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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3대 비판서 해부도...  | 인문 2018.11.26 19: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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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카넷 |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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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우리의 정조(正祖) 재임기(1776 - 1800)에 주요 철학서들을 쓴 독일의 철학자이다. 독일의 대학생들이 오히려 영어 번역본으로 읽는 철학자. 서울대 백종현 명예 교수가 쓴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칸트의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을 상세 분석, 설명한 책이다. 칸트는 최초의 직업 철학자이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폭넓게 공부한 철학자이다.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50km 이상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40세 때인 1764년 사학 교수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전공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한국인 누군가가 칸트의 독일어 저서를 읽는다면 그는 눈으로는 독일어를 읽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독일어에 상응하는 한국어를 찾아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에 그것은 결국 한국 사상을 읽는 것이라는 말이다.(34 페이지)

 

우리의 어휘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온 것들임도 주목할 이야기거리이다. 예술, 이성, 과학, 기술, 철학 등의 말이 니시 아마네(西 周: 1829 - 1897)가 만든(서양 개념에 상응하는 말을 고안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3대 구호를 자유, 평등, 박애로 번역한 사람이 나카에 조민과 고토쿠 슈스이다.(자유, 평등, 연대가 타당하다.)

 

일본 사람들이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일 때 중국 문헌들 중 유사한 한자어를 찾아 번역어로 만들었다. 중국 사람들마저 자국어로 알고 큰 저항 없이 받아서 썼다.

 

칸트의 철학적 숙고 속에는 고대, 중세의 사상, 근대의 과학 사상이 두루 포함되어 있기에 그의 사상을 철학 사상사의 중앙 저수지라 부른다.(63 페이지) 칸트 이전에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하는 근본 원인, 신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칸트는 존재자 자체는 인간의 앎의 영역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오직 인간 앞에 나타나 있는 것 곧 현상과 대상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당연한 일이다. 신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 칸트 철학의 원인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 비판) 등이다. 칸트 철학에서 순수한 이론 이성은 자연세계의 입법자이고, 순수한 실천 이성은 도덕 세계의 입법자이다.(80 페이지)

 

순전히 자력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원리의 능력을 순수이성이라 한다. 그러니 그것은 신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그런 까닭에 정확히 말하면 유사(類似) 순수 이성이다. 비판은 순수 이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분간하는 것이다.(83 페이지)

 

순수 이성 비판은 순수 이성의 자기 한계 규정이다. 칸트는 자연과학 지식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이라 보았다. 자연과학 외에는 지식이 아니다. 사변에서는 지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의 형식을 감성의 형식과 지성의 형식으로 나누었다. 칸트에 의화면 어떤 것이 있다면 이는 공간과 시간상이라는 지평선 위에 있는 것이다. , 영혼 등은 공간과 시간상의 지평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칸트의 논의에서 그것들은 논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칸트가 뉴턴 물리학을 철학적으로 설명했다고 하지만 칸트는 시공간을 관념(주관적인 것)이라 보았고 뉴턴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지성의 형식은 범주이다. 통각(通覺)이 허브(hub: )이면 범주는 스포크(spoke: 바큇살)이다. 통각은 의식의 통일작용을 말한다. 이 작용 없이는 우리는 자연 현상 세계에서 하나의 사물을 인식할 수도 없고 그 하나의 사물의 변화도 지각할 수 없다.(105 페이지)

 

칸트 철학의 한계를 말할 때가 되었다. 감각인상들이 잡다하게 주어지지만 그것들은 무엇인가가 우리 감성을 자극함으로써 생긴다. 이것이 통각의 통일의 상관자라 아닌가, 란 말을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의 곳곳에서 했다. 형식과 질료의 상관자로 초월적 주관과 초월적 대상을 대응시키지 않으면 칸트 인식론의 완결을 기대할 수 없다.(114 페이지) 내 생각이 감각 질료라면 그것을 체계화한 문서는 지식, 한글 프로그램은 인식 주관의 형식에 비유될 수 있다.(92 페이지)

 

실천 이성 비판과 상응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이다.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는 도덕의 문제, 현실이 아닌 이성이나 이념에서 도출되는 문제이다. 저자가 예로 들었듯 인간은 누군가 배가 고파 밥을 훔치면 열흘 굶고 안 훔칠 사람이 있겠느냐는 옹호론까지 나온다.

 

인간 행동의 원인이나 이유를 끊임없이 경험적인 세계에서 찾는 것이다. 경험 세계 밖의 신, 영혼 등을 찾던 사람들이 이 경우에는 경험적인 세계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지식의 측면에서 감각을 넘어사는 세계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고, '실천이성 비판'을 통해서는 행위면애서 끊임없이 감각적인 요인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지 말 것을 가르친 것이다.(145 페이지) 불교의 논리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를 이야기하니 집착하고 무()를 이야기하니 허무에 빠지는 사태를 경계해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있다 함은 상주(常住: 항상 존재함)에 집착하는 편견이고 없다 함은 다멸(斷滅: 끊어짐)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그러므너 지자(智者)는 유와 무에 의지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일지 스님은 공()을 무()가 아니고 모든 현상이 상호 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말한다.('중관불교와 유식불교' 75 페이지)

 

칸트는 도덕은 자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인간 이성에서 발원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지닌 이성의 힘이 자율성이다. 자율이란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듯 국가와 관련해 쓰이던 말이다.

 

칸트에게 의지는 선의지이다. 좋은 것을 하려 하는 것이다. 의지는 선의지이고 자유의지이다. 악한 의지는 무의지라 해야 한다. 칸트는 타자에 대해서는 행복하게 하고 나에 대해서는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옳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고 보았다. 결과를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의지이다.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직 의무이기 때문에 하려는 의지이다. 조건 없이 하는 것이다. 이를 정언명령이라 한다.

 

최고선은 칸트적 이성의 세 번째 물음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의 답이다. 칸트는 인간에게 허용될 수 있는 희망은 행실을 한 그 만큼 행복을 누림이라 말했다. 칸트는 인간의 마음씨가 도덕법칙과 항상적으로 합치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 길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칸트는 영혼의 불사성을 요청한다. 칸트는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서 신의 현존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변한다.(184 페이지)

 

칸트는 현실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회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기독교를 떠나지 않았다. 가난뱅이에다가 전형적인 훍수저였다. 촌구석에서 테어나 집안도 미천했다. 제대로 된 그림을 본 적도, 제대로 된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가 한 예술적 경험이라고는 쾨니히스베르크 지역 귀족집의 정원을 본 것이 고작이다. 학생 시절 칸트가 탁월했다는 증언은 없다. 호기심이 많고 성실했을 뿐이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교수 자리조차 45세가 되어서야 이룰 수 있었다. 63세에야 가난에서 벗어나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미 결혼 적령기가 한참 넘어선 때였다. 그래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늘 아플락 말락 했지만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몸이 쇠약해 늘 골골했지만 섭생에 신경 써서 실제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 몸으로 칸트는 80세를 살았다.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 비판에서 판단력이란 반성적 판단력이다. 개념이란 자기 안에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표상이다.(208 페이지) 반성이란 서로 다른 것들이 있을 때 그것들을 어떤 공통점에서 볼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미학(美學)은 미적인 것에 대한 학문이라기보다 에스테틱 즉 감각/ 미감에 대한 학문이다.

 

칸트는 사상가는 무엇보다 세월에서 많은 것을 깨우치고 앞에서 미처 못 본 것을 새롭게 보고 앞서 말한 것을 뒤집어 말하는 것이 정상이라 말했다. 만약 어떤 사상가가 수십 년에 걸쳐 수십 권의 저작으 펴내면서 일관된 서술이나 주장을 편다면 그는 엄밀히 말해 사상가로 보기 어렵고 기억 장치만 갖춘 기계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칸트의 철학적 물음은 늘 "어떻게 ~이 가능한가?"이다. 칸트에게 미적 쾌감은 욕구가 없었으나 무슨 목적이 달성된 것처럼 흡족한 느낌을 말한다. 상상력과 지성이 합일하는 데서 미적 판단, 미적 쾌감이 생긴다. 내가 이 장미가 빨갛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시간상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성의 개념과 감성의 소여를 결합하는 끈이 도식이다. 이 도식을 만드는 능력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지금, 지금, 지금이라는 잡다한 시간 표상을 하나의 연속체(quantum continuum)로 만든다.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지금의 연속체로 상상함으로써 시간 지평이 열리고 그 위에 사물들이 현상하니까 비로소 지성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며 그 본질과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다.(227 페이지) 실천이성 비판까지의 칸트를 고전주의, 판단력 비판의 칸트는 낭만주의의 일원이다.(232 페이지) 실러 등은 칸트 책들에서 '판단력 비판'만을 책으로 쳤다.

 

1794년에 이르러 칸트는 실러를 인용하면서 젊디젊은 실러의 환심을 얻기 위해 변명까지 한다. 그 엄격했던 칸트가 아름다운 영혼이란 말을 한 것이다. 독일 이상주의자들의 칸트에 대한 최대의 불만은 하나의 이성을 두고 이론이성, 실천이성 등으로 나누어 세계를 자연 세계와 윤리 세계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233, 234 페이지)

 

칸트는 판단력을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지성과 이성을 잇는 다리로 보았다. 칸트는 지상에 세워진 천국을 간절히 바랐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이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칸트는 철저히 인간이 동물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동물이기에 쾌락도 있고 숭고도 있다. 숭고하다는 것은 동물이라서 할 수 없는데도 무언가를 하니까 숭고한 것이다. 자기를 극복하니까 대단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면서 자유를 가지고 있어 위대하다.

 

자연은 자유롭지 않다. 모두 필연적이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자연물이다. 인간의 일들도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존재자의 관점에서 말하고 기독교는 신의 관점에서 말하니 객관주의 철학이다. 칸트는 나를 주체로 놓고 존재세계든 당위세계든 바라보니 주관주의 철학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나는 나 일반을 지칭한다. 칸트에게 주관주의는 인간중심주의이다.

 

저자는 객관주의가 옳음을 주장하면서 손님 이야기는 들어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기 주장만 줄곧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사물 자체라는 말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했다. 말로는 신이 보기에라고 하면서 결국 너의 관점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명작을 추천한다. 음미하고 또 음미할 책, 재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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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과학 천문학을 대하는 방법...  | 과학 2018.11.22 23: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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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한국의 전통 과학 천문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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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전설(地轉說)은 김석문(金錫文: 1658 - 1735)이 처음 주장했다. 그의 사상을 홍대용(洪大容: 1731 1783)이 수용했다. 나는 지난 번 해설에서 홍대용 이야기를 하며 점성술에 가까운 천문과 수리천문학에 가까운 역()으로 구성된 조선 천문학('조선 전문가의 일생' 49, 50 페이지)은 홍대용이 공부한 천문학과 다르다는 말을 했다.

 

정성희는 홍대용의 우주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전설이라기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설이라 설명하며 그의 우주관을 과학사적 입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싶다고 말한다.('우리 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99, 100 페이지) 이유인즉 홍대용이 말하려던 바가 우주론 자체가 아니라 탈중화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근거로 읽을 책이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의 '한국의 전통 과학 천문학'이다. 박 교수는 고대의 천문 활동을 현대 천문학과 무관하게 보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하다고 말한다.(13 페이지) 저자는 고인돌의 남동쪽 방향을 천문학적 고려의 결과로 보며(25 페이지) 거석문화를 자생 천문학의 출발로 결론 짓는다.(31 페이지)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은 도교적 사상과 상통한다.(39 페이지) 중국 한나라 시대에 성립된 도교는 점성술적 믿음을 담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면의 별자리 배치 순서는 하늘의 북극과 적도를 기준 방향으로 해 천체의 위도를 나타냈고 천체의 경도는 추분점을 기준으로 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재어나갔다. 이는 현대 천문학이 채택한 적도 좌표계와 완벽하게 같다.

 

고구려 덕화리 2호분의 북쪽 벽에는 북두칠성이 그려졌고 남쪽 벽에는 남두육성이 그려졌다. 천정에는 중국식 별자리인 28(宿)가 그러졌다.(41 페이지) 인정(人定)시에 치는 28번의 종은 이 수에서 나온 것인 듯 하다. 28수는 하늘에서 달이 지나는 길을 따라 만든 개념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특징은 정확한 별의 밝기 구별이다. 삼국사기에 태백범월, 태백입월, 태백주현이란 말이 나온다. 태백범월(太白犯月)은 태백성으로 불리던 금성이 달에 근접한 현상을 의미한다. 태백입월(太白入月)은 금성이 달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태백주현(太白晝見)은 낮에 금성을 보았다는 의미이다.

 

첨성대는 몸통은 원으로, 머리는 정사각형으로 만들어 당시의 우주 구조론인 천원지방 사상을 반영했다. 천문 현상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천체의 주기적 운동을 파악하게 된다. 천체 중 단연 두드러지게 주기성에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해와 달이다.

 

해는 매일 뜨고 지며 하루를 바꾸고 달은 찼다 이지러지며 한 달을 바꾼다. 하루와 한 달이라는 주기를 한 해 안에 큰 무리 없이 짜넣으려는 노력이 달력 제작이고 역법(曆法)의 본질이다.(69 페이지)

 

우리나라에서 천문 현상 기록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고려 시대이다. 삼국시대의 20배이고 조선시대에 비해 종류와 시대 분포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81 페이지) '고려사'에는 일식 예측을 어긋나게 한 일관(日官)이 사형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에는 태양 흑점을 흑자(黑子), 오로라를 적기(赤氣)로 표현했다.

 

오로라는 태양 활동 때 방출되는 고에너지 입자가 지구 대기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대기 입자와 부딪혀 빛을 내는 현상이다. 고려 시대의 흑점과 오로라 관측 기술이 큰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이 기록들이 태양 활동의 11년 주기를 분명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송, , 원나라의 기록은 주기성이 없다.(92 페이지)

 

고려의 천문 관측대나 고군벽화 별 그림 등은 고려의 활발한 천문 관측 활동을 증거하는 실존 유물이다.(99 페이지) 세종 시대는 우리 천문학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때이다.(107 페이지) 세종은 이슬람 과학으로 계승된 서방의 과학과 동아시아 전통 과학을 적극 선별, 흡수해 15세기 초엽 동아시아 동쪽 끝에서 용융시킴으로써 천문의기, 관측, 역법 분야를 아우르는 세계 최고의 천문학을 일으켰다.(108 페이지)

 

그러나 그 시기의 수많은 정교한 천문기기와 서적 등이 두 차례의 왜란으로 모두 망실되었다. 소실된 관천의상의 복원은 선조대에서 정조대에 이르는 200년의 세월에 걸쳐 일어났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중국을 통해 서양 천문학이 전래됨으로써 힘겹게 복구한 전통 천문학은 효용을 잃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일성록, 증보문헌비고 등에 방대한 천문 현상 관측 기록이 있다. 전통 시대 기록 중 객성(客星)은 별은 아니고 혜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체 불명의 천체라 할 수 있다.(114 페이지) 객성 가운데 케플러 초신성 관측 기록도 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만든 천문도가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희귀 과학 유물이다. 별들의 밝기가 서로 다르게 그려진 것이 큰 특징이다. 별들의 밝기가 서로 다르게 그려진 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 별 그림에서 이미 나타난 현상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7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최초의 천문도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서양 천문학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인조 9(1631)이다. 혼천의는 혼의,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으로 불렸다. 세종 시대에 만든 간의(簡儀)는 혼천의보다 간단한 천체 측정 기구이다.(134 페이지)

 

앙부일구를 제작하려면 관측지의 북극 고도 또는 위도를 알아야 한다.(136 페이지) 조선은 건국년인 태조 1(1392)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서운관(書雲觀)을 대대적으로 재구성해 천문 관측을 전담하도록 했다.(142 페이지) 실록에 의하면 서운관은 재이(災異)와 길조를 관측하고 책력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1467년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의정이 최고 책임자를 맡았다. 조선은 유일신이 우주를 주재한다는 믿음이 강했던 서양과 달리 종교적 반발감 없이 새 우주 모형을 탐닉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149 페이지) 김석문은 지전설을 정설로 서술한 1767년의 베노이스트의 '지구도설'보다 먼저 지전설을 주장했다.

 

김석문의 지전설은 이익, 홍대용 등에게 이어졌다. 홍대용은 나경적(羅景績, 1690~1762)에 의뢰해 사설 천문대를 짓고 혼천의, 혼상, 자명종 등을 설치했다.(153 페이지) 훈민정음의 기본 획은 천지인을 상징한다. 원래의 28자는 28수 별자리에 맞추기 위해서 만든 숫자로 보인다.(15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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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꽃을 피운 다산과 추사 이야기...  | 역사 2018.11.21 20: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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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가디언 | 2017/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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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추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유배를 갔었다는 것이고 그를 통해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석한남의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는 그 점을 파고든 책이다. 저술 동기는 두 선현에 대한 막연한 추앙과 도를 넘는 찬양 일색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도 다산과 추사의 천재성과 그들의 열정이 빚어낸 위대한 업적이 조금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란 게 저자의 주장이다. 추사는 여섯 살에 월성위궁에 입춘첩을 써 붙였다. 이를 본 박제가가 학예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것을 예언했다. 후에 추사는 박제가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추사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김한신; 영조의 사위)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의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이 추사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다산은 어머니 해남 윤씨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옛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글을 써 보낼 때 나이에 관계 없이 자신을 아우<; >라 칭했다. 심지어 동방입격(同榜入格)한 과거 시험 동기생이 자신의 자식보다 어린 경우에 제라 쓰기가 민망해 늙은 아우라는 뜻의 노제(老弟)라 쓴 사례도 있다.

 

동파 소식(東坡 蘇軾; 1037-1101)은 조선 지식인들 뿐 아니라 많은 유배인들이 존경하여 따르고자 한 롤모델이었다. 추사가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의 지식인 옹방강은 소동파를 흠모해 평생 제사를 지냈다. 그 영향으로 추사는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은근히 소동파의 해남도 유배 생활과 동일시하며 이를 반영한 작품을 남겼다.

 

소동파는 유배 기간 내내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73 페이지) 소동파의 유배를 닮고 싶었던 추사의 유배는 우리나라 최남단 섬으로 간 것이라는 점만 빼면 소동파의 유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보다는 도연명(陶潛 陶淵明; 365-427)의 전원생활을 동경했던 다산의 유배가 오히려 소동파의 유배 생활과 흡사했다.

 

다산은 소동파의 전원생활을 꿈꾸었으나 소동파의 귀양살이로 내달았다.(94 페이지) 추사는 어처구니 없게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된다. 저자는 여섯 차례에 걸쳐 36대의 신장(訊杖; 매질)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위리안치라는 중형을 받고 의금부 도사의 차가운 손에 이끌려 절해고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가 전라감영에 들러 당시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을 만나 그의 글씨를 보고 시골에서 밥은 먹을 만한 글씨라 혹평했다거나 대둔사에서 초의를 만나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의 현판 글씨 대웅보전을 떼게 한 뒤 스스로 다시 써서 걸게 했다는 이야기는 억측일 뿐이라 말한다.(98 페이지)

 

다산은 유배 시절 배움에는 귀천이 없고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자, 힘이 있고 없는 사람 누구에게나 독서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 믿었다. 가르침이나 교류에 있어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고 그렇게 애써 가르쳤다. 공자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공자는 가르치는 데는 계급이 없다<유교무류; 有敎無類>고 했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 하늘이 사람을 내릴 때는 귀천을 두지 않았고 멀고 가깝고의 구분도 없었다고 해석하며 가르침이 있으면 모두 같다(유교즉개동; 有敎則皆同)고 정의했다. 다산은 유배 8년째인 1808년 비로소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추사는 유배지에서조차 계급적 신분주의와 지적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59 페이지)

 

추사는 인격적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저자는 추사가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깎아 내리고 필요 이상으로 비판했지만 그의 예술혼과 실험정신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추사는 그 이전의 서풍과는 전혀 다른 독보적인 예술세계와 작품을 만들어냈다.(163 페이지) 다산은 아들 친구 추사를 벗으로 호칭했다.(168 페이지)

 

추사체는 수백년 동안 어떤 고증과 해석도 없이 맹목적으로 왕희지의 서풍을 답습하려고 노력해온 조선 서예에 대한 비판 및 새로운 서체의 구현을 위한 추사의 실험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으니 추사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이다.(186 페이지) 추사는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 견해가 아니라 말했다.(190 페이지)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과 민영휘 집안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본의 추사 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소유가 되었다. 추사를 근대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게 한 인물이 후지츠카 치카시이다. 세한도는 소전 손재형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팔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아무 대가도 없이 넘겨받았으나 정치계에 투신하며 자금에 쪼들린 나머지 그림을 저당잡혔다. 개성 갑부인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가 새 주인이 되었는데 그는 이를 국민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인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선친이 평생 모은 2,750점의 추사의 필적과 자료를 자비를 들여 손질한 후 과천 추사박물관에 기증했다.(198, 199 페이지)

 

저자는 추사가 가마를 타고 오른 고갯마루에서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에 취해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를 읆은 것과 다산이 사람들이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른다는 시를 쓴 것을 품성에 기인하기보다 출신 배경과 성장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말한다.(210 페이지)

 

다산의 유배지 강진은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보길도 섬을 통째 소유할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던 외가 해남 윤씨의 세거지(世居地)에서 가까웠다. 그래서 해남 윤씨 집안에서는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하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해남 윤씨 소장의 다양한 서책을 손쉽게 열람하게 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205, 20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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