료 개개인들 역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복지부동, 무사안일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정책 하나조차 결정하려면 각 파벌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많은 논쟁을 소모적으로 반복해야 했고 수년에서 수십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변 상황의 급변이나 위기에 둔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사란 한쪽면만 보아서는 안되며 항상 양면성을 모두 보아야 합니다.
"조선임금 잔혹사"는 태조부터 순조까지의 역대 임금들이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관료들과 어떻게 힘 겨루기를 했는가를 다룬 책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왕으로 선택된 자, 왕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운 좋게 왕이 된 자, 왕이었지만 몰락한 자,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되지 못한 자 네 가지로 구분하여 이른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임금의 자리가 얼마나 고달프고 가시방석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딱딱하기 쉬운 주제임에도 실록이나 역사서의 대목을 그대로 가져와 내용을 불필요하게 난해하게 만드는 다른 책들과 달리, 관련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나 학생들이 읽어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습니다. 저자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출신의 젊은 여성 칼럼리스트라는데 필력도 상당한데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왠만한 전문가 못지 않게 해박합니다. 특히 책 중간중간에 "토막상식"이라며 당대의 관직, 당쟁의 실태, 붕당의 계보 등도 재미있는 읽을 거리입니다.
서로 파벌 싸움을 벌였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임금 역시 관료들에게 밀리면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그렇다고 관료들을 억지로 누르려고만 하면 반정이 일어나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밀당이 중요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피를 부르는 사화와 옥사, 환국의 반복으로 이어져 말기에 오면 임금과 관료 사회 양쪽 모두 몰락하게 되죠. 더욱이 세자는 법적으로 왕위 계승권 1순위였음에도 현실적으로 임금과 관료 사이에 끼여 목숨마저 위협받기 일쑤였습니다. 뒤주에 갖혀 8일만에 아사했던 사도세자는 가장 비극적인 결과였지만 광해군 역시 간신히 왕위는 물려받았지만 자신을 옹립한 대북파의 전횡과 反대북파 파벌싸움 속에서 결국 몰락하게 되죠. 설령 반정이 일어나지 않아도 세자로 책봉받아 임금이 되었지만 제대로 천수를 누리거나 후사를 남긴 이가 거의 없다고 하니 그 자리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대표적으로 문종, 예종, 경종) 오히려 세종이나 선조, 인조, 영조처럼 태어날 때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전혀 멀었지만 재수 좋게 왕위를 물려받은 이들이 훨씬 오래 살면서 후사 또한 많이 남겼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한 흥미 위주의 교양서적이기에, 조선사에 충분히 해박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역시 매니아들에게는 그다지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평소 조선시대 사극을 즐겨 보면서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학생에게는 아주 흥미로우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왜 순조 이후의 임금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는가는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또한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받은 이보다 운 좋게 왕이 된 사람이 더 오래 살았다"는 저자의 말은 적어도 강화도의 나뭇꾼 도령 철종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듯 합니다. 술과 여색에 빠져 겨우 32살에 죽었으니. 하긴 평소 여자 구경하기도 어려운 벽촌에 살다가 대궐에서 온갖 미녀들에게 둘러싸이니 오죽했겠습니까만. 나뭇꾼으로 곤궁하게 천수를 누리는 쪽과, 임금으로 짧고 굵게 사는 쪽 어느 쪽이 나은가는 가치관의 문제이겠죠.
예전에 "옥탑방 왕세자"인가 하는 타임슬립 로맨스 드라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주인공 왕세자로서는 그 시절로 돌아가 임금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옥탑방에서 평범하게 사는게 마음은 훨씬 편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권력이 달콤한 독이라는 진리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청문회나 선거 과정에서 온갖 망신만 당하고 결국 낙마하는 이들이 태반임에도 서로 그 자리에 앉아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 보면 권력이라는게 달콤하기는 달콤한가 봅니다. 그런 이들이 막상 주변인들에게는 정치는 진흙탕이라며 "절대 정치에 발 들이지 말라"라고 말하지만요. 정치를 해서 다행이다, 정치가 즐겁다 라고 말하는 이는 여지껏 한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뭐, 코메디라고 말한 사람은 보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