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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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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난날의 아련한 기쁨과 슬픔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나요?
자, 그러면 칸칸마다 사연을 실은 부산행 기차에 탑승하세요!


KTX 고속철도가 놓이고 부산은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부산은 그렇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또 굳이 특별한 일정 없이 가기에는 심적으로 부담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특별히 휴가를 즐기거나 부산영화제 등 행사가 있을 때나 찾게 된다.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집들이 빼곡히 산을 채우고 있는 감천문화마을, 해마다 세계 영화인들이 찾는 남포동 거리, 이제는 번쩍이는 초고층 아파트와 호화로운 호텔들로 가득 찬 해운대, 서핑의 메카가 된 송정 등 대한민국 동남단에 위치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동시에 휴가지이기도 한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 바로 부산이다. 이런 공간에서 추억 한두 개쯤 쌓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젊은 작가들이 저마다의 추억과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소설 부산]을 기획하게 되었다.
높은 산이 바다 앞까지 뻗어 있는 형세가 가마솥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부산釜山. 이 가마솥에 곽재식 송재현 목혜원 김경희 백이원 임회숙 김이은 작가가 쨍하게 햇빛 쏟아져 내리는 부산에서의 추억과 공간을 다양한 맛과 색깔의 이야기들로 맛깔나게 끓여놓았다. 지난날의 아련한 기쁨과 슬픔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면 칸칸마다 사연을 실은 부산행 기차에 탑승해 진하게 우려낸 이야기를 음미해보길 바란다.
[소설 부산]은 테마소설 시리즈 ‘누벨바그’의 네 번째 앤솔러지로, 세계 여러 도시와 작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지역과 문화, 사람이 어우러지는 장을 만들고자 야심차게 기획한 아르띠잔의 테마소설 시리즈다.

출판사 서평

'산 너머 보던 풍경'은 부산이 고향이며 수많은 SF 소설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곽재식 작가의 작품이다. 나는 친한 친구가 같은 반 태희에게 고백하고 둘이 사귀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 한다”는 역설인가를 얘기했던 국어 교사 말만 믿고 짝사랑만 하며 애를 태웠던 자신이 얼간이 같은 짓을 했다고 후회하며 괴로운 마음에 학교 뒷산에 오른다. 마음껏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거기에는 자경이 먼저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평소 말 몇 마디 해보지 않은 친구였지만, 어쩌다 점심시간마다 그곳 뒷산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가볍게 농담을 나누며 떠들다 보면 밝고 즐거운 그 사람의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별 큰 걱정거리도 없게 되는, 그런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자경은 내가 바라보던 먼 곳 해변 쪽을 가리켰다. 어떻게 보면 내가 보던 쪽보다 더 먼 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짙은 구름이 거대하게 이어지는 검은 그림자를 바다 위에 드리우고 있었는데, 멀리 한쪽으로 그 구름이 끝나는 곳이 보였다. 그 먼 곳에는 구름 너머에서 내리비치는 햇빛이 보였다.”

[소설 도쿄]에서도 만났던 송재현 작가가 이번에는 '부산에서 김설아 찾기'를 통해 부산 곳곳의 풍경을 보여준다. 싸이월드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 끝에 오랜만에 자신의 미니홈피를 열어본 해란은 그곳에서 이틀 전 댓글 창에 글을 남기려던 ‘김설아’라는 이름을 확인하게 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던 김설아가 자신의 미니홈피를 찾아 댓글을 올리려다 아무 내용도 남기지 않고 나갔던 것이다. 다른 반이 되고서도 한결같았던 우정이 대학에 가고 남자친구가 생기며 소홀해지고 결국에는 연락처조차 알 수 없게 된 사이가 되고 만다. 10년 만에 친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부산 스타벅스에서 일하고 있는 설아를 봤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부산을 찾는다. 어느 매장인지도 모른 채 백 개쯤 되는 부산의 스타벅스 중 설아를 봤다는 친구의 일정표에 따라 남포를 시작으로 해운대역에서 마린시티를 거쳐 센텀시티 그리고 광안리까지 부산 곳곳을 헤매는 해란을 통해 작가는 부산의 여러 표정과 설렘 가득한 학창 시절 풍경을 톡톡 튀는 문체로 그려냈다.

“원래의 자기에서 한 발짝씩 물러나 생긴 공간에 우리의 우정이 자라났던 건지도 모른다.”
“부르면 응답해주는 사람이 되는 건 무서운 일 아니니. 그러다가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사람이 되면. 더 이상 부름을 받지 못하게 되면.”

목혜원 작가의 '포옹'은 세 남자의 무력한 인생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옛 해운대역 뒤편 산복도로에서 카페를 운영 중인 나는 영업 마지막 날, 카페 문을 일찍 닫고 들어갈 요량으로 삼 주쯤 매일같이 같은 옷을 입고 카페를 찾는 남자에게 부산을 찾은 이유를 묻는다. 그런데 그는 “광안대교에서 뛰어내리려고요”라는 뜻밖의 대답을 한다. 난감해하던 나는 “언제 뛰어내리시려고요?”라고 농담 식으로 묻는다. 하지만 그는 “오늘 밤이요”라는 더 당황스러운 대답을 내놓는다. 내가 그의 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가끔 확 죽어버리겠다고 30년 넘게 말하던 어머니가 결국 진짜 자살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청년과 함께 와인 한 병을 두고 세 남자가 마주한다. 오늘 밤 자살을 하겠다는 남자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청년을 통해 소소한 마음 나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난 이미 부서졌지만 더 부서지고 싶었어요, 완전하게. 광안대교 위에 서면 완전히 부서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완전히 부서져서 바다 속으로 흩어지고 싶었어요.”
“악수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그도 나를 안았다. 그의 온기를 느끼며 누군가를 안아본 지가 참 오래되었구나 생각했다.”

김경희의 '불면의 집'은 세련된 고층 아파트에서 쥐 떼가 쏟아져 나오는 판타지에 휩싸여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결혼 후 취미 삼아 부동산 강좌에 등록했다 본격적으로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든 아내 덕에 수십 억대 부자가 되었지만 남자는 아내에게 끌려다니며 패배감에 사로잡힌다. ‘압구정 미꾸라지’라는 별명을 얻은 아내는 부동산 강좌다 재테크 수기다 돈을 불리는 데 열을 올리지만 아내 눈치만 보며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는 남편은 아내가 이끄는 대로 권태로운 삶을 이어나간다. 그러다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아파트 여러 채를 매입해 한몫 챙기려는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남자는 불안에 시달리며 최고급 고층 아파트에서 쥐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한 남자의 불안과 허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바로 거기, 구멍처럼 텅 비어버린 검은 동공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어떤 전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게 뭔지 아십니까? 잠들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잠에서 깨지 못하는 겁니다.”

백이원의 '떠나간 시간의 음'은 58년 개띠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당신 고향인 부산을 찾은 딸의 시선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 가장의 쓸쓸함을 그린 작품이다. 부산 비석마을에서 태어난 김중근은 공동묘지 터에 산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어 늘 방구석에서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놀아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수로 성공하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인천 공단에 취직하고 만다. 그곳에서도 늘 혼자였던 김중근에게 ‘고래’라는 동료가 말을 걸어와 주었다. 그 덕분에 낯선 사람과 어울리기 힘들어했던 김중근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드디어 혼자가 아닌 무리에 섞여 어울리는 법을 배운다. 노동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위장 취업했던 고래 덕분에 민주화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시대의 큰 흐름에도 뛰어들게 된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전태일이 분신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IMF를 견디며 살아온 아버지 시대의 스산했던 삶을 그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의 노랫말과 함께 되돌아볼 수 있다.
“그건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지. 사소한 걸 보고 사소하다 하지 않고 자기가 지나쳤던 게 있으면 귀찮아도 굳이 뒤돌아 와서 들여다보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도 고유한 흔적이 남고 그것은 이어진다. 그것만으로도 관계라는 것이 완성되기도 하는 거야.”

부산에서 나서 줄곧 부산에서 작업해온 임회숙 작가의 '흔들리다'는 2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가난의 쓸쓸한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필리핀 엄마를 둔 동철과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 살면서 은행원인 아빠와 교사인 엄마, 거기다 공부 잘하는 형까지 둔 민석, 그리고 백수 아버지를 둔 영석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직업도 없이 집 안에만 처박혀 있다가 일용직 노동자로 꽤 규칙적으로 출근하던 영석의 아버지가 어느 날 밀린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옥상에 올라갔다가 그만 몸을 가누지 못해 떨어져 죽고 만다. 그리고 마침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 건물 아래 있던 엄마는 아버지한테 깔려 식물인간이 된다. 그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동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을 떠돌고 영석은 그 후 학교에 가지 않는다. 비록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어묵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지만 그렇게 돈을 벌고 친구들과 게임을 하며 지낼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매일 같이 자기를 찾던 동철과 민석은 언제부턴가 뜸해지고 혼자 밤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가난하고 미래조차 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이웃과 친구가 있어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영석은 세상의 불행이 전해질 때마다, 자신은 덜 불행한 것 같아 안도했다.”
“깎아지른 언덕, 좁은 골목, 굽은 담벼락. 반듯한 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동네였지만 담벼락을 넘어오는 말소리와 불빛에 마음이 편해졌다.”

김이은의 '오월의 여행'은 더 이상의 기대도 설렘도 없는 삶에 무언가 특별한 활력을 더하고 싶어 하는 한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갤러리 큐레이터인 임지수는 32평 전세 아파트. 2,500cc 중형차. 별다른 말썽 없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딸아이. 섹스리스 말고는 별문제 없는 가족이 된 남편과의 관계. 크게 잘될 것도 그닥 못 될 것도 없는 이미 결정되어버린 어정쩡한 삶에 공허함을 느낀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 생에서 더 이상을 원할 수는 없을 거란 상실감에 빠져 무언가 새로운 것에 빠져들고 싶다고 욕망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단 한 번 본 남자가 함께 부산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그녀는 고민 끝에 가장 예쁜 구두를 사 신고 남자와 함께 부산으로 2박 3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불륜도, 누리고 있는 삶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매번 이별을 택하기로 한 임지수는 그와 1년에 딱 한 번 부산으로 이별 여행을 하기로 한다. 무언가를 잃고 사는구나, 하는 자각으로 ‘사랑’이라는 일탈을 택함으로써 일상을 견뎌내기로 한 여성의 비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이다.

“어쩐지 부산은, 해운대 바다는, 거기 서 있어도 어디론가 떠나는 심정이 되곤 한다.”
“젊음은 낭비해야 돼. 팔팔할 때 주식시장이나 주택담보대출 이자율 같은 얘길 하면 슬플 거야. 어차피 나이 들면 그것밖에 할 얘기가 없거든.”

부산은 누군가에게는 나고 자란 고향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 달려온 너른 바다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소중한 추억 한 조각을 품을 곳이기에 서로 다른 이야기, 서로 다른 풍경이 너울댄다. 그래서 비릿한 바다 내음을 품은 북적북적한 도시가 전하는 다양한 맛과 색깔의 이야기들이 [소설 부산]에는 있다.

산비탈 좁은 골목을 돌아설 때,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시장을 걸을 때,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힘겹게 모래밭을 걸을 때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수많은 이야기들로 채워지길 소망합니다. 그 짧은 부산 여행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언제가 되었건 다시 돌아와 선 그 자리에서 지난날의 기쁨과 슬픔이 아련하게 남아 있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소설 부산]에서는 부산이 고향이거나 부산을 터전으로 활동하는 작가, 그저 부산과 인연이 닿아 있을 뿐인 작가 등 7인이 그려낸 각기 다른 맛과 빛깔의 부산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뿐 아니라 이제 막 작가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기쁨을 작가에게는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지면을 열어놓았다. 누벨바그 시리즈는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할 예정이다.

목차

프롤로그_다양한 맛과 색깔의 부산 이야기를 만나다

산 너머 보던 풍경_곽재식
부산에서 김설아 찾기_송재현
포옹_목혜원
불면의 집_김경희
떠나간 시간의 음_백이원
흔들리다_임회숙
오월의 여행_김이은

본문중에서

“여러분, 박승유의 역설이 뭔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
나는 교사가 그 이야기를 하던 날을 떠올렸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내 관심이 바로 확 쏠렸다. 혹시라도 그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무심코 태희를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갑작스레 다짐할 정도였다.
“조금 좋아하더라도 딱히 많이는 안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쉽게 같이 지낼 수 있죠. 별로 그렇게 잘 보여야 된다는 부담이 없으니까 말도 편하게 걸 수 있고, 자기 생각도 말할 수 있고, 어울릴 때 힘든 것도 없죠. 그러다 보면 저절로 점차 정이 들기도 하고 친해지기도 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다 보면 또 사귀기도 하고 살림 차리고 결혼하고 애 낳고 뭐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겠죠?”
어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보기만 해도 막 가슴에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혹시, 그런 사람 있습니까?”
많은 학생들을 따라 나는 피식 웃는 흉내를 냈다. 하지만, 이미 불타오르고 있던 내 가슴은 그런 표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산 너머 보던 풍경' 중에서/ pp.17~18)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면 소요 시간 3시간, 요금은 6만 원을 넘지 않았다. 열차는 20분마다 한 대는 있었는데 우리 동네 마을버스 낮 시간 운행 간격보다 잦았다. 나는 하행 승차권과 상행 승차권을 함께 예매했다. 부영은 같이 가는 대신 당일치기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우리는 우리가 김설아를 만나고자 했을 때 만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고 싶은 것이지 김설아의 거처를 밝혀내려는 것은 아니라고 부영은 말했다. 나는 꼭 김설아의 거처를 밝혀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튼 수락했다. 현실적인 이유로 부영의 마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낙관적인 사태 해석과 우주의 관대함에 의존하는 이런 계획은 99퍼센트 실패한다고 본다.
99.9퍼센트라고 하지 않은 것에서 나는 약간의 다정함을 건져 올렸다.
……
부산은 서울보다 더웠고, 공기에선 바다냄새가 났다. 열대어가 헤엄치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아니라 갈치와 고등어가 유영할 것 같은 남색 바다. 이 도시에 있는 한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바다였다.
( '부산에서 김설아 찾기' 중에서/ pp.73~74,78)

부산에 무슨 일로 왔냐는 나의 질문에 돌아온 남자의 대답이 기묘했다. 광안대교에서 뛰어내리려고요. 남자는 아주 잠깐 카페 안쪽 벽에 그려진 커다란 벽화에 시선을 두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남자가 바라본 벽화는 광안리 밤바다 풍광을 드로잉한 그림이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답하는 남자의 표정에 불길한 어둠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온해 보였다. 차라리 침울해 보였더라면 겉치레일지라도 대강 위로를 건네며 대화를 마무리 지을 갈피가 잡혔을 법도 했건만, 남자의 태도는 마치 다니는 회사에서 지방발령을 내려 부산에 오게 됐다고 대답하듯 담담했다.
언제 뛰어내리시려고요? 난감해하던 내가 농담처럼 웃으며 물었다. 어색함을 어떤 식으로든 헤쳐나가야 했다. 농담을 주고받는 것보다 이 상황에 더 적절한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온 남자의 대답은 기묘했다. 오늘 밤이요.
( '포옹' 중에서/pp.97~98)

남자가 퍼뜩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남자가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이 온통 모래투성이였고 그제야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지는 소리가 남자의 귓가에 들렸다. 햇살이 내린 바다의 경계에는 줄지어 늘어선 갈매기들이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도 그들의 일부처럼 느껴져 남자는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졌다.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남자는 몸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마리나캐슬로 이사 온 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달콤함이었다. 남자가 몸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저만치 멀리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꿈이었을까? 초고층 요새들은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다. 남자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다소 슬픈 감정이 들었다. 남자는 도리 없이 거대한 요새들이 늘어선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불면의 집' 중에서/ pp.151~152)

고래를 본 적 있냐?
고래? 고래가 뭐? 뭐?
나는 본 적 있다. 부산 살 때였는데 산 고래가 아니라 죽은 고래를 본 거였어. 방학이었는데 집에 혼자 있기가 너무 싫어서 너희 할머니 졸라서 부둣가에 따라간 날, 그날 봤다. 맨날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다가 밑으로 내려가 보니까 항구가 엄청나게 큰 거야. 새끼손가락만 하게 보인 영도다리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높고. 근데 기절하겠는 거는 그 다리가 반으로 쫙 갈라지더라는 거다. 다리가 한쪽이 이렇게 위로 올라가더니 커다란 상선이 그 밑으로 쑥 들어오는데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상선에 죽은 고래가 실려 왔지. 교통사고라고 바다에서도 그런 게 있다. 배하고 고래하고 충돌해가지고 운 좋게 고래를 잡았다고. 그때 난리였지. 고래는 그때도 비싸고 귀한 거였으니까. 그 고래를 잡는데, 아제들이 그냥 그 위에 올라타서 쩍쩍 가르는데…… 그, 얼마나 놀라웠겠냐 내 눈에. 부둣가에 있는 생선 상자 있는 데로 갔다가 놓고 살덩이들 잘라 던져놓고, 그 옆에는 또 그걸 뒤집어서 의자를 놓고 앉아서 술들 마셔대고, 고래 한 마리가 사람 불러 모으고 몰려든 사람들 인심도 풀어놔서 말린 고기 팔던 행상 아지매들 장사도 잘됐지. 잔칫집이 따로 없었다.
( '떠나간 시간의 음' 중에서/ pp.177~178)

민수가 채비를 끝낸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웠다. 영석도 채비를 서둘렀다. 민수는 릴을 감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먼바다에서 불어든 바람이 갯내를 몰고 왔다. 영석은 낚싯대를 난간에 걸쳐둔 채 무전기를 꺼냈다. 그동안 엿들었던 불행한 세상이 잡음과 함께 소리를 냈다. 여전히 누군가는 다쳤고, 누군가는 현관문을 열지 못했다. 술에 취한 취객도, 길을 잃고 헤매는 노인도 집을 찾아야만 할 거였다. 무전기 속 세상은 고독한 죽음을 위로하고 위급한 환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무전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영석이 방파제 위의 민수를 올려다봤다. 영석과 눈이 마주친 민수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민수와 눈이 마주친 영석이 바다를 향해 무전기를 던졌다.
“씨발, 잘 가라!”
( '흔들리다' 중에서/ pp.221~222)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은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하얗고 파란 파도와 높다랗고 다닥다닥한 집들과 굽이지고 얽히고설킨 골목들이 한데 어우러져 계통 없이 찬란한 부산 풍경이 뒷모습을 감춰주고 다독여주었다. 그걸로 되었다. 불쑥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쯤은 현실과 세월과 서울이 많이 아프지 않게 눌러주었다. 길은, 길이고,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므로 사라짐을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다독였다.
때때로 그날의 냄새, 그날의 바람, 그날의 감촉, 그날의 감각, 모든 것을 세심하게 복기해보았다. 그를 향한 표정, 말투, 눈빛의 언어. 그리고 스스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질문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어차피 사랑이란 게 전혀 다른 두 종족이 부딪히는 일이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 '오월의 여행' 중에서/ p.238)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12종
판매수 1,235권

화학자 출신 소설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6개월간 단편 4편을 완성하는 ‘곽재식 속도 1’을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마감을 맞추기 위해 때때로 점심시간까지 쪼개가며 매일매일 글을 쓰고 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가 MBC 베스트극장에서 영상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 [사기꾼의 심장은 천천히 뛴다], [140자 소설] 등 다수의 장단편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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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일본에 건너와 일본문학을 공부했다. 2017년 독립문 예지「영향력」에 단편소설이 실린 것을 계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면서 꾸준히 번역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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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2종
판매수 69권

[베를린]과 [사바하] 등을 제작한 영화사 '외유내강'에 휴먼 멜로 장르의 시나리오를 판매하는 것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던 중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서울라잇 어페어Seoulite Affair], [칼과 당신], [숭례문 블루스] 등으로 창비 신인상과 문학동네 작가상 최종심, 그리고 [세계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2015년에는 장편소설 [야간 소풍]을 출간했다.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2010년 [코피루왁을 마시는 시간]으로 제10회 동서커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다큐 에세이 [제주에 살어리랏다], 여행 에세이 [마음을 멈추고 부탄을 걷다]가 있다.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2009년 계간 [실천문학]에 단편소설을 처음 실었고, 이후에 쓴 두 편의 소설이 2012,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AYAF)에 선정됐다. 소설 쓰기를 재미보다 고통으로 느낀다. 지금껏 소설을 쓰기보다 다른 일을 하며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소설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10년째 고민하고 있다.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분야에 당선됐으며 현재 부산소설가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길 위에서 부산을 보다](2012년, 산지니)가 있다.

생년월일 1973~
출생지 서울특별시
출간도서 15종
판매수 2,674권

2002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일리자로프의 가위]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 [코끼리가 떴다] [어쩔까나] 등이 있고, 장편소설 [검은 바다의 노래] [11-59PM 밤의 시간] 등이 있다. 그 외에 [호아저씨, 호치민] [부처님과 내기한 선비] [날개도 없이 어디로 날아갔나] 등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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