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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키보드 : 법의학의 성지, 독일 최고의 전문가가 들려주는 강력범죄의 세계

원제 : Die Klaviatur des T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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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 : 박병화
  • 출판사 : 에쎄
  • 발행 : 2023년 01월 23일
  • 쪽수 : 360
  • ISBN : 9791169090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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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분명히 말하지만, 죽음에는 아주 특수한 키보드가 장착되어 있다.”
법의학의 성지, 독일 최고의 법의학자 미하엘 초코스가 들려주는 강력범죄의 세계

‘법의학’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인상은 대개 엇비슷하다. 차가운 부검대, 안경을 쓴 전문의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번득거리는 각종 수술 도구…… 『죽음의 키보드』의 저자 미하엘 초코스는 서문에서부터 그보다 더 넓은 법의학의 세계를 보여주겠노라 선언한다. 이 세계에서 법의학자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를 오가며 감춰진 진실을 밝히고 엇갈린 상황을 바로잡는다.
미하엘 초코스는 법의학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법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과학수사 분야의 전문가로서 활동 중이다. 논픽션부터 소설 집필 등 여러 장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글감은 주로 자신의 직업생활에서 나온다. 저자의 기록에는 법의학에 관한 대중적인 인상처럼 ‘차가운 부검대’나 ‘각종 수술 도구’도 들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풍성한 이야기들도 함께 담겨 있다. 거짓과 진실, 범죄와 폭력, 또 구원과 해명에 관한 이야기들 말이다.
미하엘 초코스는 법의학자들이 지닌 전문 지식과 능력을 “죽음의 키보드”라고 일컫는다. 본문에 따르면 모든 죽음에는 아주 특수한 키보드가 장착되어 있다. 법의학자들은 이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진실을 찾아낸다. 그들이 밝혀내는 사실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주로 ‘범죄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이다. 특히 범죄의 피해자가 사망했을 때, 법의학자의 키보드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주요한 매개가 된다.
『죽음의 키보드』는 바로 그러한 전달과 매개의 과정을 담아낸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죽음의 갖가지 얼굴과, 이를 둘러싼 복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제대로 보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조금 더 들어가보자.

출판사 서평

“개개인은 저마다 독특하며, 개별적인 죽음 하나하나도 마찬가지로 독특하기 마련이다.”
원인 모를 죽음, 조작된 단서, 사라진 범인…… 법의학으로 풀어가는 사건의 미스터리들

저자가 몸담은 강력범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자주 자극적이며 종종 잔혹하다. 죽음이 끼어든 사건이라면 그 충격과 잔인함의 밀도는 더 짙어진다.
미하엘 초코스를 포함한 법의학자들이 다루는 죽음은 ‘비자연사’ 혹은 ‘사인불명’의 죽음이다. 칼이나 총에 의한 폭력 범죄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벌어진 죽음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처럼 ‘외부’ 요인이 죽음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될 때 법의학자들은 사건 속으로 발을 디딘다. 그들의 참여가 필요한 이유는 명료하다. 사건의 진실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사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법의학자들은 과학 기술을 이용한 조사나 물리적인 부검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범죄의 이면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들여다본다. 물리적인 폭력이 개입된 사건이라면, 가해자의 증언이 실제 벌어진 상황(부상)과 알맞은지 대조하기도 한다. 그러한 면에서 보았을 떄 법의학자들의 역할은 우리가 잘 아는 고전적인 탐정과도 가깝다. 다만 이들에게 필요한 건 돋보기가 아닌 조사용 도구 그리고 법과 신체에 대한 지식이다.
매스 미디어에서 주로 비치는 모습과는 달리, 법의학자들은 죽은 자들만 조사하지 않는다. 범행 용의자나 범죄의 생존자 역시도 법의학자의 조사를 받는다. 이때 조사 결과는 사건의 판결을 좌우할 만큼 전체 국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수사 당국이 법의학자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실제로 사건 해결에 필요한 핵심을 담고 있다. 가령 피해자라고 주장한 이가 말한 대로 실제 범죄가 발생했는가? 스스로 진술하기 어려운 상태의 피해자는 어떻게 부상을 입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가해자의 진술과 피해자의 부상 형태는 일치하고 있나? 법의학자들은 현장에 머물던 신체와 사물들을 조사하며 왜곡 혹은 망각과 싸워나간다. 저자가 말하듯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법의학을 통한 조사는 어딘가 위안을 준다. ‘설사 사망자가 평소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해도, 그가 피해를 당했는지 아닌지 검증하는 마지막 단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법의학자로 근무하면서 맞닥뜨린 사건들은 대부분 충격적인 것들이다. 서문에서 말하듯 그 안에는 인간이 지닌 타락과 비극의 구체적인 면모가 곳곳에 배어 있다. 베를린 곳곳에 조각낸 시신을 유기한 범인이나, 경찰 또는 국가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범죄들, 화학물질을 이용한 ‘침묵’의 죽음, 의료적 조작을 통해 아이를 사지로 몰고 간 부모…….
책 속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간혹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극적이라 눈을 돌리고 싶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저자가 말하는 ‘법의학의 존재 이유’에 동조하게도 만든다. 개인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고 시스템적으로 원활하게 작동하는 ‘객관적인 법의학’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일부나마 해소하고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법의학자들은 사체 조사를 통해서 그가 겪었을 죽음의 과정을 재구성한다. 피해자의 몸에 남은 상처에서 가해자의 진술과 대치되는 부분을 확인하여 범인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도록 돕기도 한다. 범인이 국가 또는 타인을 위협하기 위해 조작한 단서들에서 어떤 요소가 과학적으로 어긋나는지 확인해서, 경찰 수사만으로 알기 어려운 사건의 이면들을 밝혀낸다.
이처럼 무거운 책임을 지닌 직업이기에 법의학자들이 가져야 하는 직업적 태도 역시 한결 엄격하다. 미하엘 초코스는 법의학자는 타인과 상황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누구의 의견에 기대지 않은 채 사실을 탐구하려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법의학자가 ‘의사이자 자연과학자이며 동시에 탐정’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일 테다.

나날이 교묘해지는 범죄와의 싸움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법의학의 지식과 기술로 미래의 범죄를 들여다보다

현장의 경험이 쌓이고 기술이 진화할수록 법의학은 진보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범행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진. 범죄의 양상은 날이 갈수록 다양하고 교묘해진다. 미하엘 초코스가 마주한 사건들에서도 그렇다. 본문에서 집중하여 다루는 사건들은 이러한 과정을 잘 담고 있다. 2장‘퍼즐 살인범’의 가해자는 어떻게 범행의 흔적을 지워서 경찰의(그리고 법의학자와 검사의) 그물망을 벗어나려 한다. 4장인 ‘가짜 단서’는 가상의 범행 혹은 가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속임수가 쓰이는지 보여준다. 6장 ‘소리 없는 죽음’에서는 법의학자가 아닌 이상 가늠하기 어려운 형태의 죽음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저자는 자신을 포함한 동료 법의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하는지, 또 이 조사가 법적 판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세부적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CT 스캐너 등 최신 장치를 통해 사체를 검사하거나 DNA 추출로 시체의 신원을 알아내는 등 관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제 검시와 전문 지식을 활용한 조사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도 수사를 진행한다. 신체 기관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사인의 구체적 양상을 밝혀낼 뿐 아니라, 가해자의 진술에서 옳고 그름을 판명해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최신 기술이건 기본적인 지식이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적재적소에 이 도구를 투입하여 사건에 깃든 진실을 알아내는가다.
미하엘 초코스의 기록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가령 퍼즐 살인범이 남긴 사체 일부를 조사한 법의학자들은 부검 과정에서 시신의 특징과 사망의 구체적 원인을 알아낸다. 이를 토대로써 범인을 찾아내고 범행의 형태를 밝혀낼 수 있도록 돕는다. 방화 등 가해자가 모호한 사건에서는 (법의학자가 아니었다면 스쳐 지나갔을) 결정적 증언을 잡아 사건 해결의 증거를 찾아낸다. 신체의 작동 원리를 꿰고 있는 전문가들답게, 그들은 ‘신체’를 이용한 거짓말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법의학자들은 상처를 포함한 몸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를테면 피해자의 몸에 남은 흔적을 통해서 상처를 입힌 공격이 의도적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며, 현장에 남은 증거를 통해 자살과 타살을 구분한다. 법의학의 조사 과정은 현장에 남은 신체 및 공간 끈질기게 추적함으로써 처벌받을 이들을 잡는 데 큰 몫을 한다. 법의 그물망을 벗어나려던 가해자의 거짓 진술을 정확히 꿰뚫기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만큼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저자가 법의학자로서 마주하는 이들의 마음에 깃든 어둠은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각종 범행에는 다양한 감정이 얽혀 있다. 갑작스러운 분노, 질투, 배신감, 오랜 학대로 생겨난 트라우마나 도망치고픈 욕망…… 모두 살아가며 한 번씩은 느낄 법한 감정들이 비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저자는 담담하고도 냉정한 눈길로 지켜본다. 실화를 배경으로 했기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 에피소드들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는 가해자가 형벌을 피하거나 피해자가 억울한 과정에 휘말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저자는 그간 마주한 ‘운 좋은 범인들’, 그리고 ‘너무 늦게’ 찾아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도, 과학수사 과정을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을 경계한다. 모든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풀리지 않더라도, 그는 법의학자들이 계속해서 조사의 ‘고정 나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본문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듯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소설이나 영화 속 일들보다 훨씬 다종다양하며 그렇기에 이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꾸준히 발전해야 한다. 그 발전을 위해 저자를 포함한 법의학자들은 현재 자신의 업무에 집중한다. 그들은 사체에 깃든 성분을 검사하고, 신체에 남은 흔적과 진술을 대조하며, 현장에 남은 갖가지 증거를 수집한다. 이 모든 과정은 죽은 자의 목소리, 혹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일이다.

생과 사를 넘나들며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의학의 기록들
어떤 편견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눈과 손으로 부검대 너머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들

인류의 역사에서 범죄가 사라질 날이 올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억울하거나 갑작스러운 죽음들이 사라지는 일은 그보다도 더 묘연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아주 버릴 수는 없다. 범죄 현장에서 싸우는 다른 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법의학자들 역시 계속하여 자신들의 기술을 제련하고 지식을 확장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이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비극을 방지하고, 억울한 상황에 부닥친 이들을 도울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의 키보드』는 법의학의 지식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거나 그 역사를 설파하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법의학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독일의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전문인이‘법의학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겪었는지 기록한 경험담에 더 가깝다. 매스 미디어에서 주로 다루는 살인이나 강간 등의 강력범죄로부터, 증거 조작처럼 좀 더 세분된 범죄들, 뮌하우젠 증후군이나 이산화탄소 중독 등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비극을 다루기도 한다.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이 사건들에 법의학자로서 참여하여 부검이나 조사 등을 통해 사건에 해결에 결정적 열쇠를 제공했는지 기록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접한 사건들 너머에 늘 인간들의 드라마가 있었음에 주목한다.
저자가 마주치는 다양한 범죄 현장은 아무런 전조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건에는 그 상황을 촉발한 인과들이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범죄 현장을 조작하는 이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면서도 그들의 심리 저편에 더 깊은 트라우마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론한다.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목숨을 잃은 일가족을 수사하던 경찰은 그들의 죽음 이전에 난방 시설을 방치한 기업 시스템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보편적으로 황당무계한 요인이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심리 상태에서 비롯되는 사건들도 있다. 그런 경우 저자는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에 주목하거나, 비슷한 사건을 방지할 대책을 찾는다. 요점은 그가 대하는 범죄 사건이 천재지변이 아닌 인간의 일임을 인지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법의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다. 모든 사건 혹은 사람의 이면에는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안에 깃든 과정과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과 손으로 진상을 보고 더듬어야 한다. ‘완전히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사건의 진실을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사건의 국면을 뒤흔들 수 있는 증거를 쥐게 된다. 이 증거야말로 법의학자들이 ‘죽음의 키보드’를 두드려 얻을 수 있는, 또 얻어내고자 하는 결과물일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1장 죽음의 키보드
2장 퍼즐 살인범
3장 살인 유령
4장 가짜 단서
5장 목숨을 위협하는 모성애
6장 소리 없는 죽음
7장 인터넷 애인
8장 강간살인
9장 남은 것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본문중에서

우리 법의학자들은 ‘죽음의 키보드’를 다룰 줄 안다. 분명히 말하지만, 죽음에는 아주 특수한 키보드가 장착되어 있다. 지금부터 내가 포괄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죽음의 목록이 너무 학술적이고 삭막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인이 열거된 그런 목록만으로는 죽음의 갖가지 얼굴과, 이를 둘러싼 복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다. 개개인은 저마다 독특하며, 개별적인 죽음 하나하나도 마찬가지로 독특하기 마련이다. 빠르건 느리건 사람을 저승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이 많은 방법을 사망 유형별로 구분하면 ‘자연사’‘비자연사’‘사인불명’ 딱 세 가지로 압축된다. 법의학자가 담당하는 것은 뒤의 두 가지다. -12~13쪽

수사관이나 법의학자라면 누구나 현장의 단서가 조작될 수 있음을 안다. 가령 자살로 보이는 현장의 유서나 시신의 손에 들린 총기 등은 살인을 숨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단서들이다. 심지어 실험실의 결과나 중대 형사 범죄의 피해를 입은 생존자의 신체 부상까지도 위조할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엉뚱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아이디어의 풍요에는 끝이 없는 것 같다. (…) 그러나 노련한 법의학자를 속이기 위해서는 〈덱스터〉나 〈CSI: 마이애미〉 시리즈 몇 편을 시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최근 베를린의 한 의사가 뼈저리게 체험했듯이 의대 졸업증도 충분한 자격이 되진 않는다. -94쪽

이런 생각은 직감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직감의 신호에 주목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사람의 직관은 잠재의식이 오랜 세월 겪은 경험의 전체적인 합계로서 나타날 때가 많다. 이번 사건에서 내 직관은 이 사건이 일산화탄소 중독과 관련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시신의 혈액은 선홍색으로 변색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뭐라고 진단할 수 없었다. 나는 연구소 독물학자들에게 혈액의 헤모글로빈에 함유된 일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해서 즉시 결과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포름알데히드 검사 같은 비전문적인 속성 검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장클로드 부아니 가족 전체의 목숨이 달린 일일 수도 있었다. 사망자의 혈액이 선홍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올바른 판단인지 시급히 확인해야 했다. -196쪽

반데라의 말에 따르면 그와 케스트너는 서로 칼을 잡으려고 티격태격했고 그때 칼날이 케스트너의 몸을 향했다.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케스트너가 정말 반데라로부터 칼을 빼앗으려고 했다면, 칼끝이 자신의 몸으로 향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우리가 검시할 때 케스트너의 손이나 팔뚝에서 방어흔이 확인되어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는 반데라가 묘사한 범행 과정과 완벽히 불일치하는 현상을 두 가지 더 보여주었다. 첫째, 케스트너의 하복부를 거의 수평 방향으로 찌른 약 14센티미터 길이의 상처는 쌍방의 싸움에서는 절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절창으로 생긴 구멍은 방어할 틈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당할 때만 생길 수 있다. 둘째는 한층 더 중요한데, 케스트너의 복부 부상은 공격자가 반드시 ‘두 번’ 찔렀을 수밖에 없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264쪽

현실에서의 법의학은 범죄 소설 작가의 상상력보다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나 역시도 텔레비전 시청자와 범죄 소설 독자가 법의학에 매혹되는 일에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다. 이곳에 속한 나 또한 의학과 기술, 실험실, 건강한 인간의 오성五性이 보여주는 인식에, 또 사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반전에 매일 새롭게 전율하곤 한다.
법의학자에게는 유익할 뿐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성격적 특성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우리는 선입견 없이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 편견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기대서는 안 되고, 완전히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사망 사건을 대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349쪽

저자소개

박병화 [역]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문학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고려대학교와 건국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강의했고 현재는 출판번역 에이전시 유엔제이에서 영어 및 독일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소설의 이론』, 『현대소설의 이론』, 『수레바퀴 아래서』, 『사고의 오류』, 『공정사회란 무엇인가』, 『유럽의 명문서점』, 『최고들이 사는 법』, 『하버드 글쓰기 강의』, 『자연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슬로우』, 『단 한 줄의 역사』, 『마야의 달력』, 『두려움 없는 미래』, 『에바 브라운 히틀러의 거울』,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저먼 지니어스』, 『나는 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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