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병에 걸려 몸져누운 어머니가 홍시를 먹고 싶어 하셨다. 효심이 깊은 아들은 홍시를 찾아 무작정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때는 여름이어서 어디서도 홍시를 구할 수가 없다. 애타는 아들 앞에 호랑이가 나타나 도와주고, 홍시를 먹은 어머니는 기운을 차린다.

<여름에 홍시 구한 효자>라는 구전설화다. 옛날에는 당연한 이야기다. 옛날까지 갈 것도 없이,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제철 음식이 아니면 구하기가 어려웠다. 농경과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농경과 저장에 이어 무역까지 발달해서 계절뿐 아니라 공간의 제약도 사라졌다. 한여름의 홍시, 한겨울의 수박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못 구할 열대 과일이 거의 없을 정도다. 전통시장에서도 제철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으니, 먹을 것이 풍성해진 반면 계절감은 줄어들었다.

<365일 음식일기>(2017, 김연미 지음, 이봄 펴냄)는 365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 내려간 일기다. 제목은 '음식일기'지만 음식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그릇과 사진과 사람과 생활이 함께 등장한다. 책 표지에서 '채소와 과일에게는 저마다의 계절이 있습니다'라고 쓴 것처럼, 제철을 맞아 다양하게 요리되는 채소와 과일의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다. 1월 6일은 '탱글탱글 살이 오른 뽀얀 햇굴'을 넣어 뚝배기에 밥을 했고, 2월 26일에는 금귤을 설탕과 꿀에 졸여 말린 금귤 정과가 소개된다. 4월 18일에는 제주도 여행을 가서 초록빛 청보리를 보았고, 5월 3일에는 아스파라거스가 제철이라고 한다. 사과는 그냥 먹는 것뿐 아니라 청으로 만들고, 케이크 토핑이 된다. 무화과는 샐러드로, 빵으로, 잼으로 태어난다.

20대까지는 채식을 했다는 이야기, '시골 여인'인 엄마께 받은 생활 속 교육 이야기가 풍성하다. 꼭 제철 과일과 채소만이 아니라 달걀과 우유 없이 빵 굽는 솜씨도 일품이다. 머핀, 차, 피자, 떡, 술 등도 생활을 다채롭게 한다. '음식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고 호기심을 잃지 않는'(299쪽)

오늘 7월 22일 자는 중복을 앞두고 식욕이 떨어져서 '다시마, 멸치, 디포리, 무를 넣고 끓인 장국에 햇감자, 양파, 호박을 썰어 넣고 당근즙으로 밀가루 반죽을 해서 당근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고 적혀 있다. 들어가는 재료도 재료거니와 불 앞에서 얼마나 있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지만, '할 때는 불같이 덥지만 먹고 나면 속까지 시원하다'라는 그다음 구절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물론 나는 보기만 할 뿐, 따라 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매일을 다채롭게 즐기는 저자가 참 부럽다.

'푸드 포토그래퍼'라는 직함에 걸맞게 사진들이 모두 예쁘다. 간간이 레시피가 덧붙여 있어서, 쉽다 싶은 것은 시도해볼 마음이 든다. 그중에서도 찬바람이 불면 '새우장'을 담가볼까 싶다. 요즘 천도복숭아가 지천이니 천도복숭아와 설탕, 레몬만 준비하면 되는 천도복숭아 잼도 욕심이 생긴다.

'음식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고 호기심을 잃지 않는'(299쪽)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삶의 다채로움을 깨닫는다. 이제 조금씩 밥상과 생활에 계절을 들여오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언니가 가게에 들어가면 슬금슬금 손님들이 들어와서 어느새 북적거린단다.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의 작가 김영희 님 책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에너지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수잔 이펙트>(2017, 페터 회 지음, 현대문학 펴냄)에는 이런 에너지가 엄청난 여자 수잔 스벤센이 주인공이다. 그녀에게서 일정 반경 안에 들어오면 자신도 모르게 솔직해지고 그녀에게 끌리게 되는 에너지. 어렸을 적부터 자신에게 이런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수잔은 그 실체를 알기 위해 세계적인 물리학자 안드레아 핑크에게 접근하고, 안드레아를 통해 물리학을 배우면서 '사람 사이의 파동 전파'라고 명명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이 힘은 남편인 라반, 쌍둥이인 딸 티트와 아들 하랄에게도 존재하며, 이들은 이 힘을 이용해 각종 사건을 일으켰다가 조건부 사면을 받는다. 그 조건은 수십 년 전 존재했던 미래 예측 모임의 마지막 회의 결과를 알아내는 것. 수잔과는 무관해 보이는 이 모임의 과거를 캐면서 수잔은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부모님, 남편, 아들딸에 대해 알아가게 되고, 덴마크 정부의 핵심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편이어서 '수잔 이펙트'라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의 대가 안드레아 핑크가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수잔 이펙트를 연구하는 것을 보면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사람을 끄는 힘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잔을 보니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끌어들이는 것까지는 행운이 작용하겠지만, 그 후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노력에 달렸으니 말이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가정이라고는 하지만 한 가정의 위기라고 생각했던 이 일은 점점 커져서 덴마크로, 더 나아가 인류 전체로 범위를 넓힌다. 이야기는 줄곧 냉정하게 사건을 관찰하는 수잔의 시점으로 쓰여 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등장해서 더 급박한 사건이 벌어지는데도 나는 한발 떨어진 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 순발력과 지능, 통찰력을 갖춘 수잔을 그만큼 믿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나는 이미 수잔 이펙트에 휩쓸렸는지도 모르겠다.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게다가 질이 높은지 낮은지 잘 구분하지 못하는 성향 때문에 내 생활에는 명품이 없다. 그래서 <윤광준의 新생활명품>(2017, 윤광준 지음, 오픈하우스 펴냄)을 읽으면서, 저자가 찾아내고 소개하고 이야기를 펼쳐놓는 생활명품들에 감탄한다. 게다가 그런 명품들을 알아보고 아끼는 눈을 가진 저자에게도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도 가끔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 작은 시장이지만 그 안에서 최상의 품질을 선보이는 '생활명품' 브랜드들이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된다. 1장 '멋과 취향을 품은 일상'에는 항균 탈취제부터 일회용 종이 그릇, 노트북 가방, 안경테, 깔창, 가위, 효자손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들어 있다. 하나하나에는 저자의 이야기가 듬뿍 가미되어서, 그 제품을 사용하는 상황과 장소와 용도까지 선하게 그릴 수 있다. 그것도 전 세계를 넘나들며 체험할 수 있다. 1장에 소개된 여러 제품 중에서 이름까지 재미있는 '요괴손 등긁개'가 마음에 쏙 들었다.

2장 '좋은 물건이 선사하는 자유'는 특히 오프라인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제품들이 많다. 예를 들면 활동복, 커피 드리퍼, 보온병, 캐리어, 우산, 멀티 툴 등이다. 오프라인 생활을 거의 하지 않기에 내게는 멀고 먼 제품들이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귀가 솔깃해진다. 유비무환이라고 하지 않던가.

3장 '보고 듣고 만지는 재미, 디지털 시대의 기기'에는 작게는 멀티탭부터 크게는 보일러까지 역시나 다양한 기기들이 손을 흔든다. 밀레 청소기를 이야기할 때는 독일 베를린에서 가전 양판점에 간 이야기가 나오고, 음악을 좋아해서 오디오에도 조예가 깊다는 이야기는 라디오와 오디오 편에서 펼쳐진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4장 '죽을 때까지 먹고 마시는 인생'에는 술과 어묵, 밥, 어란, 김이 실려서 군침을 삼키며 재미있게 읽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아는 이런 부문에서 명품을 골라내는 것이 더 어렵겠다.

마지막 5장은 '영감을 주는 생활명품의 힘'이다. 사진가로, 작가로, 오디오 평론가로 살아가는 저자에게 영감을 주는 생활명품에는 문구와 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이 도톰한 책의 마지막 꼭지는 바로 '메모지'가 차지했으니, 흔하디흔해 보이는 이 메모지 'Keep Calm and Carry On'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영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배포한 포스터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처럼 모든 꼭지에 소개되는 생활명품들에는 역사가 있고, 사회와 문화가 있으니 가볍게 읽어넘기기가 아깝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물품들 중에는 명품이 거의 없지만, 앞으로 새로운 물품을 들여올 때는 '생활명품'이라는 기준으로 엄격하게 심사할 예정이다. 누구에게든 추천할 만한 것을 골라 나만의 이야기를 붙여나갈 것이다. 그렇게 생활명품을 하나씩 더한다면 더 자유롭고, 더 재미있고, 더 영감 있는 생활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