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신이치(福岡伸一: 1958 - )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6장 ‘DNA의 그늘’을 통해 영국의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 - 1958)에 대해 알게 되었다. wikipedia는 로잘린드를 DNA의 구조를 밝히는 데 공헌을 한 과학자로 소개했다. ‘DNA의 그늘’이 다룬 내용은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라는 DNA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일어난 의혹에 관한 내용이다. DNA가 유전체라는 것을 밝힌 사람은 오즈월드 에이버리(Oswald Theodore Avery: 1877 - 1955)이고 그 구조를 밝힌 사람은 영국인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 - 2004)과 미국인 제임스 왓슨(James D. Watson: 1928 - )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DNA의 그늘’을 읽은 후 내가 생각해낸 것은 과학계의 구조적 함정이라는 단어였다.

 

peer라는 말은 잘 알다시피 동료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예컨대 peer review라 하면 세계적인 과학 잡지인 Nature나 Science가 자신의 잡지에 게재 할 논문을 심사, 결정하는 시스템을 지칭하는 말이다. 과학을 전공한 학자가 다른 학자의 논문을 검토하는 것은 논문 제출자 말고 논문을 심사할 사람이 극소수의 동업자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 집단 역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구성체이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며,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읽은 나 역시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같은 연구 분야 내의 경쟁자가 제출한 논문이 완성도가 높은 데다가 심사자들 자신들이 아직 발견해 내지 못한 중요한 데이터를 포함하고 있다면 심사자는 경쟁자의 논문 세부 사항에 대해 이러저러한 트집을 잡아 시간을 끌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연구원들에게는 필요한 데이터를 구하도록 한 뒤 긴급 명령을 내려 연구를 빨리 완성시킨 후 다른 전문지에 제출하면 경쟁자를 따돌릴 수 있으며 최악이라도 거의 동시에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DNA 이중 나선(double helix) 구조를 발견한 왓슨과 크릭이 20세기 최대의 발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중요한 실마리를 은밀하게 응시(peer)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peer는 동료라는 명사 뜻 외에 응시하다는 동사 뜻을 지닌 단어이다.) 저자가 응시하다를 뜻하는 단어로 peer를 고른 것은 참 의미심장해 보인다.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 1916 - 2004)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속한 킹스칼리지 연구소와 왓슨과 크릭이 속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연구소는 DNA 구조의 규명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었는데 윌킨스는 경쟁자인 왓슨에게 로잘린드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고 심지어는 로잘린드를 다크 레이디라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8년 왓슨은 <이중나선>이라는 자서전을 출판했다. 과학 책으로는 드물게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이기도 한데 왓슨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절대 공평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X선 결정학을 전공했는데 <이중나선>에는 로잘린드가 우직하게 노력한 끝에 찍어낸 DNA의 3차원 형태가 나타난 X선 사진을 윌킨스가 몰래 복사해 왓슨에게 넘겼다는 사실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로잘린드의 연구에 대해 저자는 낱말 맞추기 게임이나 수학 퍼즐을 풀듯 한 조각 한 조각 치밀하게 해석해 나감으로써 DNA의 전체 구조를 밝히려는 것으로 순간의 번뜩임이나 모델 및 도식화는 물론 우연한 발견(serendipity)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은 금욕적인 방법이었다고 전한다. 반면 왓슨과 크릭의 방법은 직감(intuition)이나 특수한 순간적 예지에 의지해 미리 어떤 도식을 생각하고 정답에 접근하는 도약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

 

발견이나 발명이 순간적인 번뜩임이나 세렌디피티에 의한 것인 양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직감은 대부분 잠재된 선입견이나 단순한 도식화의 산물이며 자연계의 모습과도 거리가 있거나 다른 경우가 많다’(51페이지)는 저자는 왓슨이 X선 사진을 본 순간 데이터의 의미를 이해하고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는 왓슨의 주장을 설득력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왓슨도 크릭도 즉석에서 데이터를 해독할 수 있을 만큼 X선 결정학에 정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데이터 도용 혐의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으로써 상처를 입은 윌킨스는 자신은 데이터를 도용하지 않았고 프랭클린의 간접적인 허가를 받았을 뿐이라고 자신의 책 <이중나선 제3의 남자>에서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윌킨스가 <이중나선 제3의 남자>라는 책을 통해 왓슨이 데이터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DNA=유전자’라는 사실을 밝혀낸 오즈월드 에이버리에 대해 저자는 DNA만이 유전자의 물질적 본체임을 증명한 에이버리의 확신은 직감이나 순간적 예지가 아니라 끝까지 실험실 옆을 지킨 그의 현실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 (52페이지) 저자는 문제의 그 사진을 본 적이 없다고 한 크릭의 말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 말한다. (106페이지) 저자는 왓슨에 비해 크릭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문제의 사진 관련 부분에서는 책의 발언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저자는 크릭이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DNA에 관한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peer)는 말을 한다.(111페이지) 프랭클린은 1952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연차 보고서의 형태로 연구 자금을 제공해주는 영국의학연구기관에 제출했다. 연구 성과에 따라 자금을 계속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프랭클린이 제출한 보고서 사본은 맥스 퍼디낸드 퍼루츠(Max Ferdinand Perutz: 1914 - 2002)에게 넘겨졌고 결국엔 크릭에게까지 넘겨졌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의 보고서를 발판삼아 “세명의 공범자들“은 노벨상을 탔지만 주역이 되었어야 할 프랭클린은 그들의 노벨상 수상 4년 전인 1958년 37세의 이른 나이에 난소암으로 유명을 달리 했다.(오랜 시간 무방비로 X선에 노출된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간 나는 다른 과학자들의 성취와 저작물 등에 대해 별 저항(?)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왓슨과 크릭에 대해서는 호감이 없었고 그들의 책을 훑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생물학자들에 대해서도 나는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차드 르원틴, 린 마굴리스 등을 좋아하고 에드워드 윌슨과 리차드 도킨스는 좋아하지 않는 등 호오가 뚜렸해져 가고 있다. 신(神)은 만들어진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유전자 결정론은 거부한다. DNA와 단백질 등을 통해 생명과 자연의 신비에 대해 논한 <생물과 무생물 사이>는 문학적인 표현과 적절한 비유로써 생물학에 대해 접근하게 만드는 책이다.

 

”생명이란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라는 정의에 대해 저자는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동적 상태(dynamic state)라는 개념을 보완해 제시한 저자의 개념어이다. 여기에서 주요한 관계어는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 증대 법칙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성분에도 예외없이 적용되는 개념이다. 불가피하게 붕괴로 종결되는 단백질의 구성 성분을 의도적으로 미래 분해함으로써 무질서가 축적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재구축을 하면 증대하는 엔트로피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145페이지)

 

책의 마지막 장인 제 15장 ‘시간이라는 이름의 돌이킬 수 없는 종이접기’에서 저자는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실험을 소개한다. 녹아웃 실험이란 특정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파괴하여 그 결과 어떤 효과가 산출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이다. 저자가 속한 연구팀이 시행한 실험은 GP2 녹아웃 실험인데 GP2에서 GP는 Glycoprotein이고 2는 폴리아크릴아마이드겔에 늘어선 순서가 두 번째였기에 붙인 이름이다.

 

생물의 단백질이 텔레비전의 다이오드나 트랜지스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동일한 단백질이 분자 수로 무수히 산재한다는 점이다.(208페이지) 또한 사람이든 생쥐이든 한 개체는 수십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기에 개개 세포에 대해 녹아웃 실험을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수정란의 특정 데이터를 제거(除去)하는 방법이다.(211페이지)

 

결국 저자가 속한 연구팀은 GP2 유전자가 파괴된 배아줄기 세포를 선별하는 데 성공했고 임신한 실험 쥐로부터 배아를 채취한 뒤 GP2 유전자가 파괴된 배아줄기 세포를 이식해 수정란을 만든 뒤 배반포 단계로까지 발전시켰고 배아줄기 세포를 속이 빈 배아 세포 내에 이식해 만든 배반포를 의사(疑似) 임신 상태로 만들어둔 대리모 쥐의 자궁에 이식해 태아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쥐는 GP2 유전자가 없었음에도 아무런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불완전한 프리온 단백질 분자를 이식한 쥐는 점차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죽었다. 이로부터 저자가 깨달은 것은 시간이라는 함수를 간과한 채 생명을 다루고 조작했다는 점이었다.(227페이지) 그래서 나온 말이 생명이란 기계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란 특정 장소나 특정 타이밍에 있어야 할 조각 중 하나가 결손되었을 경우 자신의 평형점을 이동시켜 그 결함을 메우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228페이지) 저자는 결국 이런 말을 한다. “기계에는 시간이 없다. 원리적으로는 어느 부분부터든 만들 수 있고 완성 이후에라도 부품을 제거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기계에는 재시도가 불가능한 일회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 내부에는 이미 접혀 다시는 펼 수 없는 시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에는 시간이 있다. 그 내부에는 항상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한 번 접히면 다시는 펼칠 수 없는 존재가 생물”(235페이지)이라는.... 이때 일회성이란 저자가 비유로 든 나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개념이다. 나무 가지는 단 한 번의 선택에 의해 특정 지점에 둥지를 틀고 한 번 가지를 뻗으면 모습을 바꾸는 일도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다는..(233페이지)

 

“어떤 느티나무를 보더라도 모두 느티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갖는 일회성에 대해 종종 일종의 재현성이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거기에는 개별적인 시간이 잠재되어 있다.”(233페이지) 단백질 분자의 부분적인 결여나 국소적인 변형이 분자가 전체적으로 결여된 것보다 더 우위적 부작용(dominant negative)을 일으킨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기계의 경우 한 부품이 통째로 빠진 경우가 일부 변형된 것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인것을 보면 기계와 생물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경우 부분적인 결손이 전체적 결여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왜일까?

4, 19 세대로서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던 문학 평론가 김현이 작고한 지 22년이 되었다. 4, 19 세대로서의 크나큰 자부심이란 김현 및 동시대의 인사들이 4, 19 세대로서 자신들을 한글세대로 지칭하며 해방 이후 비로소 본격적으로 모국어로 공부한 첫 한글세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과 관계된다.“백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평론가”로 불렸던 김현에 매혹된 나는 무엇엔가 들린 듯 그의 책들을 읽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만난 그의 책들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김현문학전집의 개별 책들이었다. 일종의 유고집(遺稿集)인 셈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유고집이 아닌 개별 책들이 출간된 시기에 문학에 관심을 가진 나이였다면 과연 무엇엔가 들린 듯 그의 책들을 탐독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전집에는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고 더욱 그것이 유고집이라면 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명성이 뚜렷한 근거 없이 만들어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객관적 평가다. 이런 차에‘김현 신화 다시 읽기’를 만났다. 나온 지 4년이나 지난 책이지만 신화를 다시 읽는다는 표현이 책을 고르게 했다. 김현 사후 나온 김현에 대한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책이 하나 있다. 곽광수 교수가 쓴‘가스통 바슐라르’라는 책으로 제목으로 쓰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김현의 논의와 상상력의 지대한 근거가 된 프랑스의 철학자겸 과학자이다. 당시 곽광수 교수는‘가스통 바슐라르’에“바슐라르에 대한 (김현의) 야심찬 연구가 단어 하나의 오독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담았다, ’김현 신화 다시 읽기’에서도 다루어진 곽광수 교수의 글을 읽고 나는 김현에 대한 평가들에 들어 있는 거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당시의 내 생각이 그리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다. ’김현 신화 다시 읽기’는 상찬(賞讚)이든 비판(批判)이든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합하는 책이다. 이정석, 하상일, 고봉준, 문광훈 등의 평론가들이‘작가와 비평’작업의 일환으로 참여한 결과물인 ’김현 신화 다시 읽기’의 의도는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김현의 신화를 다시 읽는 것이다. 그들의 다시 읽기 작업에 힘입어 나 역시 오랜 공백 끝에 김현의 몇몇 글들을 읽고 김현에 대한 글들을 읽었다. 짐작하겠지만 김현에게 상찬만 집중되지는 않고 있다. 인상비평의 혐의가 짙다거나“텍스트를 자기 마음으로 읽는”(시인 황지우의 표현)다거나“서구적인 근대 문학관을 척결하기보다 더욱더 강화했다”(‘김현 신화 다시 읽기’의 필진의 하나인 정은경의 표현: 본문 94 페이지)는 평가들이 그것이다.

 

‘김현 신화 다시 읽기‘가 바라본 김현은 내재적 초월주의자, 비역사적 환원주의에 빠졌던 정신분석학적 비평가, 마르크시즘에 거부감을 보였고 푸코와 바슐라르에 몰입했던 자유주의자, 여러 사람의 공감과 반발, 저항을 일으키는 뜨거운 상징이다. 하상일은 생활과 현실을 외면한 자리에서 오로지 개인의 의식만을 강조하는 편향성이 김현이 창간한 문예지인 ’문학과 지성’시론의 절대적인 논리로 체계화되었던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고봉준은 고문하는 문학, 꿈꾸는 문학이란 제목의 글에서 문학을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나쁨의 관점에서 이해한 김현의 문학관을 집중 조명했다. 재미있게 글을 쓰겠다는 작가들보다 성실하게 글을 쓰겠다는 작가들에게 의미를 부여한 김현은 작가의 성실성을 자기가 본 세계의 진실에 대한 태도에서 찾았다.

 

김현은 상황을, 외적 여건이 작가의 내부로 흡인되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고봉준의 글에서 중요한 대목은 상황과 현실, 개인과 계층, 영원과 역사, 부정과 저항, 비극과 비참 등의 대립항이다. 고봉준은‘문학과 지성‘의 상황과 상상력이 ’창작과 비평‘의 현실 및 역사에 대응하는 개념이라는 말을 들려준다. 이런 전제를 수용한 후 김현이 상황으로 변용되기 이전의 현실에 주목하는 사회학적 비평과 상황으로 변용된 이후의 현실에 주목하는 미학적 비평을 구분했다는 사실을 접하면 이해가 더 선명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고봉준은“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예술의 응전은 김현 비평의 위치와 달리 부정이라는 모던한 가치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좋은 문학은 고문(拷問)한다는 김현 비평의 테제는 부정되기보다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이고 문학이 행하는 고문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현대문학의 운명, 아니 현대비평의 운명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란 결론을 내린다. 김현의 시 비평에 대한 통찰이란 글에서 조해옥은 푸코와 바슐라르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김현이 내면화된 개인의 상상력이 시대와 서로 맞닿아 있다고 여겼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조해옥에 의하면 김현은 객관성의 이면에 김현처럼 다면성을 숨기고 있는 비평가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인식의 엄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다가 비평문의 말미에 가서 주관적인 세계로 빠져들어간 김현의 비평적 면모에서 비롯된 평가이다. 이경수는 김현에 이르러 비로소 문학 비평이 독립된 창작 영역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시, 소설에 못지 않게 문체미학이 중요해졌다는 말을 한다.

 

이경수는 김현의 평론은 시와 시인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투영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에 아름답게 읽힌다는 말을 한다. 김현의 이런 면모는 그가 재미있게 글을 쓰겠다는 작가들보다 성실하게 글을 쓰겠다는 작가들에게 의미를 부여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공감 비평의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가진 임영봉의 고통스러운 실존의 행복한 정신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김현이 상징주의 시학에서 벗어나 프로이트와 바슐라르에 의거한 심리분석으로 이행해 갔다는 점이다. 최강민의 김현의 신화와 우상의 탄생은 제목에 들어 있는 우상이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신랄(辛辣)한 글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신랄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에 접근했는가이다. 최강민은 김현이 역사적, 현실적 천착이 아닌 추상적, 관념의 범주에 집착했다고 말한다.

 

또한 김현이 백낙청의 민족문학론과‘창비’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것은 자신의 비평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 심층에는 자신의 문학적 결핍을 은폐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고 말한다. 최강민에 의하면 김현이 자신의 세대를 한글세대라고 강조한 것은 구세대를 주변부로 내몰고 문학의 중심부에 진입하려는 김현과 일부 4, 19 세대의 과잉 인정욕망이 낳은 비평 전략이었다. 최강민에 의하면 한글세대라는 김현의 자의식 역시 문제가 있다. 한글을 기준으로 보면 김현 세대는 영어라는 이질적 언어의 침투를 받은 세대였다. 김현의 초기 비평(1970년대 이전)에 빈번히 등장하는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이 이를 입증한다. 4, 19 세대가 첫 한글세대라는 담론은 허구적 환상인 것이다.

 

최강민은 김현의 경우 가치명제의 형태로 제시된 것들이 객관적 논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직관의 형태로 제시되는데 이는 객관적 세계보다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비평 주체의 입장이 더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비평 주체의 자유로운 욕망을 드러낼 수 있다면 객관적 타자는 무시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김현의 비평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최강민은 김현의 메인 테마인‘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도 비판한다. 문학만이 억압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강민은 김현이 공감의 비평가라는 세평에도 이의를 제기한다.(최강민은 김현의 비평을 공감의 비평이 아니라 주관주의적 직관의 비평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김현이 문학 이외의 모 든 것을 배척하는 비평적 입장을 드러냈다는 말도 한다.

 

최강민의 글은 많은 것을 포함한 글이며 김현 비평의 허와 실을 극명(克明: 속속들이 똑똑하게 밝힘)한 글이다. 문광훈은 김현과 외국문학이란 글에서 김현의 비평세계가 도달한 독자성은 아쉬울 정도로 낮다는 말을 한다. 문광훈이 그 근거로 김현이 인용문을 그대로 썼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다. 문광훈은 김현의 글에서 김현의 글보다 인용된 글에 더 시선을 자주 주었음을 말한다. 이는 물론 문학비평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예술과 학문 그리고 문화 일반의 미숙성 문제와 깊게 관련된 문제이다. 문광훈은 좋은 비평은 우리의 세계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문광훈이 경계하는 것은 되풀이되는 관점의 순환이다. 나는 물론 문광훈의 견해에 동의하는데 다만 새로운 관점의 구비는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문광훈은 벤야민이 정의한 비평을 소개한다. 비평은 역사의 쓰레기를 넝마주이처럼 뒤지고 이 폐허를 고고학자처럼 발굴하며 이렇게 발굴된 자료를 수집가처럼 모으고 배열하면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문광훈은 삶의 충실은 단순히 경험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것은 현재에 갖게 되는 그때그때의 느낌에 충실하면서 이 느낌을 깊이 있게 성찰하려는 일이다. 문광훈의 글은 비평의 위상과 지향점을 밝힌 글이다. 나는 그의 글이‘김현신화 다시 읽기’의 마지막 장에 배치된 것을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문광훈 역시 김현에 대해 비판을 했다. 논조는 부드러웠지만 비평에 독자성이 아쉬울 정도로 낮다는 말은 당사자에게는 그 어떤 비판보다 뼈아픈 말일 수 있다. 넓이보다는 깊이를 염두에 두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김현신화 다시 읽기’를 읽으며 나는 몇 가지 생각을 했다. 읽기와 그 결과물인 비평은 꼼꼼하고 철저하고 객관성과 주관성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김현신화 다시 읽기’가 내게 준 것은 김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기회이다. 하지만 이십대의 내가 수행한 어설픈 읽기를 반성하게 해준 것이 나에게는 더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