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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 동국십팔선정 : 한국 대유학자 18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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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학십도 동국십팔선정』은 퇴계 이황이 죽기 2년 전인 68세 때 선조에게 바친글로 성리학을 10장의 그림과 함께 풀어쓴 <성학십도>와 한국의 대유학자 18인을 소개한 <동국십팔선선정>을 함께 묶었다.

출판사 서평

개 요

‘성학십도’는 태극도(太極圖)를 시작으로 심성을 다스리는 10개의 도(圖)와 설을 작성한 상소문이다. 선조(宣祖)가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황 선생이 올린 내용이다. ‘동국십팔선정’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대유학자 18명의 발자취를 나열했다.

“하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말하고, 어진 이를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말하며, 악(惡)에 빠지는 것을 재주스럽지 못한 것이라 하며, 하늘로부터 받은 모습 그대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효성이 지극한 어진 사람이라고 한다. 성인의 도덕으로 변화할 줄을 알면 부조(父祖)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하늘의 신비로운 이치를 깨달으면 부모가 의도하는 뜻을 잘 계승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보지 않는 데서도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는 효자이며, 또한 그 본심을 지켜 본성을 기르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고, 효도를 다할 것이다.” (본문 가운데에서)

서 문

『성학십도(聖學十圖)』 란 어떤 책인가?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죽기 2년 전인 68세 때 작성해 어린 왕 선조에게 바친 글이다. 이황은 젊은 시절 학문에 전념하다 병을 얻은 이후 평생 병고에 시달렸다.
이황이 번번이 벼슬을 사양한 것은 명종 시절 훈구파가 득세하는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몸이 병약했던 것도 상당한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후에도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다가 신왕에 대한 노신(老臣)의 마지막 충절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집필해 바친 것이 바로 『성학십도(聖學十圖)』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학(聖學)’은 곧 ‘유학(儒學)’을 의미하고 유학 중에서도 ‘성리학(性理學)’을 의미한다.
유학 내지 성리학을 성학이라 하는 것은 이 학문이 ‘성인의 길에 이르는 학문’이라는 사상 때문이다.
이것이 임금에게 적용될 때는 ‘성왕(聖王)이 되는 학문’이 되는 것이었다.
이황은 선조가 이 성학을 체득케 함으로써 성왕이 되고 도학정치를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를 저술했는데 당시 선조는 16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려운 성리학을 10장의 그림과 함께 자세히 풀어 설명한 글이었다.
『성학십도』의 구조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가 있는데 도(圖) 옆에는 각 도마다 도설(圖說) 이 있고 각 도설의 뒤에는 이황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성학십도』는 당시 성리학을 총결산하는 의미가 있었던 만큼 모두 이황이 쓴 것은 아니고 조선과 중국의 성리학 대가들의 글과 그림, 그리고 자신의 글과 그림을 적절히 섞어 작성한 것이다.
제1도는 도(圖)와 도설(圖說)이 모두 주돈이(周敦이)가 지은 것이며, 제2도의 서명은 장재(張載)의 글이며 도는 임은 정씨(林隱程氏:復心)가 그린 것이다.
제3도의 제사는 주희(朱熹:주자)의 글이며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의 본문은 『대학경문(大學經文)』의 전체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의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그림은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와 도설은 임은 정씨의 저작이며 중, 하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의 도 및 도설은 모두 주희가 지은 것이고, 제8도의 도 및 도설은 모두 임은 정씨가 지은 것이며, 제9도의 잠은 주희, 도는 왕노재(王魯齋)가 지은 것이다. 제10도의 잠은 진남당(陳南塘),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이 책은 당시까지 논의되고 연구되었던 성리학의 우주론과 심성론, 그리고 수양론이 도해와 해설을 통해 놀랄 만큼 압축되어 서술되어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직접 지은 저작과 선현들이 지은 것을 섞어서 작성한 『성학십도』는 성인(聖人)이 되는 유학(儒學)의 기본 정수를 뽑은 것으로 어린 임금인 선조(宣祖)가 성군(聖君)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신하로써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올린 것이다.
그의 정성어린 내용이 11장에 담겨 있다.


동국십팔선정(東國十八先正)이란 무엇인가?
동국십팔선정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유학의 연원(淵源)을 잊고 성균관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대유학자 18명을 일컫는 말이다.

성균관의 문묘는 공자를 받드는 묘우(廟宇: 사당)이다.
그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배향(配享)하고, 공문십철(孔門十哲)인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伯牛) 중궁(仲弓)[덕행이 뛰어났음], 재아(宰我) 자공(子貢)[말솜씨가 뛰어났음], 염유(?有) 자로(子路: 季路)[정치를 잘하였음], 자유(子遊) 자하(子夏)[문학에 뛰어났음]와 송조6현(宋朝六賢)인 주돈이(周敦?),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 소옹(邵雍), 주희(朱熹)와 우리나라의 명현 18명을 종사(從祀: 더불어 제사지냄)했다.
이는 유학자들과 태학생(太學生: 성균관 유생)들의 사표로 삼기 위한 것이다.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각 향교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묘의 구조는 대성전을 정전(正殿)으로 하고 그 아래 하단에 동무(東무) 서무(西무) 제기고(祭器庫) 묘정비각(廟廷碑閣) 신삼문(神三門) 동삼문(東三門) 수복청(守僕廳) 전사청(典祀廳: 제사를 관리하는 곳)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묘를 세운 시기는 통일신라 성덕왕 13년(714년)에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면서 공자와 공문10철, 그리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와 왕명에 따라 국학(國學)에 그 초상들을 걸어두면서부터다.
조선조에서는 공자를 중앙의 정위(正位)로 하여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 등 4성(四聖)과 공문십철, 송조6현을 대성전(大成殿)의 좌우에 배열 배향하고 동무(東?)와 서무(西?)에 각각 중국 명현 47위와 우리나라 명현 9위씩 18위를 종사하였다.
광복 후인 1949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동무와 서무에 배향한 중국 명현의 위판을 떼어내고 우리나라의 명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승당(陞堂: 당에 오르게 함)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유학자 중에는 신라의 최치원이 고려 현종 11년(1020년)에 처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설총이 종사되었다.
충숙왕 6년인 1319년에는 안유[安珦]가 종사되었으며 안유 이후로 고려 때에는 더 이상의 문묘종사자가 없었다.
문묘종사는 고려 때보다 조선 때 와서 그 중요성이 더해졌다. 조선은 유학, 그중에서도 성리학(性理學)을 개국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공자 및 주희와 더불어 제사를 지내는 인물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이나 집안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정치 집단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문묘종사는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 명분을 갖는 행위였다.
이 문묘종사를 입증하고 그것을 이용한 세력은 조선 초기의 사림(士林)들이었다.
사림은 고려 후기의 사대부 가운데 온건개혁파들을 학문과 사상면에서 계승한 세력이다.
고려 말기에 사대부는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역성혁명파와 정몽주, 길재로 대표되는 온건개혁파로 나뉘어졌는데, 역성혁명파는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을 주장한 세력이고, 온건개혁파는 고려 왕실 자체는 존속시킨 채 고려사회 내부를 개혁하자고 주장하는, 즉 새 왕조를 세우는 데에는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온건개혁파는 역성혁명에 참여하지 않았고 조선 초기에는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고향에 은거하여 학문에 힘쓰면서 농촌사회를 장악하려 하였다.
한편 조선 왕조의 개창에 참여한 역성혁명파는 개국 공신으로서 정국을 이끌었는데 세조 때에 이르러 세조의 왕위찬탈을 도와 거듭 공을 세우고 그로 인해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이 세력을 훈구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고위 관직과 대농장을 전유(專有)하면서 갖은 불법을 저질렀다.
따라서 왕을 비롯한 사회 일반에서는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정치세력이 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나선 것이 사림파였는데, 이들은 훈구파의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개혁정치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사림파가 부패한 훈구파에 대해 정치적, 학문적, 이념적으로 우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착안한 것이 바로 문묘종사운동이었다.
사림파는 고려 말의 정몽주에서 시작하여 그 학문이 길재에게 전해졌고,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金叔滋)와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 그리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들로 이어지는 학통(學統)을 지니고 있었다.
사림파는 자신들의 학문적 스승들을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정치적, 학문적 정통성의 근거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림들이 문묘종사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때는 16세기 중종 때였다. 이때 조광조(趙光朝)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은 도학정치(道學政治)와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적극 펼쳤는데 이러한 정치이념에 대한 정당성을 공인받는 수단으로써 문묘종사운동을 폈던 것이다.
즉 조광조는 훈구파의 부패와 전횡을 비판하면서 정몽주와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여 자신이 펼치고 있는 개혁정치의 정당성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훈구파는 조광조 및 사림파의 문묘종사운동에 이런 정치적 목적이 개재되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문묘종사운동은 당연히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쟁의 대상이 되었다. 신흥정치세력인 사림파는 훈구파보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데다 훈구파의 공격으로 잇단 사화(士禍)까지 당하는 것으로써 험난한 길을 걸었다.
중종 때 사림들이 문묘종사를 주장한 인물은 정몽주와 김굉필이었다. 중종 12년(1517년) 8월 성균관 생원 권전(權銓)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문묘종사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림의 일파였던 권전은 이 상소에서 정몽주는 유학을 크게 일으켜 후학에게 전해준 공로가 있고, 김굉필은 정몽주의 계통을 이어 경학을 존중하고 이단을 배척함으로써 풍속을 개선하고 사습(士習)을 개신한 공로가 있으므로 문묘에 종사해 그 뜻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훈구파의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론은 정몽주보다는 당시 훈구파의 부패에 맞서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있던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게 집중되었다.

문묘종사 반대론의 입장에 선 사관(史官)의 평가를 들어보자.

… 그 뜻은 굉필을 종사하게 하고 그것을 빙자하여 당(黨)을 세우자는 데 있었는데 굉필만을 들추면 사람들이 믿고 좇지 않을 것이므로 부득이 몽주를 아울러 들춘 것이요, 처음부터 몽주를 위하여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다. (중종실록 권29, 중종 12년 8월)

이처럼 훈구파는 문묘종사가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을 종사함으로써 사림의 개혁정치에 명분을 부여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대했던 것이다.
훈구파는 사림파의 목적이 정몽주보다는 김굉필에게 있다는 것을 간파했으므로 정몽주와 김굉필을 따로 떼어 대응하는 것으로 이에 맞섰다. 즉 정몽주의 문묘종사는 찬성하고 김굉필의 종사는 반대하는 식이다.
훈구파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며 내세운 이유는 김굉필이 자신의 학문 이론이나 저술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것 말고는 문묘에 종사할 만큼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지도 않고 정치적 공헌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중종 12년 9월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사림파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김굉필에 대한 문묘종사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림들은 그 대안의 하나로 서원을 설립하여 이들을 제향해야 한다는 것으로 방침을 수정했다.
이런 목적으로 설립된 서원은 이황(李滉)에 의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서 사액(賜額)을 받아 국가의 공인을 받음으로써 매우 빠르게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명종대를 거쳐 선조대에 이르면 훈구파가 상당수 퇴진하고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속속 진출하면서 문묘종사운동도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때는 김굉필과 정여창 이외에 이언적과 조광조가 문묘종사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 때 이들 4현(김굉필ㆍ정여창ㆍ이언적ㆍ조광조)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살펴보자.

바라옵건대 진정한 유학자인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높이고 장려하여 문묘에 종사케 함으로써 선비를 향하는 마음을 밝히고 원기를 기르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국가가 기묘사화1) 이후에 또 을사의 화2)를 거치면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 사기가 꺾여 학문할 때도 늘 회의하고 두려워합니다 … 전하께서는 다시 도를 중히 여기는 정성을 더하고, 유학자를 높이는 예를 더욱 융성하게 하여 사신(四臣)으로써 문묘에 종사케 하는 것을 허락하여 … [『선조실록』 선조 3년 4월 경신조(庚申條)]

이와 같이 사림들은 이들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성리학이라는 국시를 확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이미 문묘에 종사되어 있는 이들과 4현을 비교하여 종사의 정당성을 설파하기까지 하였다.

… 최치원ㆍ설총ㆍ안유 같은 이들은 혹은 문장으로써 한때를 노래하고(최치원을 뜻함: 필자 주. 이하 같음), 혹은 방언으로써 구경을 해석하고(설총을 뜻함), 혹은 학교에 공이 있었을 따름(안유를 뜻함)인데도 저처럼 배향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4현은 도를 지키어 후학을 연 공이 있음에도 종사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聖代)의 결전(缺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조실록』 3년 4월 임술조(壬戌條)]

이 상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림파는 자신들이 종사를 주장하는 4현이 이미 문묘에 종사된 최치원ㆍ설총ㆍ안유보다 훨씬 더 공이 있다는 비교 논리까지 끌어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 4현이 문묘에 종사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전히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훈구파의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대부분 사화 때 화를 당함으로써 이들의 학문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반대 이유 중의 하나였다. 문묘종사에 앞서 이들의 흩어진 글을 모아 수록한 『선유록(先儒錄)』이 간행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또한 김굉필ㆍ정여창ㆍ이언적ㆍ조광조, 4현 외에 서경덕과 이황의 문도들은 이들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서경덕은 그의 학문적 문제 때문에 그 불가한 것이 공론화되어 좌절된 반면 이황의 종사는 끈질기게 주장되어 이후에는 5현종사운동(五賢從祀運動)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문묘종사는 쉽지 않아 사림들은 경우에 따라 조광조만의 종사를 주장하거나 2현(二賢)만의 종사를 주장하기도 하면서 다양하고 끈질기게 문묘종사를 주장했다.
선조 37년에 5현종사가 주장되다가 좌절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 광해군 2년에 조정의 논의를 거쳐 드디어 문묘종사가 결정되었다.

이처럼 많은 논란 끝에 5현이 종사됨으로써 우리나라 선유들의 문묘종사는 점점 그 수가 늘어갔다. 광해군 이전의 문묘종사가 이를 관철시키려는 사림과 훈구와의 문제였다면 사림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대개 당파의 입장에 따라 종사가 결정되었다.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 주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인조 때 서울 밖에 사는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주장하자 남인들이 많이 사는 영남 유생들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줄줄이 올렸는데 그 논리가 “이이는 젊은 날 입산해 머리를 깎았으니 명교(名敎)에 흠이 있고, 성혼은 임진왜란 때 임금과 나라를 저버렸으며, 사류를 음해(陰害)해 죽였으니 불가하옵니다.” 라는 것이었다.
즉 이이는 젊은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빠졌던 일을 들어 반대한 것이고,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파천할 때 호종하지 않은 일과 정여립(鄭汝立)의 반란 사건 때 정철과 함께 동인(東人)들을 제거했던 일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에 서인들은 영남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을 무고한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인조가 “그 두 신하(이이와 성혼)의 흠이야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다.” 라는 전교를 내렸다는 것이다.(『당의통략』, 1912년, 조선광문회 발간, 14쪽 참조.)
성혼의 경우 당파의 입장에 따라 문묘종사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그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한 후 출향되었고 갑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배향되는 등 정권의 향배에 따라 배향→출향→재배향이 거듭되는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묘종사가 정권의 향배에 따라 결정됨으로써 상당한 부작용이 뒤따랐는데 그중 가장 커다란 부작용이 서인과 노론의 일당독재에 따른 종사 인물의 편재였다.
초기의 5현 종사 때 일괄 종사된 이황을 빼면 서인 일색이란 점이다. 물론 문묘에 종사된 18명이 모두 우리나라 유학사상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 유학이 진정으로 다시 발전을 꾀하고자 한다면 문묘에 배향되지 못한 선현들 가운데 문묘에 배향 받은 선현들 못지않은 학문의 소유자나 유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친 인물들을 발굴해 내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목차

『성학십도(聖學十圖)』란 어떤 책인가?

제1권 성학십도(聖學十圖)

제1장 태극도(太極圖)/13
1. 태극도설(太極圖說)
가. 주자의 해설
나. 퇴계의 해설

제2장 서명도(西銘圖)
1. 서명도설(西銘圖說)
가. 주자의 해설
나. 구산 양씨(龜山楊氏)의 해설
다. 쌍봉 요씨(雙峰饒氏)의 해설
라. 퇴계의 해설

제3장 소학도(小學圖)
1. 소학도설(小學圖說)
가. 주자의 해설
나. 퇴계의 해설

제4장 대학도(大學圖)
1. 대학도설(大學圖說)
가. 주자의 해설
나. 퇴계의 해설

제5장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1. 백록동동규후서(白鹿洞洞規後敍)
가. 퇴계의 해설

제6장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1.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
가. 퇴계의 해설

제7장 인설도(仁說圖)
1. 인설도설(仁說圖說)
가. 퇴계의 해설

제8장 심학도(心學圖)
1. 심학도설(心學圖說)
가. 퇴계의 해설

제9장 경재잠도(敬齋箴圖)
1. 경재잠도설(敬齋箴圖說)
가. 주자의 해설 …/83
나. 임천 오씨(臨川吳氏)의 해설
다. 서산 진씨(西山眞氏)의 해설
라. 퇴계의 해설

제10장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
1. 숙흥야매잠도설(夙興夜寐箴圖說)
가. 퇴계의 해설

제11장 진성학십도차(進聖學十圖箚)


제2권 동국십팔선정(東國十八先正)

『동국십팔선정(東國十八先正)』이란 무엇인가?
1.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2.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3.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裕)
4.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5.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6.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7.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8.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9.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
10.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11.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12.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13.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14.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15.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16.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17.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18.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저자소개

이황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경북 예안 사람으로 주희를 사숙하였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독자적인 퇴계학의 학풍을 열었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퇴계가 주장한 독자적인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한국 성리학의 독창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사상은 이후 일본 근대 유학의 발달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성학십도', '송계원명리학통록', '자성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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