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심을 가진다는 것,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까진 납득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신비에 둘려싸여 있으니까. 우리의 힘으론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언제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 공포 속에 있으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그 많은 비참을 보고도 구해줄 능력이 없다는 한탄을 되씹고 있으니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압력을 견디며 살고 있으니까. 어떤 초월자의 의지를 느끼고, 어떤 신의 앞에 겸손하게 처신해서 외포에서 해방될뿐 아니라 스스로 안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지. 그러니까 천주님을 찾고, 부처님을 찾고, 알리를 찾고 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까진 이해할 수 있어도 하필이면 천주, 하필이면 알라, 하필이면 부처님을 찾야야 할 까닭은 알 수 없단 말요. 어떤 절대자를 심정적으로 공상할 수는 있으나 이성과 심정이 합친 전신적으론 절대자를 상정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단 얘기요. 그러니 나의 종교에 대한 인식은, 종교심까질 거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교만이고, 그렇다고 해서 천주님에의 신앙을 고집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경솔 또는 미망이란데 있소...

...어느 해이고 희망이 없이 밝은 적은 없다. 그러나 어느 해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절망적인 의미를 갖는다. 1950년의 새해도 예외일 순 없었다. 허무적인 기분을 가진 사람, 타성으로 그날그날을 사는 사람은 새해라고 하는 관념에 반발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지만, 대개는 이 해야말로 하고 주먹을 쥐어보기도 하고 입을 다물어보기도 하면서 각기 야심대로의 마음을 다진다. 남로당은 이 해야말로 그들의 혁명과업을 완성해야 하는 해라고 생각하며 전술과 계획을 짰다. 대한민국 경찰은 이 해야말로 좌익세력의 뿌리를 뽑아야 할 해라고 다짐을 했다. 한민당은 이 해야말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해서 자기들 손아귀에 정권을 넣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한독당을 비롯한 임정계의 불평파들은 이 해야말로 이승만을 제거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규합해야 하는 해라고 입을 악물었다. 좌우의 과격한 노선에 싫증을 낸 지식인들은 이 해야말로 온전한 정치적 터전이 잡혀야 할 것이란 가느다란 희망의 등불을 달았다. 장사꾼의 뺨을 칠 정도로 현실적이고 영리한 무리들은 단정이 선 지 2년밖에 안 되는 동안에 굳어져간 체제에 이 해야말로 편승할 기회를 가져야 하겠다고 작정을 세웠다...

...우리의 이종문은 물론 반탁 진영에 있었다. 반탁이 옳다는 신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이승만의 노선이고 양근환과 문창곡의 노선이기 때문이다. 반탁운동이 성공하는 날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면 나의 팔자가 트인다. 이것이 이종문의 소박하고 굳은 신념이었다... 

...정치란 무서운 거유, 목적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정치니까 말유. 정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무수한 살인도 사양하지 않소,..그분이 하는 일이면 일일이 옳거니 하고 따라야 하오. 정치란 이겨놓고 볼 경쟁이니까 한번 마음을 먹어으면 이겨야 할 게 아뇨...정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놓고 나면 뒤가 좋지 못하오, 깨끗한 정치를 못하게 되죠...그러나 이건 우리처럼 무력한 사람의 소망이고 정권을 잡으려고 덤비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단 말요. 정당한 수단으로 달성한 목적은 보람을 가져도 정당치 못한 수단으로 이룩한 목적은 그것이 곧 화근이 되는 법인데, 그런 걸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딱하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