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녀는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속내 이야기를 누구에겐가 털어놓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뜬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바람처럼 회오리치는 이 알 수 없는 불안을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그녀는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따라서 기회도, 용기도 없었다...

...샤를르가 하는 말은 거리의 보도처럼 밋밋해서 거기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뻔한 생각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줄지어 지나갈 뿐 감동도, 웃음도, 몽상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는 루앙에서 사는 동안 한번도 극장에 가서 파리에서 온 배우들을 구경하고 싶다는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그는 수영도 모르고, 검술도 모르고, 권총도 쏠 줄 몰라서, 어느 날 그녀가 소설을 읽다가 마주친 승마 용어의 뜻을 설명하지 못했다... 

...반대로 남자란 모름지기 모르는 것이 없고, 여러 가지 재주에 능하고 정열의 위력, 세련된 생활, 온갖 신비들로 인도해 주는 능력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사내는 무엇 하나 가르쳐줄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아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 흔들림 없는 이 평온과 이 태연한 둔감, 그녀 자신이 그에게 안겨주고 있는 행복 그 자체에 대하여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역사 속의 사람은 정녕 숲 속의 잡초, 숲 속의 나무와 같다. 우뚝 솟은 거목에 비길 수 있는 인물이나 잡초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궁극의 사정은 똑같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자그마한 숲도 무궁한 신비를 전개한다. 식물학자가 동원되고 곤충학자가 동원되어 역사 이래의 두뇌를 골고루 활용해도 그 신비는 닫혀진 문을 가지고 있다. 피히테는 한 개의 모래알이 왜 저기에 있고 여기에 있지 않느냐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우주의 신비는 해명될 수 있다 고 했다. 하물며 역사랴. 알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저 감동하고 경악하고 탄식하는 것이 기껏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닐까. 역사가가 될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어야 한다...백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백 년 후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골고루 하면,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용돌이가 무슨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 그러나 연극과 다른 것은, 연극에선 등장하는 배우들이 각기 자기가 맡은 역할의 의미를 알고 연기하는데, 이 현실에서의 군상들은 자기들이 맡은 역할도 그 종말도 모르고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옥은 장기 주머니 같은기라. 장이나 차나 졸이나, 적이나 동지나 할 것 없이 털어놓는당께. 하곤 5.16혁명 후의 감옥풍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유당정권으로 말하몬 장관, 차관, 국장, 과장, 순경에 이르기까지 거게다 자유당 거물을 끼어 꼭 같은 감방에 있는기라. 자유당뿐인가. 민주당 정권의 거물도 있지, 혁신정당하는 사람들도 있지, 빨갱이가 있는가 하면, 그걸 잡을라꼬 돌아다닌 경찰관도 있지. 그런데 그 잡다한 계층과 분자들이 하나의 규율 밑에 꿈쩍도 못하고 있는기라. 그런데 갖다놓은께 내 같은 것 참말로 형편이 없드마. 그 장기 주머니 속에서도 빛나는 놈이 있거던. 그게 진짜 인물이 아닌가 싶어. 그때 이종문은 경남 경찰국장 최남규와 국제신보 주필이 같이 있었다는 애기도 했다. 최남규는 그 국제신보 주필을 감옥에 처넣기가 소원이었는데 혁명정부가 대신 그의 분풀이를 해준 셈이지. 그런데 자기도 그 꼴이 되었는데 세상 참 우스운기다. 그런데 최남규는 옥사？g어. 평생을 큰 소리만 하고 살 놈 같더니만...

...아아, 이 산하! 이 땅에 생을 받은 사람이면 좋거나 나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모두 이 산하로 화하는 것이다. 이미 이종문은 산하로 되어버렸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일단 산을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