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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섹스, 전쟁, 카르마 등 현대의 딜레마에 불교가 말해주는 것  | 불교 2012.08.27 22: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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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불광출판사 | 2012/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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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불교학자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에 의하면 불교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렇듯 이단(異端)의 역사이다. 물론 기독교적 뉘앙스를 지닌 이단이라는 단어로 불교를 규정하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이단과의 관계 아래에서 본 논자가 마스다니 후미오만은 아니다. 박노자씨가 그 주인공인데 그에 의하면 불교는 이단인과의 종교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대승이든 상좌부이든 국가의 폭력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국가를 보호자로 삼았다. 불교 역시 폭력의 종교라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기독교가 이단을 단죄하고 말살시켜온 반면 불교는 이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말을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동양철학을 전공한 데이비드 로이의‘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를 보며 마스다니 후미오와 기독교,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저자가 강조하는 개혁을 새로운 생명으로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저자는 새롭게 부상(浮上)하는 불교가 개인적 고(苦)와 집단적 고(苦)를 가장 잘 다루는 것이 핵심 관건이라 전제한다. 그에 의하면 불교는 제도화된 고(苦)에 도전하는 대신 상품화의 길을 걸을 경우 자기중심적 스트레스 해소 프로그램에 흡수되어 우리가 고(苦)에 적응하도록 변화할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근본 처방 즉 불교가 제도화된 고(苦)에 도전하는 것은 우리와 사회를 더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기독교와 불교의 역사를 이단의 역사로 규정한 마스다니 후미오처럼 기독교와 불교를 또 하나의 닮은 꼴로 규정한다. 유랑 탁발승의 공동체로 출발한 불교 승가(僧家)가 많은 기부 덕분에 상당한 부와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중세 유럽 교회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세계는 붓다의 세계와는 아주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고“붓다가 만일 오늘을 살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다시 한번 마스다니 후미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후미오는“불교는 붓다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지만 동시에 붓다에서 끝날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저자는 돈, 섹스, 전쟁, 카르마 등을 불교가 풀어야 할 현대 사회의 딜레마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것들이 현대 사회에서 불교인들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것들의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핵심적인 사안들일 뿐이다. 그것들은“제도화된 고(苦)”의 눈으로 보면 탐욕(貪慾), 진에(瞋恚), 치심(癡心)이라는 삼독(三毒)의 집단적인 형태 즉 탐욕을 제도화하고 있는 경제제도, 악의를 제도화하고 있는 군사주의, 망상을 제도화하고 있는 대중매체(28 페이지)이다. 저자는 불교는 우리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도입부 형식의 글에서 기후 문제를 세 번이나 거론한다. 현대의 난제 가운데 하나인 기후 문제는 불교도들 뿐 아니라 인류의 책임이고 인류를 희생자로 만드는 첨예한 문제이다.

 

다만 책임의 몫이 다르고 희생의 폭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불교인들의 딜레마를 논하는 자리이기에 불교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자면 기후 문제야말로 불교계가 적극 대처하지 못하는 사안 중 하나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불교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불교 역시 자본주의적 양태에 속속들이 속박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교리 외적인 차원이고 교리적으로 보면 불교가 중도의 종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교는 선과 악 대신 선과 불선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쓴다. 불교가 중도의 종교인 것은 이런 점으로 드러난다. 저자 역시“불교는 선과 악 사이의 이분법을 강조하는 대신 건전한 성향과 불건전한 성향을 구별한다”는 말을 한다.(136 페이지)

 

저자는 불교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못한 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을 수행으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은 수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 때문(126 페이지)이며 자신이 먼저 해탈에 이르러야 다른 이에게 봉사할 수 있고,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생명 있는 존재란 없고 만물은 공(空)하기에 타인들의 운명이나 생물권의 운명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128 페이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가 적극적이지도 실천적이지도 못한 것은 불교가 단일한 하나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불교가 이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그런 유연성이, 전파된 지역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지식 및 부(富), 성향 등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불교를 수용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의는‘불교학과 불교‘를 통해 불교학자 권오민 교수가 일관되게 주장한 바와 문제의식이 같다. 저자는 불교도들은 우리를 둘러싼 위기를 지체 없이 정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지만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답만을 들려줄 뿐이다. 물론 지체 없이 정면에서 바라보라는 말도 원론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저자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거대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지려 해도 주주들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되며(135 페이지) 증권시장이 윤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작동하는 것은 투자자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체제가 어떤 다른 책임감도 권장하지 않기 때문이다.(137 페이지) 저자의 관점은 개인보다 체제 차원에서 사태를 바라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저자는 그럼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가. 돈은 공(空)하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상징으로 보면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현명하고 자비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55, 56 페이지) 업은 정신적 발전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101 페이지), 섹스야말로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며 상대가 나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기대를 너무 많이 하는 셈이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낭만적 사랑과 섹스가 우리의 결핍감을 메우기를 희망하지만 그것들은 그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122 페이지)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돈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며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에너지이다. 그리고 섹스는 항상 자연의 속임수이며 낭만적 사랑이란 그 속임수 위에 덫칠해 놓은 정서적 광택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오랫동안 계속 진행해온 우리 자신과 어머니 지구 사이에 벌어진 균열을 치유하는 과업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를 발견하며 이 치유는 생물권을 변화시키는 것만큼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170 페이지) 또한 저자에 의하면“만일 전쟁이 결핍에서 오는 집단 문제에 대한 반응이라면 우리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근본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20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군사화, 그리고 경제가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은 다룰 필요가 있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런 중에도 불교는 더욱 더 불교적인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의식이 덫에 걸리고 조작당하게 된 방식(경위)에 대해 내재적 비판을 하는 것이다.(229 페이지)

 

로이가 명쾌한 대안을 제시한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지만 오늘날 근본적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임을 감안하면 내면에 호소하는 원론 수준의 처방이 그리 큰 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정치인도 아닌 종교인인 저자에게 정치사회적 함의를 강하게 지닌 대안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 될 수 있지만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종교가 가르치는 개인 차원의 믿음과 지침을 잘 간수할 수 있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정치적 선택을 하고 사회적 이슈를 지닌 문제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그 믿음과 지침을 견지(堅持)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종단 차원의 이론 및 실천 지침을 논의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완성품 형태의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색, 논의 활성화를 원하는 것이다. 로이의 책은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미덕을 지녔다. 분석과 비판을 넘어 현실적인 대안까지 제시하는 것은 지난한 과제임을 로이의 책은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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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인문 2012.08.27 06: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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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사문난적 | 200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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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역사는 길다. 그노시스주의에서 프리메이슨, 피타고라스 학파와 퀘이커교도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신비주의를 어느 정도 일별했다 싶은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 책을 발견했다. 물론 오늘 소개하는 책은 새로운 책이기는커녕 나온 지 2년이나 된 책이다.(원작이 나온 것은 1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작가인 에두아르 쉬레(Edouard Schure: 1841 - 1929)의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라마, 크리슈나, 헤르메스, 모세, 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예수 등 신비주의의 위대한 여덟 선각자들을 저자 특유의 독특한 시각으로 다룬 책이다.

 

라마는 문명의 여명기(黎明期)에 최초로 종교를 창시한 정복자인 동시에 견자(見者: voyant)이다. 드루이드 승려였던 라마는 노예 취급을 받거나 저주의 예언을 내뱉었던 승려로 인식되었던 여자들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신성한 위치로까지 끌어올린 존재이다. 오늘날의 황도 12궁은 바로 라마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크리슈나는 아리안족이 인도를 정복한 뒤 세운 찬란한 문명의 최초의 메시아, 신의 아들들 중 장자이다. 크리슈나의 전설은 브라만교의 교리 전체를 압축하고 극화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브라만교의 가장 신성한 책인 ‘바가바드 기타’에는 크리슈나가 주창한 교리들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수록되어 있다. 크리슈나는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칸사(마두라의 지배자)의 여동생인 데바키의 아들이다. 데바키는 신의 사랑으로 잉태한 아들 크리슈나를 낳았다. 통과제의, 명상, 제자들과의 만남 등을 거치는 사이 크리슈나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저자는 서사시적, 종교적 전통에서 크리슈나라는 인물이 차지하고 있는 주도적 역할,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현(顯現)한 신, 혹은 비슈누와 동일시되는 존재로서 그가 맡았던 역할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가 비슈누 숭배 종교의 창시자이며 브라만교에 영광을 주었던 인물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한다. 크리슈나의 교리는 영혼 불멸, 재생, 신의 삼위일체가 인간 속에 일치되어 내재한다는 개념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크리슈나 이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렵 전역에 걸쳐 크리슈나가 전한 태양의 말씀은 그 빛을 한껏 발했다. 페르시아에서는 빛의 신 오르무즈드와 어둠의 신인 아리만을 손잡게 한 미트라스가 있었고 이집트에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가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태양과 리라의 신인 아폴론이 그러하며 영혼을 소생시키는 신인 디오니소스가 그러하다. 그 모두에게서 태양신은 어둠을 물리치는 신이 아니라 중개를 맺어주는 신이다.

 

헤르메스편에서 저자는 왕권이 성직자의 권한을 쥐고 흔들었던 앗시리아와 달리 이집트에서는 성직자가 왕을 인도했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이를 신비주의의 전통과 연결시키며 높이 평가한다. 헤르메스는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총체적인 이름이다. 그 이름은 인간, 카스트, 신을 동시에 지칭한다. 인간으로서의 헤르메스는 이집트 최초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이다. 카스트로서의 헤르메스는 신비의 전통을 지닌 성직자 계급이다. 신으로서의 헤르메스는 수성(水星)으로서 정신의 영역, 신성한 지도자이다.

 

헤르메스는 여러 종교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빛난다. 저자는 모세편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두 가지 중요성을 언급한다. 하나는 유일신 숭배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탄생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은 그들이 믿는 신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조차 넘어서는 절대적 신성의 원칙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과, 기독교는 그 속에 들어있는 비의(秘意)를 해독할 때 그 높이와 보편성이 드러난다는 말을 한다.

 

모세는 유일신 사상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한 인물이다.(모세는 이집트의 선지자이며 오시리스의 사제이다: 이는 히브리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저자에 의하면 헤브라이족은 다른 모든 셈족들이 그렇듯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의 후예들이며 아브라함은 바빌론 가까이에 있는 칼데아의 도시인 우르의 왕이다. 그런가 하면 이삭은 이집트의 통과제의를 거친 인물이다. 야곱과 요셉은 페니키아 출신이다.

 

저자에 의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여러 다른 민족의 족장이었는데 정신적 근친성을 혈연적 근친성으로 표현하는 것은 고대 성직자 사회에서 흔한 일이며 유일신 숭배가 족보처럼 형성되는 과정에 꿈을 통해 계시를 받는 것이나 깨어 있는 상태에서 절대자의 영상을 보는 것 등은 신비주의의 이치에서는 전혀 대립되는 것들이 아니다. 야곱이 엘로힘과 함께 정상에 오르는 사다리와 천상을 오르내리는 천사를 보았다는 히브리 성경의 내용은 신비주의의 사고의 흔적을 보여준다.

 

모세의 원 이름은 호사르시프였다. 모세는 구원 받은 자라는 뜻이다. 호사르시프로 하여금 이집트를 떠나게 했음은 물론 모세라는 새 이름을 갖게 한 계기는 호사르시프가 히브리 성경에도 나와있듯 맨 손의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이집트 병사를 죽인 사건이다. 저자는 모세가 출애급(탈이집트)의 역사(役事) 중 신께서 자신과 같은 예언자(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실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론과 신의 여사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며 선율로써 인간들을 구해내는 존재이다. 저자의 글은 역사적 사실과 신화를 교묘히 결합해 특유의 매력적인 필치로 빛난다. 때로는 신비스럽고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파격적인 문체는 우리를 피타고라스에게로 이끈다.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은 오르페우스의 역사적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호머를 예로 들며 이오니아인인 그가 도리아인인 오르페우스에 대해 취한 태도는 무시와 무지가 결합한 것이었으리라 추정한다.

 

저자는 오르페우스가 성직제도 하의 그리스의 스승이었다면 피타고라스는 세속화한 그리스의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자들, 그노시스학파들, 초기의 로마교회 교황들까지도 피타고라스를 하나의 권위로 삼아 인용하곤 했다. 저자는 우주 창조의 중요한 원리에 입각하면 조로아스터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피타고라스는 사도 바울과, 카발리즘은 파라셀수스와 연결이 된다고 말한다.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인간 정신의 비밀에 관계되는 영혼, 윤회의 가르침을 전율 속에서 받아들였다.

 

저자에 의하면 플라톤은 피타고라스로부터 형이상학의 원리들을 빌려왔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진리를 대중적으로 변형된 형태로 보여주었다. 오르페우스는 여명기의 선지자였고 피타고라스는 한낮의 선지자였다면 플라톤은 헬레니즘 문명 황혼기의 선지자이다.(플라톤은 다른 선각자들에 비해 짧게 다루어졌다.) 저자는 플라톤의 저술들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신비주의적 교리들을 밝혀 냈다. ‘국가론‘, ’향연‘, ’파이돈‘ 등은 신비주의적 가르침을 담은 책들인 것이다.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은 예수이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예수가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사실이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고 말한다. 한편 예수가 다른 종교단체들에 대해서는 공격을 가헸지만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신비주의의 한 派를 이루었던 에세네파를 자신의 동료로 간주했으며 그들과 신비에 대한 서약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는 의식이 개화하기 시작한 이래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발견했고 하늘의 왕국의 존재를 확신했다고 한다. 예수는 바리사이파와의 논쟁을 통해 스스로 고양되었고 그들이 자신을 공격함에 따라 점점 더 자신이 메시아임을 강하게 확신했다. 저자는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마태복음 16장 13 - 18절)을 해석하며 신의 아들이란 신성한 진리와 하나가 된 의식의 진리를 발현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부활을 영혼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일어나라 너의 조국은 저 하늘이니. 하지만 천국을 믿고 그에 이르기 위해서는 너의 일과 너의 사랑을 통해 그것을 증거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부분은 성경이 전하는 바가 아니라 저자의 상상력의 결실이며 견해이다.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독특한 매력을 더하는 책이다. 긴 여행을 마친 듯 피로감이 몰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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