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상에 정말 나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사전적인 의미로 어떤 사람을 완전히 나쁘다라고 말하긴 좀 어렵겠지만 전체적인 성향이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죄책감도 없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매스컴이나 신문지면에서가 아닌 현실의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나 관계 속에서 생긴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다가 정작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어 나와 가족을 위협하고, 나를 감시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요? 정말 찝찝하고 짜증나고, 무섭기도 할 테고...만감이 교차하네요.

 

마에카와 유타카라는 작가가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크리피>라는 작품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심 중 어떤 물리적인 가학상태 보다는 위와 같은 주변인에 의한 심리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공포 심리를 활용해 조정한다는 고도의 심리술에 대해서도 십분활용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 솔직히 긍정할 수 밖에 없는 면이 많습니다. 사람은 대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지만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사항에 처하면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모순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50명의 포로를 총을 든 한 명의 병사가 지키는 경우와 같습니다. 힘으로만 하면 충분히 50명이 1명을 제압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50명 중 한명이라도 저항하는 과정에서 총을 맞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50명은 모두 아무짓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50명이지만 그 총을 내가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희대의 악인이 하는 방법도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조종하는 마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서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이웃이라는 점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손톱 밑에 밖힌 가시처럼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닙니다. 재미있게 읽었으되 읽고 나서 찝찝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 소설이네요.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제15회 일본 미스테리 문학대상 신인상 수상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아주 구성이나 내용, 공포상황 무대조성 등 여러면에서 몰입도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다만 바라건대 제발 이런 일이 소설 속에서만 묻혀 있고 세상에는 절대 나오지 않았으면 할 뿐이네요.

크리피, 이웃, 납치, 실종, 경시청

전 정말 솔직히 매우 놀랐습니다. 사실 도진기 작가의 <붉은 집 살인사건>과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읽고 나서도(안타깝게도 유다의 별을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매우 놀랐기 때문에 이번에는 별로 놀라지 않으려 했는데 정말 작가의 역량이 내가 상상한 범위를 뛰어 넘고 있어 크게 놀란 것이 사실입니다.

 

제목에도 썼듯이 이제 한국에는 도진기 작가가 있습니다. 굳이 '한국 추리소설에는' 이라는 말을 일부러 쓰지 않았습니다. 굳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묶을 필요도 없이 이 작품은 정말 걸작이고, 작가의 필력이 이제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결코 추리소설의 불모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출간되고, 점차 독자층이 넓어진다면 추리소설이 국내의 주류 장르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류 드라마가 아니라 한류 추리소설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기존 두 작품과 이 작품의 차이가 있다면 확연히 성장한 스토리 라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 두 작품의 스토리 라인 역시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토리 자체가 현재 발생한 살인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처럼 느껴졌다면 이 작품은 도리어 잘 짜여진 영화같은 스토리가 작품 전면에 부각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작품이 추리와 드라마가 8대 2 정도 였다면 이번 작품은 추리와 드라마가 4대 6 정도로 분포된 느낌입니다.

 

'그럼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추리소설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들어진 트릭을 가지고 있는 본격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순수한 본격 미스테리 작가들은 트릭에 열광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이나 구성원 간의 갈등을 촉발한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어떤 살인사건의 무대를 설정해 놓고 살인자의 살인트릭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멋진 트릭을 만들어내는데에 치중했습니다. 당연히 범인의 트릭을 뛰어난 두뇌(보통 외모는 형편없지만...)와 추리로 깨버리는 명탐정도 덩달아 인기 캐릭터가 되었죠.

 

하지만 시대는 갈수록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추리소설도 그 동안 많이 변화했습니다. 사건자체보다는 왜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논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이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다양한 장르와 콜라보레이션을 이룬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본격 미스테리는 약간의 성형만 했을 뿐 도처에 살아 있습니다. 바로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 한국 추리소설에서 본격 미스테리를 가장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작품 역시 아주 뛰어난 트릭이 존재합니다. 이번엔 물리적인 트릭은 당연히 아닙니다만 아마도 읽는 독자 역시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트릭 구사력에 크게 감탄할 거라 자신합니다. 이 정도 트릭은 추리소설의 메카로 자리잡은 일본의 여느 작품들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빛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뛰어난 캐릭터상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개성이 없으면 그 소설은 설 익은 밥과 같을 것입니다. 누가 누군지도 기억도 안나고 그러면 몰입이 될 수가 없겠죠. 하지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마치 영화를 본 것 처럼 또렷이 제 머릿 속에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젠 국민탐정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성장한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국민조수 '이유현'이 멋지게 제자리를 잡아 줌으로 해서 이 시리즈가 장수할 것임을 예고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다 읽고(적은 양이 아닌데 하루에 다 읽어 버렸습니다) 앞으로 국내 추리소설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애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토종 명작을 정말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열정과 낭만, 순수와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 80~90년대에 발생한 소꿉장난 같은 달리기 시합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자 여러분! 책장을 넘깁시다.

도진기, 달리기, 친구, 결혼, 사랑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읽었을 때보다는 이질감은 확실히 적었습니다. 본연의 추리소설에 확실히 근접한 모습. 신선하기도 하고, 천편일률적이지 않는 내용도 상당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생각 자체가 정상인의 범주에서 살짝 벗어난 작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품자체가 약간 사이코적이면서도 특이한 느낌이 있습니다. 추리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사이코 스릴러의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히메카와 료의 어두운 과거사와 현재의 모습이 교차투영하며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갑자기 과거로 불쑥 이동하다 다시 현재로 턴하는 방식은 상당히 신선해 보이고 책을 읽는 속도의 스피드를 올려줍니다. 이런 방식은 사실 여러 소설에서 써먹은 방식을 좀더 업그레이든 한 기분인데 읽을 때마다 먹혀들어가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게다가 현재에도 무슨일이? 과거의 일과 현재의 사건은 과연 연관이 있는거야? 범인은? 이거 너무 뻔한데? 어? 어? 아니네???

 

이런 반전이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에필로그까지 끝까지 읽어야 이 소설의 진정한 결말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랫맨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알았구요. 수작입니다.

랫맨, 미치오슈스케, 추리소설, 밴드,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