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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아 시집 『오프너』는 크게 4부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으며 〈큐브〉, 〈슬픈 시그널〉, 〈미모사〉, 〈나는 형질이 다른 두 개의 슬픔을 발견한다〉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최승아 시인의『오프너』는 문 앞에 선 ‘주체’와 문 너머에서 문고리를 단단히 쥔 타자他者의 세계를 그려낸다. 주체가 마주한 ‘문’은 의식의 안과 밖, 기억과 착란의 경계에 나 있다. 주체는 ‘열린 문’을 통해 타자의 세계에 진입해 들어가며 비일상적 시계視界와 기꺼이 마주한다. 그것은 주체의 “젖은 발이 꿈속으로 말려들어”(「광대들」) 가는 순간이며 “그만 나를 놓쳐 버리는” ‘지극히 사소하고도 몽환적인’(「지극히 사소한 혹은 몽환적인」) 비일상의 사건이다. 타자의 세계는 지극히 타자로부터 온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은 주체의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기억은 언제나 문안에 있다. 금이 간 거울은 문 너머에 있다.

[ 시인의 말 ]

상처는 상처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나의 시는
낮은 곳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날갯짓이다

2019년
최승아

최세운(시인)
시인이 흙을 파내면서 갈구하는 것은 죽음에서 오는 깊은 죄의식과 대속에 대한 강렬한 바람이다. 죽음에 깊이 천착할 때 죽음은 사라진다. 십자가에 걸린 죽음을 통해 죽음은 소거되는 것이다. 죽음을 전복하고자 하는 ‘피멍 든 손톱’은 시인이 할 수 있는 맹렬한 노크이자 손을 내밀어 구원을 바라는 구도의 자세이다. 시인은 단지 두드릴 뿐이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타자의 세계를 기다린다.

● 시인의 말

제1부

큐브 ----- 12
슬픈 시그널 ----- 14
미모사 ----- 15
나는 형질이 다른 두 개의 슬픔을 발견한다 ---- 16
오후의 노숙 ----- 17
한밤의 몽유 ----- 18
룸 ----- 20
지극히 사소한 혹은 몽환적인 ----- 22
광대들 ----- 23
이름 ----- 24
개안開眼 ----- 26
야경 ----- 27
스파이더맨 ----- 28

제2부

환승역으로 가는 무빙워크 ----- 32
오프너 ----- 34
낙원상가 ----- 36
안개조감도 ----- 37
건널목 ----- 38
감염 ----- 39
룸메이트 ----- 40
폭주 ----- 41
희망상영관 ----- 42
공원묘지 ----- 44
로드킬에 대한 ----- 46
지우다, 지워진다 ----- 47
긴 잠 ----- 48

제3부

요일들 ----- 52
웜홀 ----- 54
늪 ----- 56
데자뷔 ----- 58
열쇠 ----- 59
퇴로 ----- 60
플레인 요구르트 ----- 62
꿈꾸는 요양원 ----- 64
안개 ----- 66
월곡댁 임순 씨 ----- 68
화덕 ----- 70
봄꽃수족관 ----- 72

제4부

문 ----- 74
모라벡의 역설 ----- 76
모형집 ----- 77
짜깁기 ----- 78
결로 ----- 79
환상수족관 ----- 80
수취인 ----- 81
해피엔딩 ----- 82
방문객 ----- 83
인디언서머 ----- 84
왜가리 ----- 85
말아톤 ----- 86
이암 ----- 88

▨ 최승아의 시세계 | 최세운 ----- 93

[ 대표시 ]

오프너

닭은 마당 한 귀퉁이
수도계량기통에 빠져 죽었다
벼슬이 막 자라기 시작한
닭을 묻으러
마당을 파는 동안
한 뼘의 생략된 주검에서
검은 물이 뚝뚝 흘렀다
어린 닭의 이불은 침묵일까
불안을 파헤치자 의심은
흙을 파는 내내 흘러나왔다
담장이 무너질 거라는
옆집 외순이 엄마의 외침 따위는
귀 밖으로 흘릴 만큼
우리는 조숙했다
죽음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매일
잠꼬대처럼 들려왔다
동생과 나는 그 끔찍함을
은폐하려 십자가를 찾았다
피멍 든 손톱으로
마당을 파고 또 팠지만
십자가는 재연되지 않았다
큐브

첫 번째 방문을 노크한다
방에는 서랍이 굳게 닫혀 있고 콘솔 위에는 소리 없이 촛불이 타고 있다

두 번째 방문을 노크한다
함박눈이 쌓인 침대엔 그들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거울은 미동이 없다

세 번째 방문을 노크한다
가끔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벽을 더듬는다 벽에 걸린 ‘피레네의 성’이 조금씩 침식될지 모를 일이다

네 번째 방문을 노크한다
그를 노크한 순간 태어난 광기, 그는 낮은 곳으로만 기어다니는 벌레가 된다 밀폐된 방엔 비밀이 누설되고 있다

다섯 번째 방문을 노크한다
매일 밤 조금씩 그를 갉아먹는 벼랑, 그쪽으로 다가간 것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악몽은 달을 품고 있는 내내 계속된다 달은 낳을 때마다 사산된다

여섯 번째 방문을 노크한다
그는 끝내 열리지 않는다
플레인 요구르트

엄마가 밤새
내 머리를 휘휘 젓고 있다

나무주걱을 들고
윗목에서 아랫목으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휘저을 때마다
발육이 더딘 나는
자주 경기를 했다

경기에서 깨는 날이면
나는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불면은 길어졌다

발효가 늦는다는 건
무취의 날 또한 길어진다는 것

섞이는 일에 서툰 내가
제 빛깔을 잃자
뜨거워질 수 없는 방이 차갑게
나를 분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