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주, 설락주, 전통소주, 국민주라 불리는 희석식 소주, 그리고 막걸리.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지라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무념무상 상태로 읽어갔다.

다만 두 번째 이야기인 '설락주'라는 생소한 이름의 술 이야기에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 기억이 들춰졌다.

설락주란 주인공 성찬이 고등학교 은사의 퇴임에 맞춰

동창생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만드는 술 이름으로

실제가 아닌 가공의 술이다.

이 이야기에 고등학교 시절 성찬을 괴롭혔던 길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성찬이를 몸종 다루듯이 학대하다가 결국 퇴학당한 인간말종인데,

세월이 흘러 조폭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창회에 나타났다.

여기에서도 길태는 스승을 모욕하고 동창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조직폭력배들 때문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내 기억과 연결지어졌다.

그저 집 가깝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선택했던 중학교...

대구에서도 가장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모인 그 곳은

잠재적인 폭력의 온상 같은 곳이었다.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친 남자들의 세상 속으로 편입되어야만 했고,

수십 년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생각이 나면 오싹해지곤 한다.

지금은 더하다고 들었는데...

폭력에 의해 세워진 부당한 권위가 일상화된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국수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음에 착안한 명품 방송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인들의 국수 사랑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다.

유학간 학생이 마지막 남은 라면 한 봉지를

아껴아껴 먹었다는 건 이야기 축에도 못 들어간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 열아홉 번째 책은

국수에 관한 다섯 편의 이야기 모음이다.

바지락칼국수, 잔치국수, 올챙이국수, 막국수, 그리고 짜장면.

칼국수 좋아하는 애인이 히말라야 등반 가 있는 동안

바지락칼국수 끓이는 법을 배우려고 열의를 쏟았지만

결국 조난당하고 만 비극적인 첫 번째 에피소드가 가슴 뭉클했다.

그 외에 잔치국수의 면발과 국물에 대한 이야기,

철 없는 할아버지와 조숙한 손자의 좌충우돌 여행이 흥미로운 올챙이국수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 번 봉주와 성찬이 맞붙은 막국수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본 화교 3대가 짜장면을 놓고 경쟁하는 이야기이다.

아무래도 가장 익숙한 음식이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사실 음식 자체의 얘기보다는,

해방 이후 화교들이 겪어왔던 부당하고 억울했던 대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게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한국인의 주식은 두말할 나위 없이 쌀밥이다.

하지만 밥만 먹으면 사는 재미가 훨씬 없을 꺼다.

각종 국수와 중화요리,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라인업에 포함되어야만,

비로소 한국인의 식단이 되는 것이다.

쫌 알고 먹으면 더 맛있어지려나?

와인에 대한 만화였는데,

어떤 주제에 관심이 생기면 끝도 없이 파고드는

'오타쿠' 적인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만화이다.

이 만화는 일본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와인 열풍을 일으켰고,

한국 교양만화 일인자인 이원복 교수가 와인 소재의 만화를 그리고

모 방송국에서 드라마까지 제작되었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 열여덟 번 째 책에서 가장 관심있게 본 만화가,

바로 프랑스 바이어를 접대하기 위해

최고의 와인을 선택하는 대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와인에 대해 박식했던 그는 이 기회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프랑스 사람조차 거의 맛볼 수 없을 고급 와인을 선택하지만,

정작 프랑스 바이어는 가장 좋은 와인은

이런저런 형식 따지기 보다는 즐기면서 편하게 마시는 와인임을 강조한다.

세계에서 와인을 공부까지 해 가면서 마시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뿐이라고.

와인에 대해 잘 알아야만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친 허영심이 즐기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비단 와인 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가령 예전에는 뭣도 모른 채 흠뻑 빠져들어 몇 날 며칠 잠을 설레게 했던 뮤지컬이,

어쭙잖게 알게 된 지금은 어지간한 작품으로는 감동은 고사하고

불평꺼리만 생겨난다.

와인 자체보다는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허영심이 줄어들어야만,

이것을 통해 인생의 깊은 맛을 향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