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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집 : 조선 31[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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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호은집好隱集]은 조선 후기 숙종 말~정조 초에 경북 달성 비슬산毘瑟山 일원의 사찰과 합천 해인사海印寺에서 주석하였던 호은 유기好隱有璣(1707~1785)의 시와 산문을 모아 펴낸 문집이다. 유기의 호는 호은好隱, 해봉海峯으로 이 문집의 제목은 해봉집海峯集으로도 부른다.

    출판사 서평

    본 번역서의 대본은 [한국불교전서] 9권 [호은집]이다. 저본은 '건륭乾隆 50년(1785년, 정조 9) 채백규蔡伯? 서기본書記本'으로, 정신문화연구원도서관, 현 장서각 소장본이며, 동국대학교중앙도서관에도 같은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1) 서문, 발문을 읽는 방식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문집 서문은, 대사가 입적하던 해(1785) 채제공이 대사의 제자인 지학旨學의 의뢰를 받고 쓴 글이다. 지학은 해인사에서 채제공이 머물고 있던 경기도 양주楊州의 초목사樵牧社를 방문하여 대사가 입적하기 전에 스스로 편집한 본 문집의 초고를 보인 후 서문을 의뢰하였다.
    채제공은 18세기 연간에 여러 벼슬을 거쳐 178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편찬에 참여한 당대를 대표하는 관료이자 문인이었다. 문집에 [번암집樊巖集]이 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그는 채제공은 당시 유교를 제외한 여러 종교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인 관점에 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러한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불가의 문집에도 서문을 남기고 있다. 그는 [호은집](1785)에 서문을 쓴 것 외에, [추파집](1780)에 [추파대사영찬秋波大師影贊]을, [설담집雪潭集](1784)과 [월성집月城集](1795)에 서문을 남기고 있어 당대의 문사로서 불가와 맺은 교류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서문을 쓸 당시의 채제공의 연보를 보면, 예조판서로 봉직하던 1781년에는 소론계 서명선徐命善 정권의 공격을 받고 낙향하였으며, 1786년에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호은집]에 서문을 쓴 1785년(정조 9)은 그가 소론계의 공격을 받고 낙향한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기 전, 즉 권력에서 물러나 한거하던 시기에 양주의 별서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서문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채제공의 대사에 대한 유자儒者적 시각의 분석이다. 채제공은, "문집의 내용을 읽어 보니 대사가 비록 승려이기는 하나 [주역周易]을 손에서 놓지 않은 듯하고, 시문이 대체로는 불가의 여러 양식을 원용하고 있으나 정통 한시의 여러 문체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어 문장가의 글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그 내용 역시 이 세상에 대한 "감개 불평"하는 표현이 글의 가락 사이에 드러나 있다는 점을 들어 '겉으로는 승려이나 속으로는 유자'가 아닌가 반문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지학은, 호은 대사가 "본래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마침내 여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뜻은 미상불 유학儒學에 있었습니다. 온갖 패엽貝葉에 비록 해박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좋아한 것은 [희역羲易]이었습니다. 견성見星과 미묘한 뜻을 비록 강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심복한 것은 유교였습니다."라고 하여 호응하고 있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세도가였던 채제공의 날카로운 분석에 대하여 비판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대응할 여유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대사의 삶의 자취가 그러하였음을 말하였다. 서문의 말미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대사는 대개 유자로서 부도에 숨은 자(盖儒之隱於浮圖者也)"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에 비교할 수 없는 현실적 우위를 지닌 유자의 시선으로 승려의 시문을 재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조선 후기에 불가에서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고 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유가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고, 대응방식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자들의 시각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불교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서발문을 검토해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규정이 있다. 그것은 '묵명이유행자墨名而儒行者'란 말로 표현되었다.(주: 韓愈가 [送浮屠文昌師序]에서 이 말을 썼다.) 승려의 명색으로 유자의 행실을 한다는 말이다. 이는 승려를 승려로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유교적 가치 내로 끌어들이는 논리의 최종 결론으로서의 규정이다. 이 '묵명이유행자墨名而儒行者'는 '심유적불자心儒跡佛者'로도 표현되었는데,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유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호은 유기의 문학의 불교문학적 정체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문학 연구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불가를 재단할 때 내세운 기준을 추수적으로 따른 것이라는 점을 기본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유자들의 이러한 시각에 상관없이 이상의 여러 분류는 조선 후기 승려들의 현실대응 양상을 다각도로 보여 주는 것이며, 불교적 동기의 순도純度에 따라 대상을 재단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서문에는 당대의 현실 권력을 지닌 한 문인이자 유자가 당시 유가에서 불가를 비평하는 데 이용되었던 하나의 프레임으로 상대방을 재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서문을 읽는 독자들은 개개의 승려들이 가진 교양敎養의 근원, 글쓰기 방식과 내용, 지향성 등에 사뭇 복합적인 층위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선다면 채제공의 서문에서 우리는 호은 대사가 명문가의 후예로서 어린 시절 유학과 문학의 기본 텍스트에 대해 전통적인 학습을 하는 가운데 선종의 책을 읽고 불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후 불가의 이력을 밟으며 자기 세계를 일구어 간 인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가 '속으로는 유자'인 것은, 그의 가계나 생장 과정에서 받은 유교적 소양과 독서에 대한 다른 방식의 표현임이 인정된다. 대사는 [기신론소기를 다시 판각하는 서문(重刻起信論 記序)]의 서두에, [주역]에 관한 내용을 실마리로 하여 글을 전개해 나갔고, 변체의 한시, 압운을 바꾼 시 등의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들은 대사가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교양을 충실히 갖추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고, 서문에서도 사실은 이 점에 대한 찬사가 전제되어 있음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서문은 불가 문학의 독립성과 일반 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주역]이나 다양한 시 양식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되, 나라의 교목세신喬木世臣으로서, 그리고 압도적 현실 권력을 가진 유자로서 불교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채제공의 현실적 표현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김몽화가 쓴 발문에는, "내가 [호은집]을 읽어 보니 후세에 전해질 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예전에 구양공歐陽公이 [유엄집惟儼集]에 서문을 쓸 때 유엄惟儼을 크게 칭찬했는데, 지금 그 책을 보니, 엄은 경사京師에 노닐기를 좋아하여 학사 대부들과 함께 위아래로 문묵文墨 간에 치달렸을 뿐, 수도修道와 계행戒行의 내실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곧 그 사람을 알 만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한지 후세 학인들은 반드시 분별하는 자가 있을 것이로다." 하였다.

    2) 비슬산과 해인사의 문학 지리와 대사의 자취

    문집의 제1권~제4권에는 대사가 주석하였던 비슬산과 해인사 인근의 여러 사찰, 암자의 중수기나 상량문, 사적기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개별적 문학성을 도출하기에 앞서 대사의 활동 공간을 드러내는 근거가 되며,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후반에 이 지역 여러 사찰의 활발한 중창 불사의 시기, 참여한 인물, 각 사찰의 연원에 대한 인식 등 다양한 정보를 함유하고 있다. 이를 도표로 나타냄으로써 전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들 다양한 기문들은 이 시기 중창 불사의 지역적 현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한 논고는 불교문화사적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며,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다만 이글에서는 1743년부터 1778년까지 약 35년간 저자의 삶의 자취를 파악하는 지리적 자료로 삼고자 한다. 기문 내용 중 그가 머물러 있는 사찰을 소개하고 있는 경우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비슬산 주석 시기
    1743(37세) 선산 비슬산 도리사
    1753(47세) '비슬산 납자 유기'로 소개
    1759(53세) 청도 청련사에서 여름 결재를 남, 비슬산에서 가야산으로 옮김.

    ② 비슬산과 해인사 왕래 시기
    1761(55세) 가야산 주석.
    1763~1766(57세~60세) 비슬산 주석
    1766(60세) 청도 용천사 주석
    1767(61세) 해인사 주석
    1767(61세) 달성 지장사 청련암
    cf) 1769(63세) 가야산 주석([중각기신론소기서])

    ③ 해인사 주석 시기
    1770(64세) 가야산에 들어와 반룡사 방문
    1771~1772(65세~66세) 표충사수호총섭으로 임명
    1773(67세) 해인사
    1775(69세) 가야산
    cf) 1776(70세) 해인사([신편보권문])
    1777~1778(71세~72세) 가야산 해인사
    1785(79세) 해인사 입적

    이에 따르면 저자가 주석하거나 결제를 하고 있는 사찰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이를 보면, ① 1743년~1759년까지는 선산(桃李寺), 청도(湧泉寺) 달성(地藏寺 靑蓮社) 등 비슬산 근경에서 주석하던 시기이다. ② 1759년 비슬산에서 해인사로 옮긴 것은, 해인사 내의 어떤 역할을 맡아 간 것으로 보이나 대사의 활동 반경이 1960년대 후반까지는 여전히 비슬산과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1770년 이후 그리고 1771년, 1772년 표충사수호총섭으로 임명받은 시기부터 입적할 때까지는 거의 해인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주석하고 있는 사찰이 이러함에도 여전히 기문을 써 주는 대상 사찰은 비슬산과 해인사가 겹쳐 있다.
    [호은집]에 수록된 다양한 기문은 앞으로도 이 시기 불교문화사의 여러 측면을 고찰하는 데 있어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3) 사상과 신앙의 기록들

    조선 후기 불교신앙의 제반 특징은, 이미 불교사적 맥락에서 어느 정도 밝혀진 바 있다. 예를 들면, 천도재 등 불교의식에서 소용되는 발원문, 소疏 등이 다수 창작되었고, 중창 불사를 위한 발원문, 권선문 등이 다수 창작되었다. 화엄학이 교학적으로 연찬되는 분위기가 지속되었으며, 정토신앙 역시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대중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역시 공인되고 있는 이 시기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경향은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호은집]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1740년~1785년에 이르는 시기 칠곡 가산과 달성 비슬산과 해인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 승려의 구체적인 활동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지역문화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제1권 천도소薦悼
    제1권 기신론소기를 다시 판각하는 서문(重刻起信論 記序)
    제1권 신편보권문 서문(新編普勸序)
    제3권 연지회蓮池會
    제3권 벽허실 화엄대회에 참가하다(參碧虛室華嚴大會)
    제4권 임제종 회당화상 행적기臨濟宗晦堂和尙行蹟記

    천도소薦悼] 11수는 영산재 같은 천도재에서 소용되는 소문疏文을 의뢰를 받아 지은 것이다. 천도의 대상은 첫 수에 보이는데, '동운東雲'의 손제자요, '환허幻虛'의 의발을 전수받은 어떤 스님으로 제시되어 있다. 11수가 각기 다른 재에서 쓰인 것을 모았다기보다는 한 선사에 대한 일련의 재에서 연속적으로 쓰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기신론소기를 다시 판각하는 서문(重刻起信論 記序)]은 1769년 가을,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이때 청허淸虛의 문손門孫인 봉정사의 지한旨閑, 관성觀性이 '당본唐本' 기신론소기起信論 記를 얻어 이를 네 권으로 분책하여 판각하면서 서문을 의뢰한 것이다. 학풍이 쇠미해진 시기에 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하는 바를 적었다.
    [신편보권문 서문(新編普勸序)]은 1776년 응천凝川 영은사靈隱寺의 납자 각성覺醒이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대중용 염불서를 새로 펴내고자 해인사로 대사를 방문하였고, 이에 감동한 대사는 연종보감蓮宗寶鑑, 귀원직지歸元直指, 정토록淨土錄 등을 열람하고 염불을 권장할 만한 글 22단을 택하여 제목을 '신편보권문新編普勸文'이라 이름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시기 염불 신앙의 홍포에 [염불보권문]이 기여한 바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즉 1704년 청허 휴정의 법맥을 이은 명연明衍(?~?)이 [염불보권문]을 펴낸 이래 약 100년 가까이 전국적인 사찰에서 계속하여 복각되고 증보되어 염불신앙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사의 [신편보권문]은 [염불보권문] 간행과 유포 확산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연지회蓮池會]는 염불회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 후기 만일염불회와 같은 염불회가 확산되어 갔는데,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내용 역시 아미타불 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벽허실 화엄대회에 참가하다(參碧虛室華嚴大會)]에서는 제목 그대로 갑인년(1734), 즉 28세 때 하안거에 화엄학을 연찬한 정황을 유추할 수 있다.
    [임제종 회당화상 행적기臨濟宗晦堂和尙行蹟記]는 성주星州 청암사淸菴寺에 주석하던 회당 화상(?~1777)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대사는 회당이 화엄에 더욱 정밀하였다는 평을 하면서, 실제로 회당에게 30년간 화엄을 문의하여 그 실마리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집 끝에 첨부된 김몽화의 발문에 따르면 대사 역시 여러 경전에 널리 통하였으나 화엄에 더욱 정밀하였다고 한다. 대사가 [화엄경]에 대한 강의의 기록인 사기私記를 남겼는지, 교학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 현재의 자료로는 알 수 없으나 대사의 화엄학에 대한 관심과 수준을 짐작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4) 시의 특징

    대사의 문집에는 장편의 노래인 행行과 가歌의 체제로 세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작품에는 화자의 삶에 대한 태도와 지향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제3권의 [소옥행小屋行]은 1759년 가을 대사의 나이 53세에 지은 시로, 7언 36구의 악부시樂府詩이다. '행行'은 일정한 시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노래로 부르는 악부시를 말한다. 이 작품에서 대사는 모든 일이 풍족했던 비슬산을 떠나 가야산에 당도하였으나 납자의 살림살이가 너무 옹색하고 궁박하다는 약간의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산수 수려하고 대장경이 비장되어 있는 이곳에서 소박하게 살며 밤낮으로 수도에 정진하겠다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제3권의 [서산가西山歌]는 7언 30구의 노래이다. 백이숙제의 고사를 노래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하는 절개를 찬양하였다. 이 작품에는 발문을 쓴 김몽화가 서문을 쓴 것으로 자술自述하고 있으나 문집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유불儒彿의 교류에서 나온 시가 아닌가 한다.
    제3권의 [야용가夜 歌]는 7언 30구의 노래이다. 육조 대사 혜능慧能이 오조 홍인弘忍 문하에서 방아를 찧은 일부터 늦은 밤에 불러 의발을 전하고 강을 건널 때 노를 직접 저어 보낸 이야기, 그리고 후에 이로 인해 조계의 돈문頓門이 세워지고 오가五家가 천하에 두루 퍼진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서산가]를 제외하고 [소옥행]과 [야용가]는 임제종 선사들이 수도하는 내력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수도시修道詩의 전통을 잇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호은집]에는 변격의 한시 작품이 몇 편 수록되어 있다.
    제3권의 [남악 장로의 운을 따라(和南 長老韻)]는 모두 여섯 수인데, "첫수는 변체, 마지막 수는 압운을 바꾸었다.(初首變體。末首倒押。)"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제3권의 [만음漫吟]은 장두체藏頭體 형식의 시이다. 장두시는 매 구의 첫 글자가 모두 매 구의 꼬리에 감춰진 것이다. 즉 각 구의 마지막 글자를 破字해 쪼개진 글자를, 연속되는 다음 구의 첫 자로 삼는 시체다. 이는 일명 옥련환체玉連環體라고도 한다. 장두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한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나, 감춰진 규칙을 고려하면 각 구의 끝 글자가 놓이는 순간 다음 구절의 첫 글자가 제한된다. 그러므로 장두체는 고도의 기교와 언어 구사력이 요구되며, 그러면서도 운자는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는 시체이다.
    제3권의 [나무를 읊다( 竹)]는 회문체回文體 형식의 시다. 회문체란 첫머리에서부터 내려 읽거나, 반대로 끝에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각각 의미가 통하는 시를 지칭하는 것이다.
    제3권의 [상 법려에게 주다(與祥法侶)]에는 '양관陽關'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양관은 송별의 내용을 담은 곡조의 이름이다.
    제3권의 [일 법려에게 주다(賽日法侶)]는 '옛 곡조(古調)'라 하였는데, 3·3·3·3·7·7·3·3구의 잡언체이며, 제3권의 [원곡 법려에게(與源谷法侶)]는 3·3·5·5·7·7구의 잡언체 한시이다.
    이러한 시 형식의 다양한 활용에서, 대사가 불가의 글쓰기만이 아니라 일반 한시의 창작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운용을 보일 정도의 교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서문을 쓴 채제공이 대사를 평할 때 '속으로 유자'인 것으로 평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상량문의 기원설

    대사는 다양한 양식의 산문을 남겼는데, 기記(제1권 9편, 제4권 4편), 제문祭文(제2권 13편), 사적비事蹟碑(제2권 1편), 상량문上樑文(제2권 10편), 양간록樑間錄(제3권 3편), 권선문勸善文(제3권 2편) 등이 있다.
    이들 산문 양식은 조선 후기 불가 문집에 수록된 대표적인 양식들로 실용성을 위주로 한 양식이다. 그 내용과 표현에 대해서는 앞으로 세밀한 문학적인 분석이 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 다만 그의 양간록樑間錄에 보이는 상량문의 양식적 연원에 대한 인식은 다른 불가 문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견해로 주목된다.

    제3권 용천사 명부전 양간록湧泉寺冥府殿樑間錄
    제3권 유가사 대웅전 양간록瑜伽寺大雄殿樑間錄
    제3권 지장사 승당 양간록地藏寺僧堂樑間錄

    이 글들은 상량문을 의뢰받은 상황에서 상량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대신하여 '대들보 사이에 넣는 글'의 의미를 지닌 '양간록'이라는 제목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 논리가 제시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해 여름에 주지 최상最祥이 상량문을 청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육위송六偉頌을 부를까요, 사실만 기록(直語)할까요? 육위송은 고문古文이 아니고, 사실만 기록하는 것은 고문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배우기 어려운 육위송은 화려한 듯하나 내실이 없고, 맑은 듯하나 흐립니다. 대우對偶를 쓰고 염법을 쓰나, 모두 거칠고 난삽하여 맥락을 아는 이가 없으니, 한 번 보면 속으로 비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문장이 화려하지도 않고, 또 남다른 식견이 있는 사람(隻眼)의 꾸지람을 들을까 두렵습니다. 대신 연대와 공로를 가지고 실제적인 기록으로 삼고자 합니다. 주지 스님께서는 이 글을 들보 사이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 절이 무너지지 않으면 반드시 후대에 지혜로운 이가 있을 것입니다. 백白 스님, 선善 스님, 정定 스님인들 어찌 육위송을 지었겠습니까?" 하자, 주지 스님은 좋다고 하였다.(용천사 명부전 양간록湧泉寺冥府殿樑間錄)

    이해 봄에 계암桂과 홍준洪俊이 내가 있는 가야산으로 인사를 와서 말하기를, "법당 상량하는 날짜가 멀지 않았습니다. 법로法老께서 바라건대 저희들을 위해 글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준 스님, 포량문 梁文을 짓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 상량문은 원元나라 명明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문체가 비록 아름다우나 잘 짓기는 역시 어렵습니다. 근래에 배움이 짧은 무리들이 효빈效 하고 있으나 염법簾法에 구애되고 대우對偶에 구속되어 절을 지은 실제의 자취는 전혀 담겨 있지 않고 다만 헛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들보에 비장할 수 있겠습니까? 대들보가 비록 말이 없지만 도리어 마음을 돌아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무릇 문장을 짓는 법은 격식이 어긋나면 곧 기이하고, 말이 통하면 곧 청아한 것입니다. 이제 직어直語를 붓으로 써서 양간록樑間錄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스님의 뜻에 맞지 않을 것인데 혹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준俊 스님은 "좋습니다." 하며 소매에 넣고 떠나갔다.(유가사 대웅전 양간록瑜伽寺大雄殿樑間錄)

    "......법로法老께서는 재물은 박하시고 문장은 풍부하시니 바라옵건대 글로 시주를 하시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아, 정 스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무릇 육아六兒의 노래를 짓는 것은 원元대, 명明대에 시작하였는데 근래 범상한 배우는 이들이 너른 안목을 가진 이의 비웃음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억지로 그 문장을 짓는데 구법을 인용하는 것이 군색하고 난삽하여 격조 있는 글의 문채가 전혀 없습니다. 난주亂朱가 어찌 진홍眞紅과 빛을 다투겠습니까? 많으나 허점이 있는 것은 적으나 내실 있는 것만 못합니다. 내가 어찌 그 비웃을 일을 하겠습니까? 다만 스님께서 하는 말씀을 살펴보니 법도가 있고 군더더기 말이 없으니, 스님이 한 말씀으로 기록하고자 하는데 스님께서는 대들보 사이에 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淨 스님이 수긍하기에 이에 쓰노라.(지장사 승당 양간록地藏寺僧堂樑間錄)

    우리나라에서 한문 문체의 하나로 상량문의 역사가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진 사실이 없는 가운데, 작자의 설명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 자료로 보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상량문 양식은 고려 말 조선 초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고려 말에 원과의 교류가 밀접할 당시 중국 남방의 민요 율격을 모방한 상량문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흥미로운 과제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가치

    [호은집]은 18세기 후기 경북 달성 비슬산 근경의 사찰과 합천 해인사에서 주석하였던 호은 유기의 문집이다. 대사는 수도와 계행의 내실이 있어 당시 불교계의 신망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문집에 실린 그의 시는 이러한 수도의 과정에서 겪는 세계를 다양한 문체를 구사하여 드러내고 있다. 또 문집에는 저자가 주석하였던 달성의 비슬산 일원(칠곡의 가산 일원 포함), 가야산 일대의 사찰 중수의 과정이 기록된 기문, 상량문, 양간록 등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불교 사원 불사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지역의 많은 사찰의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가운데 문집에 담겨 있는 사원 중수의 자취는 각 사찰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 기록들은 문학적 자료를 넘어서 건축사, 미술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 시대의 지역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18세기 불교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데 있어서도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이 시기 화엄학에 대한 관심, 염불신앙에 대한 관심 등이 문집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청허 휴정, 편양 언기, 풍담 의심, 상봉 정원, 낙암 의눌의 법계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집은 청허당, 편양당의 법맥이 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맥락을 복원하는 데 소중한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다.

    목차

    호은집 해제
    일러두기
    해봉집 서문



    제1권
    제2권
    제3권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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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불교가사의 연행과 전승], [불교가사의 계보학, 그 문화사적 탐색] 등이 있고, 역서로 [정토보서], [백암정토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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