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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따뜻한 한 편의 동화같은 <초콜릿>이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맛있는 영화의 원작자인 조안 해리스. 그녀의 신작인 <젠틀맨 & 플레이어>는 크레킷 혹은 체스의 선수를 계급으로 나눈 말이라고 하니 제목만으로도 초콜릿과는 상반되는 매력을 지닌 작품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1장: 폰 (Pawn)

자신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고귀하고 특별한 또래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세인트오즈월드의 진입로에 놓인 ‘무단출입금지’ 팻말. 아이는 수많은 경고와 당부에도 사과를 따 먹은 이브처럼,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상자를 연 판도라처럼 마침내 그 팻말 너머의 세상에 들어서기로 한다. 한 두 칸씩만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약한 존재이나 나중에는 퀸으로까지 승급이 가능하며, 방향은 후퇴 없이 전진만 할 수 있는 체스 말, 폰처럼 조금씩 세인트오즈월드로의 걸음을 옮기며 아이는 그들이 만든 규칙과, 그들이 그어 놓은 수많은 선들을 부수고 뛰어넘어 그들과 동등해지기를 다짐한다.

....나는 그 순간 세인트오즈월드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세인트오즈월드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내가 세인트오즈월드를 접수하겠어.

2장: 킹 (King)

아이는 성인이 되었다. 세인트오즈월드의 수위인 아버지 존 스나이더의 열쇠 꾸러미를 훔쳐 학교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것도 모자라 교복을 훔쳐 입고 수업까지 참여했던 아이는 어느 날 ‘리언’이라는 반항아를 친구로 사귀게 된다. 속사정은 일단 여기까지! 리플리가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위조한 아이는 이제 어엿한 세인트오즈월드의 교사이다. 근본적 복수의 목표인 라틴어 교사 스트레이틀리는 이 게임의 승패를 가르는 체스 말, 킹이다. 아이는 단숨에 이 곳의 역사이자 전통을 상징하는 그를 쓰러트려 단숨에 게임을 끝낼 수도 있지만 이 모든 상황을 좀 더 즐기기로 한다.

...세인트오즈월드가 무너지는 날, 로이 스트레이틀리도 그곳에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3장: 나이트 (Knight)

체스 말 중 유일하게 다른 말 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나이트. 아이는 복수를 시작하였지만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법이 없다. 그의 충실한 나이트들이 세인트오즈월드의 상식선을 뛰어넘으며 소동을 일으키고 있고 수습을 위해 허둥지둥대는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다. 어린 시절 ‘리언’과 보낸 반항기 가득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나는 샴페인으로 나의 첫 주를 자축했다. 물론 아직은 포기 단계지만 그대로 이미 독의 씨앗을 제법 많이 퍼뜨려놓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4장: 앙파상 (En Passant)

폰이 폰을 잡기 위한 특수한 움직임을 뜻하는 앙파상. 복수의 대상은 아니지만 눈에 거슬리는 학생과 전산 방화벽, 신문기고 등 아이의 계획은 소소한 것부터 예상 밖의 것까지 무엇하나 완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5장: 체크 (Check)

체스의 으뜸 말, 킹. 상대의 킹 말이 잡힐 상황이 되는 것을 흔히 In Check이라 한다. 세인트오즈월드의 조용한 중심부이자 복수의 주요대상인 스트레이틀리의 위기다! 그는 아이의 철저한 계획에 말려들었다.

그를 없애야 하다니 정말 유감이지만, 내 아버지식으로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는 법이다.

6장: 비숍 (Bishop)

아이는 철저히 계산된 차가운 복수의 원인이 되었던 그 날의 일을 회상한다. 스트레이틀리와 함께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패트 비숍. 이번엔 비숍의 차례다. 학교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비숍이 쓰러졌다.

7장: 퀸 (Queen)

드디어 가장 넓은 움직임을 가진, 높은 가치의 말, 퀸이 나설때이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으나, 방향은 전환할 수 없는 말 퀸. 이보다 자유롭고 확고한 방향성을 갖고 세인트오즈월드로 향한 이가 또 있었을까! 퀸이 움직이자 게임을 막바지에 이르게 되고 우리는 모두 허를 찔린다.

8장: 메이트 (Mate)

체크메이트. 드디어 게임이 끝이 났다. 자신을 밀쳐내는 것도 모자라 소중한 것들을 잃게 한 대상을 향한 한 아이의 복수, 누군지도 모르는 적을 상대로한 세인트오즈월드 방어도 모두 끝이 났다.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는 중요치 않아 보였다. 보기드문 명승부였고 멋진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돋보이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흰 말과 검은 말의 순번이 번갈아 이어지는 체스 경기처럼 두 명의 화자가 주고 받듯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형식이 너무나 멋진 <젠틀맨 & 플레이어>. 자신을 무언으로 배척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감히 누구도 거짓으로 대항하지 못할 것이라는 안일함에 사로잡힌 귀족사회를 무너트리는 주인공을 보며 느끼는 대리만족, 뛰어난 지적능력을 지닌 두 인물의 심리전 그리고 감탄을 금할 수 없는 반전, 해피엔딩, 새드앤딩, 권선징악 등의 천편일률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결말! 오랜만에 엄지 손가락을 높이 올릴 수 있는 추리물, 스릴러물을 만났다고 확신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한 수 한 수 상대의 마음을 읽으며 작전을 짜야하는 고도의 심리술과 지적능력을 요하는 체스를 이용한 이야기 풀이법과 체스말에서 기인한 등장인물의 이름들과 역할들이 지적미스터리물로서의 높은 가치를 보여주는 <젠틀맨 & 플레이어>.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귀족의식을 지닌 '그들만의 세계'로의 통쾌한 복수와 흠 잡을데 없는 이야기 구성이 돋보이는 <젠틀맨 & 플레이어>를 통해 조안 해리스의 뛰어난 미스터리 추리물 작가로서의 면모와 오랜만에 만나는 괜찮은 추리물의 짜릿한 매력에 빠져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