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종문은 물론 반탁 진영에 있었다. 반탁이 옳다는 신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이승만의 노선이고 양근환과 문창곡의 노선이기 때문이다. 반탁운동이 성공하는 날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면 나의 팔자가 트인다. 이것이 이종문의 소박하고 굳은 신념이었다... 

...정치란 무서운 거유, 목적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정치니까 말유. 정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무수한 살인도 사양하지 않소,..그분이 하는 일이면 일일이 옳거니 하고 따라야 하오. 정치란 이겨놓고 볼 경쟁이니까 한번 마음을 먹어으면 이겨야 할 게 아뇨...정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놓고 나면 뒤가 좋지 못하오, 깨끗한 정치를 못하게 되죠...그러나 이건 우리처럼 무력한 사람의 소망이고 정권을 잡으려고 덤비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단 말요. 정당한 수단으로 달성한 목적은 보람을 가져도 정당치 못한 수단으로 이룩한 목적은 그것이 곧 화근이 되는 법인데, 그런 걸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딱하다는 거지...

..해방하고 독립도 될끼라쿠는데 계속 노름판으로 돌아댕기도 될까. 이어 그는 그저께, 말하자면 해방이 된 그날 바로 그 시간부터 자기의 노름 끗발이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것이 운명의 지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의 지시라면 그것은 계속 노름을 하라는 뜻일까, 앞으로는 하지 말라는 뜻일까...노름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치면 나는 앞으로 뭣을 해야 하나, 농사만 지어 묵고 살아야 되나. 그건 안 되것고... 그러자 노름판으로 갈 것이 아니라 서울로 가봤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일었다. 서울로 가면 혹시 할 일이 생길는지 모른다. 하는 마음과 함께, 독립이 된다쿠는데 서울 구경 한번 못했대서야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이 어울렸다. 어떻게든 서울에 가기만 하면 기막힌 운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내 오늘 서울 갈란다. 종문이 뚜벅 말했다...

 

...그들에겐 그들의 세계가 있었다. 즉 노름꾼들에겐 노름꾼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다고 할 수 있는 발견이었지만 왕문과 문하에게는 큰 교훈이 되었다. 위정자는 마땅히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거늘! 죽은 박용수는 노름꾼의 세계에선 일종의 영웅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 노름 기술만으로 삼전도장의 빈객이 될 수 있었다면 능히 짐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가 처형된 소식이 차츰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내노라하는 노름꾼이 박용수의 가족을 찾아왔다. 그 가운데 면식은 없으면서 이름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모두들 박용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노름꾼으로서의 최저한도의 의리하고 생각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빈손으로 오진 않았다. 얼마간의 돈과 자기들이 먹을 양식은 휴대하고 있었다. 궁한 사람들의 교제엔 그 나름대로의 법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