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첫사랑', 최연지 선생님의 강력 추천을 받았건만 뒤늦게 손에 쥐었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信永 출판사 세계문학대전집에 수록된 작품(박형규 옮김)인데, 네이버 책에서는 검색이 안 되네.
맨 위 상자 속 'No Image'가 외로워서 찾은 다른 중편선. 역시 '첫사랑'이 수록돼있다. 사랑 얘기 좋아하는 건 시대 불문, 만국 공통이니까. 게다가 첫사랑이라니,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뽀뽀' 가사를 빌리자면 '말해 뭐해'다.
이야기는 파티가 끝난 후 주인과 남은 손님들이 서로의 첫사랑 얘기를 묻는 데서 시작한다. 재미없는 첫사랑 이야기들이 오고가던 중, 점잖은 노신사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세상에 흔한 종류의 것이 아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두 주일 후, 그들이 다시 모인 자리에서 첫사랑 이야기가 적힌 수첩이 공개되고 시간은 1833년 여름, 그가 열 여섯 살이던 때로 돌아간다.
젊고 빼어난 미남자인 아버지와, 남편보다 10살 연상인 돈 많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아들, 솜털 뽀송뽀송한 도련님은 옆집에 이사 온 가난한 귀족의 딸 지나이다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날씬하고 키가 큰 이 소녀는 '파랗게 우거진 딸기 덩굴'에 둘러싸여, 회색의 꽃다발로 청년 네 사람의 이마를 차례로 때리고 있었다. 소녀에게 매혹된 남자들이 쑥쑥 이마를 내밀고, 부딪힌 자루 모양의 꽃은 소리를 내며 터진다... 좀 우습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한 첫 등장이다.
즉시 지나이다의 추종자 중 한 명이 된 소년은 계속 이웃집을 맴돌며 다섯살 연상의 이 매력적인 누님을 지켜본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면서 그녀를 묘사하는 통에, 나조차 반할 지경;;) 자신의 아름다움과 쾌활함을 무기로 거리낌없이 남자들을 홀려대던 '도화살의 화신' 지나이다.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때론 오만하기까지 한 이 여주인공은 그 동안 내가 읽어 온 고전 문학에선 본 적 없는 참신한 캐릭터였다. 사랑을 받아줄 듯 다가왔다가 까르르 웃으면서 멀어지고, 뚫어져라 얼굴을 쳐다보며 감미롭게 속삭이다가 아프게 손가락을 때리는가 하면, 그 손을 잡고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그녀의 집에 찾아오는 사나이란 사나이는 모두 그녀에게 빠져 있었고, 그녀 쪽에서는 그것을 모두 사슬에 꿰어서 자기 발밑에 엎드리게 했다.'
사슬에 꿰인 소년은 그저 행복에 겨워 혼잣말을 한다. '오오, 잠에서 깨어난 영혼의 조용한 정감이여! 그 상냥스런 울림이여! 그 기쁨과 고요함이여! 사랑의 최초의 감동! 이 녹아 버릴 것 같은 법열이여! 그대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옮겨 적고 나니 손이 좀 오글거리는데, 소설 전체가 이런 격앙된 어조 범벅이라서 읽다보면 나도 자연스레 '오오' , '사랑이여!' 하고, 옛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리게 되더라;)
아, 소년이 열렬히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 더 있다. 아들한테서 '남성의 모범'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근사한, 소년의 아버지. 그를 묘사한 이 문장만 봐도 아들의 아버지 사랑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흔히 나는 아버지의 지혜로워 보이는 아름답고 깨끗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때가 있다. 그러면 가슴이 두근거려 와서 몸도 마음도 아버지에게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파더 콤플렉스다;) 그냥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가질 수 있을 만큼의 것을 갖도록 하여라. 남의 손에서 놀지 말아라.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 인생의 묘미는 거기에 있는 것이란다.' 이런 조언을 아들한테 들려줄 정도로 카리스마도 있는 중년의 남성이니, 이쯤되면 아들이고 아내고 그 남자한테 꼼짝을 못할 만도 하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지나이다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뇌에 휩싸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나이다의 변덕과 이상행동은 점점 더 심해지고, 추종자들도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하며 날을 세운다. 질투에 괴로워하면서도 오로지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소년은 그녀가 시키는대로 4미터가 훌쩍 넘는 담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하는데, 이 때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팠던 주제에 느닷없이 얼굴에 쏟아지는 입맞춤에 더없는 행복을 느낀다. 하라는 공부도 안하고 그녀를 구출해내는 공상 따위에 빠져 정신없이 길을 헤매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자신의 아버지와 지나이다가 다정하게 말을 몰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의심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지만, 며칠 뒤 한밤중에 망토를 뒤집어 쓰고 정원을 걷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한 뒤로는 의혹과 분노로 인해 '속에서 무엇인가가 죽어 가는 것 같은 일종의 이상한 외로움'을 느낀다. 집에 이상한 편지까지 배달되면서 어머니까지 불미스런 사실을 눈치채게 되자 가족은 결국 모스크바로 이사를 간다. 이렇게 끝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 지나이다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멀리 말을 타러 갔다가 숲 속 작은 집에서 지나이다와 아버지가 밀회를 갖는 모습마저 목격한다. (그 유명한 채찍씬이 여기서 등장.; 옆에서 줄거리를 보던 신랑이 한 마디로 요약한다. '막장이구먼')
진정한 막장 드라마라면 여기서 끝날 리가 없겠지만 - 본격적으로 시작될 타이밍이지; - 이야기는 갑자기 확확 진행된다. 소년은 아픈 첫사랑의 기억과 싸우다가 두달 후 대학에 입학한다. 그로부터 반년 뒤, 그의 아버지가 뇌일혈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아들한테 이런 편지를 남기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여라. 그 행복과, 그 독을 무서워하여라......' 다시 4년 후, 대학을 졸업한 소년은 누군가의 부인이 된 지나이다가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숙소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망설이며 2주 동안 뜸을 들이는 사이,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갑자기 숨을 거둔다.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작가란 참 무서운 존재다'하는 거였다. 이 얘기가 뚜르게네프의 실화가 반영된 얘기라는데, 그렇다면 그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첫사랑 여인한테 일종의 복수를 한 게 아닌가? 물론 인물들이 지나치게 미화돼 있어서 작가가 그들한테 악감정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막판에 그 둘을 허무하게 휙- 죽여버린 건, 의도했든 아니었든 일종의 복수였을 지도 모르겠다. 책이 읽히는 한, 두고두고 반복될 복수.
뭐, 그건 작품 외적인 얘기고, 이야기 속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맘때의 설렘과 좌절, 열정과 허무를 어쩜 이렇게 잘 그려냈나 싶다. 섬세하기 그지없는 소년을 따라 가슴이 뛰었다가 아팠다가 했던 게... 모처럼 소설을 (그것도 러시아 소설을) 읽어서 그런가? 머릿속이 좀 흐물흐물,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이었다. '첫사랑' 하면 떠오르는 아리아리한, 그런 거. 첫사랑에 빠졌던 시기의 요상한 정신상태 같은 걸 새삼 떠올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