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이면서 전문적 시 독자인 화학자 진정일 교수가 시 속에 들어 있는 과학적 술어들을 풀어쓴 ’진정일 교수, 시에게 과학을 묻다‘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이 퍼시 셀리(Percy Bysshe Shelley)의‘아도나이스’란 시에 나오는“여러 색깔의 유리로 만든 돔과 같이/ 인생은/ 영원이라는 흰 색의 복사선(輻射線)을/ 여러 색깔로 물들인다.”는 구절을 읽고 자신의 책 제목을‘여러 색깔의 유리(A Many-Colored Glass)로 정한 사례를 돌아보게 한다. 이 사례는 과학이 시에서 영감을 얻은 아름다운 경우이다. 다이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생명체의 아름다움은 다양성에 있다는 점이다. 셀리의 시는 영원이라는 흰 색의 복사선을 여러 색깔로 물들인다는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과학적 진실에 다가서게 한다.

 

셀리의 표현은 무지개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이다. 잘 알다시피 모든 빛이 다 들어 있는 태양광선은 프리즘에 의해 굴절되거나, 우리 등 뒤에서 구름 같은 장애물들에 막히지 않고 우리의 앞쪽 하늘에 떠 있는 물방울들에 곧바로 들어가 굴절되고 반사되면 무지개를 선보인다. 셀리의 시에서 영원이라는 흰 색의 복사선을 여러 색깔로 물들이는 인생은 맞춤한 계기와 인연의 은유이다. 셀리와 다이슨의 예에서 보듯 시어는 압축적이어서 이해를 위해 숙고를 요구하지만 과학적 시어들은 배경 지식까지 요구한다. ’시에게 과학을 묻다’를 보고 나는 이 책이 물리학을 전공한 한 시인이 과학의 진리들을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풀어쓴 책(김병호 지음‘과학인문학’)과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 하는 긍금증을 가졌다.

 

이런 궁금증은 자연스럽다. 표면적으로 두 작품은 방향이 다르다. 한 작품은 시에서 과학의 언어들을 찾은 작품이고 다른 작품은 과학에서 시적 진실을 찾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진실을 천착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공명의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 셀리의 시에 나오는“흰 색의 복사선(輻射線)을/ 여러 색깔로 물들인다.”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부분을 보고 과학자(다이슨)가 영감을 받은 만큼 시인은 언젠가 습득한 과학 지식을 아름다운 시어로 만들었다.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다. 저자는 과학의 세계와 시의 세계는 다르기에 서로 다른 세계를 향해 신비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란 말을 한다.(20 페이지)

 

이는 과학자와 시인의 영향력은 쌍방향적임을 말해준다. 과학은 흔히 대상을 환원해 바라본다는 평을 듣는다. 예컨대 달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질량, 지름, 거리 등으로 분석하면 무생물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저자는 천상병 시인의‘귀천(歸天)’을 소개하며 왜 이슬은 새벽에 맺히나?, 왜 노을빛은 붉고 아침과 저녁때만 나타나나?, 우리가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천상은 천문기상학에서는 어떻게 정의할까?, 어떻게 구름이 생기며 왜 하늘에 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귀천’에 나오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등의 시어에서 길어올린 질문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아름다운 시의 시정을 과학적 냉철함이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고 말한다.(27 페이지) 아름다운 시정(詩情)을 여운(餘韻)으로 남긴 것일 수도 있고 생각할 여지(餘地)를 남겨둔 것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바슐라르이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그는 낮달을 하늘에 뚫린 구멍으로 비유했다. 낮달을 하늘에 뚫린 구멍으로 노래한 바슐라르의 시정(詩情)은‘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활동’같은 엄밀한 과학책을 쓴 지성적 바슐라르와 감성적 바슐라르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데 장석남 시인은 바슐라르의 이 상상에 멋진 상상을 덧붙여 바늘에 실을 꿸 때 침을 발라 빳빳하게 만들어 구멍에 넣듯 잘 구겨지지 않는 실꾸러미를 우물 속에 한없이 집어넣으면 어느 순간엔가 낮달에서 그 실끝이 스르르 흘러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참 멋진 상상력이다. 그런데 장 시인은 기온이 내려가 창에 물방울이 생긴 것을 보고“내가 아는 과학적 상식으로 물방울은 서로 다른 두 기온이 만나는 현상이다. 그 과학적 현상은 일종의 광장(廣場)이다. 물방울과 물방울이 만나는 것은 그러므로 내게 어떤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나와 관계 없는 저편의, 그냥 단지 물리적인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물의 정거장’79 페이지)이란 말을 한다. 다소 의외이다.

 

물방울은 무지개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며 기온, 기압과 함께 천변만화하는 날씨를 만드는 핵심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핵심은 물방울이 아니라 수증기이다. 수증기 단독으로는 여간해서 물방울이 되기 어려운데 아주 작은 먼지를 핵으로 하고 수증기가 그것을 감싸듯 붙으면 물방울이 된다.(Newton Highlight 편‘날씨와 기상’43 페이지) 먼지는 파장이 짧은 빛을 산란시켜 하늘을 파랗게 하기도 하고 수증기로 하여금 물방울이 되게 하는 중심(핵)이기도 한 것이다. 저자는 화학을 베이스로 둔 채 물리와 생물 분야를 넘나든다. 이 세 과학 분야에서 모두 중요한 개념은 엔트로피이다. 단 저자는 엔트로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물리적 변화에는 가역적인 경우가 많다.“(22 페이지)는 말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화학적 변화들은 불가역적일까? 그런데 이 불가역적이란 말은 화학 물질을 위험하고 유독한 것으로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과 연관이 있다. 화학은 항상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액이나 증기로 표현되고 아이들은 화학 실험에는 꼭 폭발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장난꾸러기 돼지들의 화학 피크닉’18 페이지)는 조 슈워츠의 말도 화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화학은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학문이고 물리학을 지질학이나 생물학 등과 연결시켜주는 센트럴 사이언스이기도 하다. 화학은 원자의 구조에서부터 물질의 상호 작용, 반응, 화합물 등과 신소재에서 지구 온난화 등에 이르는 이슈를 다루는 첨단 학문이다. 다만 화학은 가슴을 뛰게 하는 데 있어서는 ”밤하늘에 광대하게 펼쳐진 물리학인 천문학“(‘나의 행복한 물리학 특강’의 저자인 월터 르윈의 표현)에 미치지 못한다. 화학에서 심오한 철학적 의미나 엄청난 자연의 신비를 찾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는 화학자 이덕환 교수의 말도 내 견해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론 물리학자 조지 가모프는 우리가 궁금해 하는 우주의 비밀은 모두 원소(元素)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모프의 말은 물리학과 화학의 연관성과 함께 화학의 높은 위상을 말해준다. 물론 화학은 화합물과 분자에 관한 학문이지 원소에 관한 학문은 아니라고 말한 필립 볼(‘네이처’지 편집 고문) 같은 사람도 있다.(필립 볼은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 작가이다.) 필립 볼은 생물 세계란 언뜻 봐도 원소들의 풍족한 성찬(盛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최성일 지음‘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148 페이지) 원소들 가운데 탄소, 질소, 산소, 수소만이 생명 분자들 속에서 끝없이 자신들의 모습을 바꾼다는 것이다.

 

정확한 과학 상식을 보여주는 시들보다 오류에 근거한 시들이 많이 다루어진 것이‘시에게 과학을 묻다’의 아쉬운 점이다. 저자 역시 화학과를 졸업해도 바른 화학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으니 시인들을 과학 이야기로 괴롭히는 것은 악취미라고나 할까란 말을 했다. 그래도 정확한 과학 지식으로 시를 쓴 시인들이 한 명이라도 거론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화학을 먼저 공부한 다음에 시를 쓰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26 페이지)란 저자의 말이 묘하게 들린다. 물론 본령은 시에 들어 있는 과학적 연관성을 발견해 쉽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지 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님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내 짧은 화학책 읽기의 이정에서 유별난 존재인‘감정의 분자’와‘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같은 시적인 화학 저서들을 재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는다.

  

(神), 정의, 사랑, 아름다움...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장 뤽 낭시가 이런 주제들을 놓고 강의를 마련했다. 신은 난제이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은 추상 명사로 미학의 단골 주제로 알고 있다. 난제란 말은 아포리아란 말로 바꿀 수 있다. 아페이론(aperion)이란 고대 그리스어로 한계, 경계 등의 뜻을 지닌 페라스(peras)가 없다, 혹은 페라스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정의, 사랑, 아름다움 등이 그렇지만 특히 신에 대한 깊은 사색의 성과를 나누는 저자는 신에 대한 추구 또는 싸움의 시간들을 보낸 내 이력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대저 내 성향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논지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의 논지든 철저하고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선 할 말은 프랑스어가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라틴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고 그리스어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명(13 페이지)을 들으니 프랑스어가 깊고 오묘한 종교적 색채를 갖춘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어가 그런 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프랑스 사상가들이 무신론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사상가들 중에는 무신론자나 무종교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목록이 풍부하기만 하다. 저자는“세계의 밖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와, 즉 모든 사물들과는 다르게 존재할 그 무엇인가 혹은 그 누군가란 어디에도, 세계의 내부에도 밖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도처에 현존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에서 요구하는 신, 혹은 신들인 것입니다.”란 말을 한다.(22 페이지)

 

유태교의 신은 하나님 아버지로, 기독교의 신은 사랑으로, 이슬람의 신은 자비로운 자로 규정한 저자는 정의, 사랑, 자비 등이 결국 신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하늘 또는 천상이라고 말한다.(31 페이지) 이 말은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이란 제목은 결국 하나의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의 제목은 조화와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질문과 답변 시간에서 저자가“신이 정의라면 왜 장애아나 또 그런 식으로 불행하게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는 걸까요?“란 질문에 대해 한 답은 아쉽다. 아니 조화롭지도 아름답지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다.(39 페이지) 하지만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고난 가운데 도를 지나친 것들이 너무 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지 못하겠다. 나는 조광제 교수가‘의식의 85 가지 얼굴’에서 한 말을 알리고 싶다.“만약 후설 현상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안타깝게도 미안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지만, 태어날 때부터 강제로 주입되어 신학교에까지 가게 만든 기독교 신과 그에 따른 신앙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후설 현상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뜬금없이 주어진 이 우발성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그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감각적인 결들을 느끼며 흥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낭시의 의도가 신을 믿고 수용하게 하는 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신에 대해 한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신을 수용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다른 경로를 통해, 추구하든 거부하든 신과 씨름하다 보면 낭시의 논의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어디에도, 세계의 내부에도 밖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도처에 현존합니다.”란 말로 신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한 저자의 논지는 역설적이다. 하지만 이는 신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거치게 되는 우회로의 하나이다.

 

이런 역설적(逆說的) 논지는“중요한 그 사람을 만나는 일을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순수하고 단순한 필연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122 페이지)란 말로 이어진다.“사랑을 줄 때조차 우리는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상대에게 사랑을 줍니다. 더구나 우리는 내가 나와 맺는 관계, 그리고 그가 그 자신과 맺는 관계를 벗어나서, 어쩌면 상대에게서 받은 무언가를 줍니다.”(127 페이지)란 말도 그렇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그 무엇인가는 어디에서도 오지 않으며 동시에 도처에서 옵니다.”(128 페이지)란 말이다.

 

“사랑 안에서 상대는 내가 될 수 없습니다. 즉 그는 나에게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두 사람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그들은 틀림없이 둘로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하나가 없이 하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134 페이지)란 말도 그렇다. 아름다움 역시 역설적인 논의로 채워졌다.“아름다움은 주관적이지 않습니다. 즉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란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듯이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179 페이지)

 

저자는 아름다움은 결국 진실의 문제라고 말한다.(197 페이지) 저자는 이면(裏面)이란 말을 두 번 사용했다. 신에 대해 말할 때,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때...신에 대해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는 신이 무에서 물질적인 세계를 만든 거대한 기계란 뜻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을 했고(47 페이지) 아름다움에 대해서는‘우리는 매혹적인 이미지를 앞에 두고 그걸로 만족할 수 없다. 그 이미지들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불안하게 만드는데 그 이미지에 우리를 이끄는 이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지요’란 말을 했다.(199 페이지)

 

앞서 나는 저자의 제목은 조화와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그것이 자신에게 부합하는 것이건 한 사회의 양식에 부합하는 것이건 조화를 이루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 수 있습니다.”란 말을 한다.(200 페이지) 이는 세계의 조류(潮流)에 부합된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듯 세계의 의미가 하나의 완성체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가치를 잃어버린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의 말이다.

 

이면이라는 말로 신과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한 저자는 과연 질문과 답변에서“실제로 어쩌면 저는 사람들이 신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거대 종교들에서 신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많은 미스테리처럼 아름다움을 다루었을지도 모르지요.”란 말을 했다. 기묘한 수미일관, 기묘한 역설의 글이 끝을 맺는 순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관심은 여전하지만 예전에 비해 관련 책을 읽는 정도가 크게 줄어 든 것이다. 요즘 학계의 주요 화두는 인문학의 부활이다. 인문학이 빈곤층에게 희망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인문학은 빈곤층에게 어떻게 희망이 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 하던 나는 ‘불온한 인문학’을 통해 “부랑인과 노숙자 같은 사회 부적응자를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리기 위해 인문학적 지식이 동원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알았다.

 

좋은 인문학 책은 이런 앎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리라. 물론 ‘불온한 인문학’에는 이 뿐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 대해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내용들이 가득하다. 나는 인문학이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또한 관심있는 사람의 앎을 한층 강화하는 데 필요한 학문으로만 인문학을 대해온 나는 인문학의 정수(精髓)를 비판과 문제제기라고 인식하지 못해왔다.

 

여섯 명의 인문학자들의 치열한 사유와 삶의 결과물인 ‘불온한 인문학’은 논쟁적인 책이다. 필진들 가운데 이진경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익히 이름이 알려져 있고 손기태님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의와 관련해 들어 본 이름이다.

 

여섯 필자를 대표해 정정훈님과 최진석님은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설명을 붙였다. 여섯 필자들 가운데 첫번 째로 나선 문화님은 인문학이 두루두루 듣기 좋고 무난하게 소비되는 현실을 지적했다. 사실 이는 ‘불온한 인문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다. 필자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은 가벼운 유행 차원에서 읽히고 있다.

 

문화님의 글은 실질에 이르지 못하고 유행에 편승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문학 열풍을 진단한 글로 읽힌다. 문화님의 글을 통해 나는 대중매체에 소개된 인문학 책들이 다른 인문서로 확장되는 통로로 기능하지 못하고 자기계발서처럼 읽히는 현황을 알게 되었다.

 

본문에도 나왔고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에도 나왔듯 공부 또는 독서의 용도나 쓸모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굳이 인문학 책이 아니라 해도 자격증 준비를 위해서나 돈을 벌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닌 이상 모든 책은 직접적인 효용과는 거리가 멀다. 내 경우 인문과학 공부를 (내가 주로 읽는) 자연과학 공부라는 단어로 바꾸면 필자가 한 말은 결국 내 말이 된다.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란 글에서 최진석님은 인문학은 저 멀리 고대로부터 인간을 추구하고 문화를 창달하려는 고귀한 목적을 품고 생겨났다는 착각에 대해 다루었다. 필자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의 비실용과 비정치로서의 휴머니즘의 신화는 그 이면으로 지극히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비호를 받으며 융성했다. 게다가 휴머니즘이란 애초 인간을 위한 학문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으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공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굳건하게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19세기의 산물이라는 푸코의 지적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생산주의는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소비에 의해 추동되기에 결국 소비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임을 최진석님의 글을 통해 알았다. 문제는 인문학의 본래 과업은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원이었으며 대중 지배를 통한 사회 통합의 기제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까, 란 점이다. 최진석님은 인문학이 수단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 역할에만 머무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인문학이 소비를 위한 생산주의에 매몰되는 것을 우려하는 최진석님은 인문학을 안 팔리게 만드는 저항의 인문학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안 팔리게 만드는 것이란 소비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고 기존의 체계를 낯설게 하는 것이며 거북하게 하고 딴지를 거는 것이다. 또한 통념에 어긋나는 것이고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고 순응하지 않는 불온한 인문학을 만드는 것이다. 최진석님의 글은 이질적이고 외래적인 것을 참지 못하고 강한 적개심과 말살 의지를 보이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정정훈님은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라는 글에서 인문학의 본질보다 그 현실적 기능에 착안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정정훈님이 지적한 것은 인문학 텍스트를 적극적 또는 창조적으로 수용 또는 숙고하지 못하는 대중의 사유의 수동성이다. 정정훈님은 불온한 인문학을 야만성의 사유, 새로운 사유의 길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을 내모는 인문학이라 명명했다. 정정훈님에 의하면 사유의 공리계에 입각하여 진행되는 사유란 사실상 그 암묵적 전제에 대한 정당화 작업일 뿐이다.

 

이진경님의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은 소통, 횡단, 통섭(consilience), 통합 등의 단어들을 근본 차원에서 살핀 면밀함이 돋보이는 글이다. 필자는 요즘 한창 유행되고 있는 통섭(consilience)을 횡단과 반대로 하나의 체계 안에 지식들을 통합하고 포섭하려는 제국주의적 전략으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필자는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을 인용하며 질병에 대한 시각이 역사적으로 달라졌음을 지적했다. 모든 종류의 지식은 분할과 관계방식, 규정 등의 전략을 포함한다는 필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분할은 결국 권력의 문제이고 권력과 대결하는 문제라는 점은 불온한 인문학의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인문학의 현장은 어디인가를 쓴 박정수님은 2010년 10월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 넣어 유죄를 선고받은 분이다. 나는 그래피티 작가이기도 한 필자가 쓴 글을 읽으며 불온성보다 전복적 사유와 자유를 느꼈다. 자신의 삶이 학자라기보다 농부나 B급 예술가의 삶에 가깝다고 한 필자는 그런 삶이 인문학의 한 길임을 밝히기 위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인문학을 갈구하는 현장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옥죄는 빈곤이 비단 돈의 결핍만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 및 사유의 빈곤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고 인문학이 그 결핍을 메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박정수님의 글은 반향이 큰 글이다. 나는 필자의 글을 읽고 결국 인문학의 생명은 자신의 삶과 체험이 반영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박정수님의 글을 읽고 지난 2009년 1월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의를 들으려는 이유를 꽤나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일정 탓에 결국 불참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가 ‘에티카’ 강의를 들으려던 계획은 앎을 늘리려는 차원을 넘어 수행자 같은 삶을 살려는 평소의 내 관심과 계획의 일환으로부터 나왔다. ‘에티카’를 수행과 해탈의 텍스트로 읽은 학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본문에 나온대로 인문학은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실을 표현해 줄 언어를 찾는 것이리라.

 

손기태님은 인문학은 위험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란 글에서 인문학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질문을 던졌다. 필자는 소외계층에 대한 인문학 교육이 사회복귀 프로그램 또는 스펙 업그레이드에 그치는 현실을 문제삼았다. 필자도 언급했듯 문제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이리라. ‘희망의 인문학’을 쓴 쇼리스에 의하면 정치적인 것은 사회의 규칙에 적응하는 것이지만 필자는 그것은 사회의 지배층의 논리일 뿐이라 말한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기존의 사회적 규칙과 지배적 질서에서 벗어나 곳곳에 균열을 일으키고 불화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나 국가의 반인륜적 범죄를 예로 들며 쇼리스를 비판했지만 앎과 삶이 일치하는 바람직한 삶은 균열 및 불화와는 무관하지 않을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물론 앎과 삶의 불일치라는 문제는 인문학의 소양을 갖추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한 쇼리스에 대해 제기된 의문이다. 인문학의 불온함을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바른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일까?

 

나는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가 부과한 무력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상하도록 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 뿐 아니라 ‘불온한 인문학’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필자들에게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