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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중에서]
6개월 만에 또 한 권을 묶는다. 열네 번째 시집이다.
일상이 일상인 채로 시를 찍어 올리고, 시는 줄을 서서 제자리를 부담없이 찾아 앉는다. 나의 시는 책으로 나오는 월간지나 계간지에 들어갈 군번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에 앉을 자리는 이미 예약되어 있고 독자들은 그 공간에서 클릭 하나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내 시는 그 새로운 공간을 누비는 야생조수나 밀림의 풍상 같은 것으로 개량되거나 진화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시가 일상에서 일상이 내는 속도를 따라 제 길을 충실히 달려온 것일 뿐이다.

진주에는 남강이 있고 내 처가가 있다. 진주 시인들을 만나면 처갓집 식구들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특히 강희근을 만나면 더욱 그렇다. 그는 옛날 처가에 놀러간 나를 두고 ‘처갓집에 온 시인’이라는 글을 쓰고 지금도 그 글은 내 스크랩북에 있다. 1970년 3월 13일 경남일보. 강희근은 왈 “처가에 와 보름씩이나 묵었다 간 시인. 그는 이승훈이다. 이 진주에 처가를 만들어 놓고 강희근과 내통해 술을 퍼마신 얇고 하얀 사내” 운운. 그리고 37년이 지났다. 그의 시는 초기에 보여주었던 자연에 대한 관조와 간결한 서정의 세계를 지나 이제는 일상에 대한 잔잔한 관조와 풍자의 세계를 보여준다. 지난 여름 그가 불러 산청까지 가서 해질 무렵 오리 전문 식당에서 진주 시인들, 산청 시인들과 함께 마시던 맥주 생각도 나고 오늘처럼 춥고 바람 부는 날이면 따뜻한 진주 햇살이 그립다. 진주에 그가 사는 게 아니라 이젠 그가 진주라는 생각이다. 그의 시는 이제 남도 가락이 밴 아름다운 풍류다.
_이승훈(시인·한양대 명예교수)

<차례>
제1부 하일면
라면 _ 12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사랑채 _ 14
운주사 인연 _ 15
잘가거라 그늘 _ 16
자면서 시 쓰기 _ 18
연말 _ 20
수동을 지나며 _ 21
하일면 _ 22
관문 _ 24
종소리 _ 25
귀현리 시인 _ 26
우리들의 새벽 _ 27
피켓을 들고 _ 28
새 _ 30
정초 _ 31
석계 마을 _ 32

제2부 겨울 진주성
겨울 진주성 _ 34
장어집에서 _ 36
마천으로 출근하는 사람 _ 37
야소골 풍경 _ 38
삼월에 _ 40
일요일 한때 _ 41
돈으로 피는 꽃 _ 42
초대 _ 43
벚꽃 그대 _ 44
선거에 대하여 _ 45
독산리 유정 _ 46
수곡천변에서 _ 48
지세포 같은 데 가서 _ 49
산도화 _ 50
금대암에서 _ 51
산채 비빔밥 _ 52
연인의 이름같이 _ 54
통영 입구 _ 56
수도원 방문 _ 57

제3부 고별 강의를 앞두고
고별 강의를 앞두고 _ 60
그리움의 방 _ 62
궁벽(窮僻) _ 63
덕산 오후 _ 64
김달진 생가 _ 65
싼판에서 _ 66
돌, 돌팍에 가 _ 68
사흘들이 _ 69
1회 _ 70
풀꽃 _ 72
프로포즈 _ 73
행사장에서 _ 74
이형기傳 _ 76
독립국 _ 78
여름 바다 _ 79
마이클 핸슨 _ 80
신고 _ 81

제4부 중국 기행
중국 기행 1 _ 84
중국 기행 2 _ 85
중국 기행 3 _ 86
중국 기행 4 _ 87
중국 기행 5 _ 88
중국 기행 6 _ 90
중국 기행 7 _ 91
중국 기행 8 _ 92
중국 기행 9 _ 93
중국 기행 10 _ 94
중국 기행 11 _ 95
중국 기행 12 _ 97
중국 기행 13 _ 98
중국 기행 14 _ 100
중국 기행 15 _ 101

│해설│
나 보기와 세상 보기·신경득 _ 103

해가 솟아오르면
우리는 동학사로 가리라 눈이 쌓이고 쌓여
발이 빠지거나 빠져서 전봇대같이 서게 된다면
우리 일정은 함께 전봇대가 되리라
새벽,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을 것이다
사람의 발목을 피해 은혜로이
눈이 눈썹 위에 머리칼 위에 어깨 위에 내리다가 앉다가
꼿꼿이 선다면
우리들 하루가 된다면
노을이 된다면……
-<우리들의 새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