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 다니던 때는 생물 교과서에 진화와 유전 관련해서 다윈과 라마르크 정도밖에 서술되지 않았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이 학교를 순회 방문하던 시기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유전학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1983년 12월 「유전공학육성법」을, 1984년 9월 「유전공학육성법시행령」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유전공학 발전의 법적 토대를 닦아 놓았다'라고 나온다. 고려대학교에 유전공학과가 생긴 것이 1984년이었으니 우리나라의 유전공학 역사는 30년 겨우 넘었다. 그사이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2001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결되는 등 엄청난 진전이 있었지만, 과학 기술을 떠나 철학과 연계해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단계에서 얼마나 진전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등으로 과학 철학을 크게 진보시킨 리처드 도킨스는 1976년 <이기적 유전자>에 이어 1982년에 이 책 <확장된 표현형>(2016,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을 펴냈다. <이기적 유전자>는 제목을 참 많이 들었지만 아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제라도 리처드 도킨스를 알고 싶어서 <확장된 표현형>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500페이지가 넘어서 엄청 두껍다. 내용이 워낙 어렵다 보니 번역자도 생명공학, 진화학, 과학철학을 공부한 교수와 박사, 석사로 구성되어 있다. 번역은 단순하게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바를 올바르게 전해야 하고,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원저가 워낙 방대하고 깊고 난해한 내용이다 보니 번역자도 이렇게 쟁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지식이 짧은 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엄청나게 헤매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수준에서 이야기했다면 <확장된 표현형>은 유전자가 속한 개체에서 벗어나 외부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인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전자가 표현형을 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개체를 좌우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런 표현형이 외부로 확장되는 것을 저자는 비버가 댐을 쌓는 것, 조개삿갓이 숙주인 게에게 침입해 거세한 다음 자신의 알을 들보게 만드는 것, 자신과 가장 많은 유전자를 공유한 후손을 편애하는 것 등의 사례로 설명한다. 많은 부분은 <이기적 유전자>를 낸 후 발생한 논란에 대한 설명, 다른 학자들의 여러 연구 사례에 대한 인정과 설명과 반발로 구성된다.

저자가 새로 만들어낸 용어와 개념이 많은 데다, 같은 용어에 대해 여러 학자가 저마다의 정의와 범위를 부여해 사용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예를 들어 '적합도'는 5가지 정의가 소개되고, '다윈주의'라는 개념 자체도 포용하는 범위가 다르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다양한 논쟁과 배경 지식을 모르는 내게는 이 책이 정말정말 어려웠다. 동물의 행동을 이용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흥미롭게 읽혔는데, 철학으로 들어가면 도무지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야기하는 '확장된 표현형'은 대략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명들이 발휘하는 생존 전략과 번식 전략은 이기적 유전자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능력을 알아보고 감탄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 분야의 업적뿐 아니라 왕립문학학회와 LA타임스에서도 문학상을 받는 등 문학적으로도 인정받는 저자다. 그의 다른 책, 좀 더 쉬운 책을 읽어서 그와 친해진 다음 <이기적 유전자>부터 찬찬히 읽어볼 참이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개정 출간한 번역자와 출판사에 감사한다.

여행에 이유가 있을까? <여행의 이유>(2016, HK여행작가아카데미 지음, 티핑포인트 펴냄)이라는 책을 골라 읽으면서 제목에 대해 든 생각이다. 나는 게을러서 방콕하면서 눈과 머리로 여행을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행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떠나곤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여행서가 꾸준히 다양하게 나오는 것일 게다.

지금까지의 여행이 대개 개인적이고 즉흥적이었다면, <여행의 이유>를 쓴 HK여행작가아카데미는 '여행작가 양성 교육기관'으로서 여행과 글과 사진을 체계적으로 가르친단다. 2014년 8월에 강의를 시작했으니 이제 만 2년이 되었는데, 벌써 7기에 400명 이상이 졸업했다니 열기가 대단하다. 그 수강생들 중에서 심화반 1기와 2기 졸업생 29명이 이 책에서 각자의 여행기를 들려준다.

프롤로그는 여행작가이자 시인인 최갑수 님의 글이다. 베테랑 여행작가인 그가 꼽는 여행의 이유는 '불편함과 당혹스러움과 비참함이 이어지는 그 사이사이에 벼락처럼 내리는 행복이 있기 때문'(13쪽)과 '드디어 이곳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15쪽)이었다. 생활에 어쩔 수 없이 배어 있는 돈과 김치 냄새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는 라오스에서, 노르웨이에서, 베트남에서 전 세계 여행객들에게 여행의 이유를 묻고 우리에게 그 대답을 들려준다. 너무나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을 살고 타인의 삶도 존중하라는 것'을 배우는 계기가 여행이라고 말이다.

역시 시인인 고두현 님의 여행에는 삶과 시가 듬뿍 들어 있었다. 그 삶이 바로 길고 긴 여행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방송인이자 작가인 명로진 님은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LA로 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샬롯과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여행은 이처럼 우연하게 만난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여기에 HK여행작가아카데미의 원장이자 여행 전문 기자인 최병일 님의 글이 이어진다. 여행자 중에서도 고수들만이 도전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인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드디어 아카데미 심화반 학생들의 여행기가 펼쳐진다. 29명의 이야기가 330쪽에 달하니, 중간중간 시원하게 들어간 사진들의 분량을 빼면 한 사람당 10쪽 정도 돌아간다. 몽골 초원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제주도로, 포항으로, 프랑스로, 통영으로, 스코틀랜드로, 세계 곳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혼자 여행한 사람도 있고, 아들과, 딸과, 아내와, 아버지와, 친구와 여행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저마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들은 여행과 삶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직접 찍은 사진들도 함께 있어서 좋다. 함께 실린 김경우 작가의 사진들이 워낙 뛰어나서 비교되긴 했지만, 이들도 사진과 여행에 대한 열정이 충만하니 언젠가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꼭 국제선을 타고 외국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카페에서 커피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것도, 키우는 고양이를 데리고 집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토성에 가는 것도, 동네 뒷골목을 거니는 것도 여행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니, <여행의 이유>를 보고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고 가볍게 떠나면 될 일이다. 여행은 생활이었다.

신혼여행을 태국 패키지 여행으로 다녀왔다. 여행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준비할 여건도 안 되었고, 언어며 노력 등도 없었기 때문이다. 돈과 체력만 있으면 충분한 패키지 여행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한국인 패키지 여행객이 묵는 호텔이 정해져 있는지, 아침에 밥을 먹으러 가면 한국인을 위한 구역이 따로 있었다. 얼른 밥을 먹고 또 길고 바쁜 하루를 보내려다 보면, 저쪽 구역에는 나이가 든 서양인 부부들이 여유로운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내가 가장 부러웠던 모습은 나이 든 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이 들면 나도 그렇게 여행해야지 마음먹었는데, 이루기 어려울 듯하다.

어쨌든 최대한 많이 보고 최대한 많이 다니고 최대한 많이 먹는 여행은 이제 지나가고, 의미를 담은 여행 쪽으로 바뀌는 듯하다. 한순간 휙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이 아니라 오래 머무르며 생활하는 여행자라는 럭셔리 스타일도 많이 보인다. <스페인 어쩌면 당신도 마주칠 수 있는 순간들 79>(2016, 김영주 지음, 생각을담는집 펴냄)의 저자가 바로 이 '머무는 여행' 트렌드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머무는 여행 시리즈는 2006년 여행한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서 토스카나, 뉴욕, 프로방스, 지리산으로 이어졌단다. 이는 길 위의 여행 시리즈 4권으로 이어졌고, 저자가 9번째로 쓴 이번 책은 '순간들'이 테마다. 이 테마로 또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되겠다.

이번 스페인 여행은 안식년을 맞은 남편 분과 함께했다. 혼자 여행하다가 같이 여행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친구와 같이 여행 갔다가 의가 상했다는 말도 종종 들린다. 그러나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결혼 생활도 길고 긴 여행 아니던가. 게다가 저자가 서문에 쓴 것처럼 이번 여행은 학습적 분위기를 쏙 빼고 순간에 충실하기로 했다니 주어진 하루하루를 즐기면 된다. 서울에서 출발해 바르셀로나, 세비야, 카디스, 타리파, 미하스, 하엔, 그라나다, 네르하, 말라가를 지나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그들의 스페인 여행은 비가 와도 괜찮고 해가 나면 좋고, 예약하지 않아서 원하는 만큼 보지 못해도 괜찮고, 기대하지 않고 만난 문화는 더 좋았다. 그렇게 순간이 모여 여행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여유와 자유가 충분히 느껴졌다.

나는 스페인을 가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가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이들의 여행이 얼마나 충실한지 모르고, 여행을 충실하다 아니다 평가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다만 이들은 순간에 충실했다는 것, 둘이 함께 있어서 부럽다는 것, 스페인이 참 알록달록하니 보기에 좋았다는 것을 느꼈다. 저자의 책들을 보면 세계 이곳저곳을 다녀왔는데, T와 함께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순간들은 더 특별하게 남을 것 같다. 빛나는 자유의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