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멜로 이야기, 바보 빅터의 작가로 유명한 호아킴 데 포사다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얼른 구입했다. 여전히 짧은 문장과 쉬운 어휘로 예쁘고 아기자기게 적어낸 문체가 눈길을 끌었다. 어릴적 사고로 인해 다리를 다쳐 평생 목발을 짚게 된 어떤 소년이, 그로 인해 자괴감에 빠져 신경질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신의 집에 온 한 손님으로 인해 조금씩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사랑하는 소녀와 부모님의 희생을 일깨워가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많이 다루어졌던 소재라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데, 격무에 기운빠지고 체력이 고갈되었던 나의 상황에서는 빨리, 그리고 언제든 다시 잡아도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쉽게 흡수되는 책이라 선택이 좋았던 것 같다.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었는데, 계속해서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오늘 읽게된 한 문장 때문에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책상에 앉았지만 머릿속에 방벽이 쳐진 것처럼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을 작가의 장벽(Writer’s Block)이라 한다.
쓸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생긴다.
이를 제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한 문장을 쓰는 것이다.] -동아비즈니스리뷰에서, 이민규 교수

 

책을 열심히 읽을 때에는 오늘 읽고 내일 또 새로운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미뤄야 한 시간이 없어 그때그때 리뷰를 썼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을 핑계로 책을 읽기 게을리 하다보니, 갑지기 리뷰를 쓰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내가 일년에 100권을 목표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고 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놀라는 반응에는 무심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큰 막연함을 안겨주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듯 모든일에는 목표가 있고 목표를 높게 잡으라고 하지만 크고 높은 목표는 막연함과 왠지모를 스트레스를 안겨주는데, 막상 그 목표에 발을 들여놓고 보면, 시간이 된다 안된다에 대한 답을 내려줄 것이고 사람은 항상 그 목표에, 그 날에, 그 시간에 몰두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어느 날 친한 친구들과 수다 중에, 한 친구가 대학시절을 이야기하며 그 당시 패션디자인과에서 경영학과로 편입한 두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두 학생을 경영학과 학생들의 텃세에 피해 놀이터에 앉아 서로 뭐가 되고 싶었는지 이야기했다. 한 학생은 회계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한 학생은 은행원이 되고 싶었다고 했단다. 한명은 내친구로 현재 은행에 근무를 하고 있고, 한명은 내 친구의 친구로 회계사가 되고 나서 2년쯤 근무하다가 금융권으로 업무를 바꾸기 위해 다시 공부 중이다. 최근에 두 친구는 다시 만나, 단 몇년사이에 우리의 상황이 이렇게나 바뀌었다며 감탄을 하고 지난시간을 회상했다고 했다.

 

중학교 쯤 되었을 때 이모네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나의 사촌들은 잘 적응하여 공부를 잘 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최근에 나와 친했던 여자 동생은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검사 인터뷰 제의가 들어와 준비중이라고 한다.
 

좋은 소식들이 떠들썩한데, 괜히 나는 잠시 나 자신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비교 아닌 비교가 되어서인지, 나도 그들과 같은 시간에 최선을 다해 공부했었는데 왜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지, 앞서말했던 친구와 동생을 사랑하는 나로서 누구한테도 말하기 힘든 자격지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전과 비교하라고 했다. 전과 비교하여 나는, 그래도 좋은 직장에서, 내가 하고싶은 일을 배우면서, 또 하고자 하는 공부를 조금씩이라도 하면서, 하루에 한시간 운동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대로 자리매김 하지 않았나. 그들도 연락이 잦지 않았던 과거의 시간들에 애환과 고독을 견디면서 이겨내었던 보상을 지금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중에 나도 무언가 해내었을 때 진심어린 축하를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지금 마음껏 축하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흔히들 물은 100도에서 끓고 99도까지 잠잠한것을 빗대어 무언가 해내고자 할 때에도 마지막 1도를 위해 지금 힘든 시기를 겪어내자고 한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누구보다 노력했지만 그런 1도를 맛보지 못했다. 재수를 할 수도 있었고 대학원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노력한 시간에 후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시간을 보내보고 싶었다. 다른 환경으로 또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고 진짜 내가 하고싶은 또는 내가 해야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조금 더 노력해보기로 했다. 남과 비교하기 전에 나의 시간을 비교해서 부족한 지식때문에 업무에서나 생활에서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공부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 다른 사람들은 마지막 100도에서만 나를 칭찬하겠지만, 나에게는 99가지의 배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학창시절 나는 국사와 세계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후회되는 일이기도 하고, 왜 그렇게 지루한 암기과목으로 생각하게 했을까 싶은 교육현실에 아쉽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현대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기도 해서 세계사 책을 사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어른이 되어 본 고등부 세계사 책은 여전히 따분하고 지루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눈에 들어와 읽게된 책 [세계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이란 책은 세계사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고 또 그것을 현대사와 잘 이어주어 이해가 쉬웠다. 역사를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그것을 응용하여 현대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가 적다고 생각했던 터라 마침 읽게 된 책이 유익하게 느껴졌다.

그 중 특히 유대인을 학살하던 나치의 통치는 민족의 우월성을 확인시키는 잔인함이며, 현대에서도 이어지는 백인들의 자신감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라는 작가의 어떤 한 문단을 마무리짓던 문구가 기억에 많이 남았다. '각성'의 의미가 있는 커피가 예전부터 많이 마셔오던 홍차나 녹차의 명성을 누른 것은 현대인들의 생활 습관과 생각을 조금만 알고 있다면 당연한 결과라는 것도 신선했다. 흐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잊혀진 과거의 잘못된 방법과 생각들도 많았다. 일본이 중국, 몽골, 한국인등을 대상으로 행했던 731 인체실험 및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 내심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지금도 동시대에 죄없이 고통받는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을 이론적으로 알면서도, 물질로 사람의 계급을 결정짓는 사람의 본능을 이용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욕심을 버리라고 하면서도 부에대한 갈망을 놓칠 수 없는 사회. 누구를 탓하고 나무랄 것 없이 사람으로서 태어나 자연을 이용하려고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없는 나약한 한 사람이지만, 생각을 올바로, 어떤 일을 할 때에 작지만 하나의 실천이라도 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슴속에 남았다.  

 

얼마전 휴일을 맞아 잠깐 바람을 쐬러 종로에 갔다. 북악산을 바라보며 드라마 커피프린스의 배경이 되었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카페에 올라가기 전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서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화창한 날씨에 아주 잘 어울리는 나들이를 했다.

중간에 세검정을 보기도 했는데, 세검정은 인조반정 때 반정인사들이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면서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이다. 그 외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우리는 산 중턱의 이런저런 표지판을 읽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여행의 기술]은 바로 이런 책이다. 제목처럼 거창하게 여행을 잘하는 방법이나 기술을 전문적인 관점에서 풀어주는 책도 아니고,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특징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여행 관련 서적도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여행에서 접하고 만나게 되는 사소한 걸음과 흔한 표지판, 생각하지 않았다면 기억이 나지도 않을 유래, 유적의 중요성을 짚어주는 알랭 드 보통 개인의 에세이와 같은 책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런던에서 출발하여, 암스테르담, 마드리리드, 시나이 사막, 프로방스를 거쳐 런던으로 돌아오는 여정속에, 휴게소, 공항, 비행기, 기차 등에서 느끼고 배우는 것들을 이야기 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설렘 또한 여행의 한 일부분이라는 글귀가 공감되었다.

어릴 적 여행의 경험이 적을 때 여행은 가서 재미있게 노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에 여행 일정이나 경비계획은 친구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막상 여행을 떠나고 난 후 불만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친구와는 다툼이 생겼고, 서로 자기 주장을 하는 와중에 친구가 여행을 같이 계획하는 것도 여행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 말이 유독 기억에 남아서인지 깊은 공감을 했기 때문인지 그 뒤부터는 나는 여행일정을 계획하고 다소 귀찮은 예약절차나 경비계획을 즐기게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새로운 곳을 찾는 도전정신을 일깨워주고, 장소마다 절차가 조금씩 다른것을 이해하게 되며, 유명하고 화려한 유적지가 아니라 휴게소나 공항일지라도, 그 나라의 생활 방식과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이 유명한 장소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라든지,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둘러보고 여행경비를 좀 더 알차게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서 좋았다. 물론 그런 책들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것은 그런 책을 사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책을 읽고 가보고 싶은 장소를 정하는 순간, 경비를 계산해보는 순간, 막상 갔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서 전혀 다른 장소에 가있게 되는 모든 순간이라는 점이라는 새로운 시선을 안겨줘서 고마운 것이다.

마침내 알랭 드 보통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작가는 여행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점, 여행이 항상 행복하다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것, 막상 가보면 별 다를 것이 없고 그건 내가 사는 이곳도 새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이 지금 나의 장소에서 느끼는 회의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했고, 그래서 여행이 가끔씩 필요하다는 것도 일깨워주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그 생각에 젖어서 돌아오면 더 우울해지는 친구들이 있다. 나 역시도 그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휴가를 다녀오면 더 힘들어보이는 것도 봐서 모두가 그런 것 같다.

내가 있는 이곳보다 잠깐 머물렀던 그곳이 더 좋아보여서,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너무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은 마음이라 그런 것 같다.

여행가의 가장 첫번째 마음가짐은 우선 내가 있는 이 곳의 특별한 매력을 찾고, 내 주변부터 둘러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여행이 삶의 큰 선물이라는 점은 변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