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다가

와인이라고는 그야말로 어쩌다가 한 번 맛봤었는데,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마셔보니까 자연스럽게 비교가 가능했다.

희안하게도 나에게는 좋은 와인이라는 고급보다는

편의점에서 파는 보졸레 누보의 맛이 더 좋게 느껴졌다.

체질상 카페인에 취약한데다가

부리나케 화장실 들락날락 거려야만 하는 차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마시는 거라곤 고작 애들이나 좋아하는 음료밖에 안 마셨는데,

이 와인이라는 걸 나의 메인 음료로 삼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관심이 생기면 관련된 책부터 찾아보는 게 오래된 나의 습성이다.

마침 예전에 사 뒀다가 안 읽고 있었던 책이 있어 읽어봤다.

이원복 교수의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시리즈 두 권 중

1권은 예전에 읽었으나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었다.

와인에 관한 상식적인 내용이 쓰여진 책이다.

2권 <세계의 와인>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제목 그대로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와인들에 대해 소개한 책이다.

놀란 점은 와인이라고 하면 단연 보르도와 브루고뉴의 프랑스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이에 못지 않는 좋은 와인들이 세계 도처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1976년 이른바 '파리의 심판'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프랑스의 와인 전문가들의 눈을 가린 채 와인의 서열을 매긴 결과,

놀랍게도 최상급 와인은

보르도나 브루고뉴의 그것이 아니고 미국의 와인이었다!

오직 프랑스 와인만을 최고라고 자부해 온

유럽인들의 자부심에 큰 타격을 준 일대사건이다.

계절에 따른 날씨와 온도 변화가 거의 없는 북미와 남미, 호주 등

'신대륙'의 떼루아가 프랑스의 그것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신대륙 와인들은 무서운 속도로 유럽의 와인을 따라잡고 있다.

책머리에 저자는 한 프랑스 와인업자의 말을 인용한다.

"한국인들은 입이 아니라 머리로 와인을 마시는 것 같다.

인간이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와인이 인간을 마시는 것 같다."

비싼 고급와인 보다는 칠레 와인 같은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한 와인을 통해

자신만의 와인을 찾아내는 것이,

머리에다 평생 먹어볼 일 거의 없을 '샤또~'니 '그랑 크뤼'니

잔뜩 잡아넣는 것보다 훨씬 와인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이원복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은 와인에 압도당하지 말고,

내 인생에 와인을 초청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올 해 나왔던 루이스 신간 <세상의 마지막 밤>은

관심자들의 뇌리에나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나에게 루이스는 그 정도로 지나칠 인물이 아니다.

'양화진문화원 책과 함께'에서 루이스 섹션을 맡아

책을 선정하고 독서 모임을 진행하기도 했고,

작년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루이스 관련 모임들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너무나 분주했던 한 해였던지라,

신간 한 권과 얼마 전 가수 소향이 읽어주었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제외한

단행본은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루이스라는 인물이

여전히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매일의 묵상시간에 읽었던 <기쁨의 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쁨의 하루>는 루이스의 글 중 교회력에 부합하는 글들을 선별하여

하루에 한 페이지 정도씩 읽도록 되어 있는 책이다.

물론 루이스가 직접 자신의 글 중 취사선택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신앙을 독려하는 차원인지라,

대부분의 글들이 문학작품 보다는 변증서에서 인용되었다.

가장 많은 분량은 루이스의 대표 변증서인 <순전한 기독교>이고,

그 외에 <고통의 문제>, <기적>, <영광의 무게> 등의 인용도 많다.

그런데 루이스가 과연 이렇게 매일매일 읽어나갈만큼

대단한 작가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다.

작년 연말에 홍성사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루이스에 대해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이 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예수를 위해 살았던 사람.'

단지 책 속의 좋은 문장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로 '순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낸 인물이 바로 C.S 루이스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도끝도 없는 매력포인트를 가진 작가이면서,

예리한 지성으로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위한

삶을 살아갔던 신앙선배라고 생각한다.

<기쁨의 하루>는 이러한 루이스의 매력에

날마다 조금씩조금씩 젖어들게 하는 책이다.

이 책 이전에 김훈이라는 이름은 시사주간지의 기자로

몇몇 사람에게나 알려져 있었을 따름이다.

<칼의 노래> 후미의 동인문학상 수상의 변에는 참으로 강렬한 문구가 있다.

'우리 문단에 벼락같이 내린 축복이다.'

김훈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은 그가 상을 받기 전인 2000년에 출판된 책이다.

불가피하게 인생의 여정을 바꿔야만 할 전환기에,

스스로 '풍륜(風輪)'이라 이름 붙인 자전거를 몰고

전국을 누비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와

고금의 지식 속에서 파생된 사유를 자유롭게 적어나간 책이다.

한 때 전국적인 답사 열풍을 일으켰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막상 답사를 떠나면 아는 게 없어 허탈하게 만들었다면,

김훈 작가의 이 책은 내가 아는 허접한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짜투리 지식만으로도 한 번쯤 습작을 하고 싶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작가처럼 아는 게 많다면 쓸 이야기도 많겠지만,

내 머리통에 남은 것이 고작 서푼 어치밖에 안 되는데

뭐 어쩌겠냐고 똥배짱을 부려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 추위에 자전거 타고 다니는 고생을 사서 하고 싶어지지는 않으니,

맥아더 원수의 애송시인 사무엘 울만의 "청춘"에 빗대면

김훈 작가보다 내가 더 늙었나 보다.

이 책을 통해 한국문단의 벼락같은 축복이 되기 전의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꼭 자전거가 아니더라도 이 책에 나오는

몇몇 장소를 찾아가서 나만의 여행기를 써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