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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인문학적 소양을 만끽할 수 있는 외국어 학습 비결 전수의 책  | 인문 2018.10.22 11: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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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나의 외국어 학습기
메멘토 |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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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 왕의 공부의 저자 김태완의 나의 외국어 학습기는 전공인 철학 공부를 위해 여러 나라 말을 공부하게 된 저자의 외국어 공부 비결과 내공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비결이라 했지만 저자의 책을 통해서 우리는 꾸준함과 반복 학습 등을 주문하는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중학교 시절 이전부터 축적된 외국어 학습에 관한 경험을 상세하게 들려준다.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전할 수 없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다. 여러 인문서들을 넘나들며,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공부한 경험을 넘나들며 전하는 저자의 채게는 인문학적 지식들이 즐비(櫛比)하다.

 

'맹자'에 기록된 북학이란 말은 전국시대 남쪽 초나라 태생의 진량(陳良)이라는 사람이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으로 올라가 유학을 배운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 이 일로 연유하여 북쪽의 청나라에 가서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을 북학파라 불렀다는 말.( 41 페이지)

 

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것은 사유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66, 67 페이지), 에른스트 카시러는 언어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보았고 이 통로를 상징형식이라 규정했다는 말, 그렇게 심볼의 어원인 희랍어 symbole는 두 조각으로 나뉜 막대기 하나를 의미하였다는 말.

 

두 친구가 저마다 둘로 나뉜 막대기 조각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가 자식에게 물려준다. 물려받은 두 자식은 조각을 서로 맞춰보고 들어맞으면 선조의 우정 관계를 인정하고 우정을 이어나간다. 낯선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이들이 선천적으로 하나로 묶인 관계임을 나타내는 제 3의 매개가 상징이라는 것이다.(72, 73 페이지)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나라 말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괴테가 한 말이다.(87 페이지)

 

본문에 역()에 대한 글이 나온다. 형태로는 일()과 월()을 합한 글자이고 뜻으로는 교역(交易), 변역(變易)을 의미하고 황하(黃何)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성인이 본받아서 만든 것이다.

 

저자는 언어에 문법을 맞춰야지 문법에 언어를 맞추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문법을 먼저 공부하고 언어를 읽고 쓰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한문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한문에는 문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도 만용이지만 문법에 얽매이는 것은 여행을 한다고 지도를 보며 한 발짝도 떼어놓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134, 135 페이지)

 

저자는 요즘 출판계와 독서계에 가독성이라는 망령이 지배해 수사적 장치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으려고만 한다고 지적한다. 만연체, 화려체, 간결체, 우유체, 강건체......문장의 개성을 살려주던 문체가 사라지니 주어 하나에 목적어와 부사 성분을 두고 술어 하나만 달랑 남는 천변일률의 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152, 153 페이지)

 

저자는 어떤 언어든 쉬운 것은 없다며 아주 일상적인 소통을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외국어를 많이 배우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한 나라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해당 문화의 정수를 담은 문학작품을 읽으려면 잠심(潛心)하여 오랜 시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201 페이지)

 

발화자와 수용자가 메시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형이 일어난다. 이 변형에 해석이 개입한다. 번역이든 해석이든 나의 선()이해가 전제되기에 오해는 숙명적이다. 이때 말하는 오해란 틀린 이해,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을 100퍼센트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하지 못하고 나의 선이해라는 프리즘으로 투과하여 반영한다는 말이다.(206, 207 페이지)

 

저자는 외국어는 최소 2년 멈추지 말고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계적 훈련의 힘을 믿으라고 말한다. 단어를 외운다고 해서 반드시 언제라도 생각나도록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쓰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외국어 학습도 성취한 만큼 계속 동기부여를 해야만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저자는 번역서 부분이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아보면 어김 없이 번역도 헤맨 부분이라는 말을 한다. 본문에는 우리말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일본어라고 특별히 다른 초특별 고속도로는 없다는 말도 있다 저자는 외국어 학습도 성취한 만큼 계속 동기부여를 해야만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저자는 아무리 쉬운 문장이라도 우리말로 옮기려면 내 언어가 얼마나 졸렬한지, 내 표현 역량이 얼마나 부족한지 바로 깨닫게 되며 번역 과정을 거치면 우리말 실력도 쑥쑥 늘게 된다고 말한다.(244 페이지)

 

부록으로 한문, 중국어, 일본어 번역의 실례를 들어 놓기까지 해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소통, 그리고 외국어 공부의 가장 큰 동기는 외국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고 대표적으로 외국 소설 등을 원문으로 읽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좋은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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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군주이자 문치 개혁의 군주 정조의 장용영 이야기, 그리고 비판에 대한 답까지..  | 역사 2018.10.12 22: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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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더봄 |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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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1027일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라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壯勇營)'은 바로 그 '무예도보통지'의 유네스코 등재를 즈음해 나온 김준혁 교수의 책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선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제보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를 잇는 무예서이다. 정조가 이용후생의 실용지학을 추구하는 이덕무, 백동수 등의 인물들에게 지시해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것은 사도세자에 대한 또 다른 추숭작업이었다.

 

저자는 김체건, 김광택, 임수웅, 백동수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무예의 계보는 장용영을 만들어가는 오랜 준비이고 인연이라 말한다.(28 페이지) 임수웅은 사도세자의 호위무사, 백동수는 정조의 호위무사였다. 무예도보통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사도세자이다.

 

15세에 처음 대리청정을 한 사도세자는 영조와 관계가 어긋남에 따라 무예서 편찬에 힘을 쏟았다. 영조를 이어 즉위한 정조가 펼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현양(顯揚) 사업은 자신이 효의 군주임을 보여주는 일이었고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자 왕권 강화의 수단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조선 후기 기본 군사체제를 안정화시킬 중요한 행위인 동시에 신진무반층을 양성하려는 포석이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는 북벌을 천명했던 효종을 늘 닮고자 했고 정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닮고자 했다.

 

정조는 무기 제작 의도를 가졌던 사도세자를 계승해 1795년 윤 2월의 화성행차에서 매화포(埋火砲) 실험을 했고, 군복을 입고 다녔던 효종처럼 군복을 입고 다닌 사도세자를 계승하기 위해 군복을 입고 행차를 했다.

 

장용영 외영을 화성에 신설하고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1795년 윤 2월 화성행차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정조는 환궁 길에 병자호란의 치욕이 서린 남한산성을 방문, 승군들의 훈련을 관람하고 지뢰의 일종인 매화포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286 페이지)

 

정조는 효종이 후원에서 북벌을 위해 말타기 연습을 한 것을 좇아 본인도 청양문 앞에서 말을 타고 다녔다고 강조했다.(220 페이지) 정조는 평양 일대의 서북 지역의 무사들을 활용하려고 한 사도세자의 의도를 따라 서북 지역 무사들을 장용영에 소속시켜 활용하려 했다.(202 페이지)

 

의미 있는 점은 정조가 능허관만고(凌虛官萬稿)’를 편집해 사도세자가 영조와 정성왕후의 만수무강을 송축하며 쓴 '연상사(延祥辭)''장락사(長樂辭)'를 수록한 것은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를 모해할 뜻이 없었음을 밝힌 것이라는 글(90 페이지)이다.

 

정조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가 사도세자의 주관으로 편찬된 것임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능허관은 사도세자의 호이다. 하늘을 높이 날다, 허공을 가르다, 승천하다, 비상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이 호는 사도세자의 무인적 기질을 잘 드러내준다.) 즉위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정조는 기존의 군왕들에 비해 더욱더 군제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142 페이지)

 

정조에게 필요한 것은 군권 장악이었고 불필요한 군영(軍營)의 통폐합이었다. 정조는 결코 나약한 버릇에 매달려 400년 동안 전해오는 임금의 권한이 자신 때문에 허물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153 페이지)

 

정조가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설치하자 반대가 심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하는 부대라는 것을 안 세력들로부터 견제를 받은 것이다. 군대 육성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여 제도를 개혁하는 힘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정치사가 서인(훗날 노론)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그들이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184 페이지)

 

정조는 성호 이익의 친위군병론을 적극 받아들여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창설했다.(186 페이지) 정조는 즉위 직후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노론의 사병과도 같은 오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을 혁파하고 조선 초기 병농일치를 위주로 하는 오위체제로 군제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저자는 장용영 창설 목적을 셋으로 설명한다. 1. 친위군 강화, 2. 군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안정, 3.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등이다. 정조가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은 봉림대군(후에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갔을 때 자신을 호위하여 함께 다녀온 8장사를 별군직으로 임명하여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199 페이지)

 

정조가 장용영 깃발에 대한 정식을 세운 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듯 장차 화성 축성을 통해 새로운 국가건설을 하겠다는 개혁 의지와 조선의 군제가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주적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정조는 북벌론의 연장선상에서 오위(五衛)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북벌론과 북학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214 페이지)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굳이 수원부로 옮긴 것은 그곳이 단지 명당이어서만은 아니다.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 터는 선조와 효종의 능침으로 정해졌던 곳이다.(221 페이지) 정조는 대부분 당색이 노론 벽파가 아닌 시파 내지 남인, 당색 없는 인물들을 장용대장으로 기용했다.

 

장용영은 기존의 군영과 다른 직제로 편성, 운영되었다. 정조는 국가 개혁에서 핵심을 국방개혁으로 꼽았다.(258 페이지)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을 특별 대우하는 한편 그들의 오만한 폐단을 막고자 하였다.(266 페이지)

 

장용영이 오군영과 모든 면에서 위상이 다르다고 생각한 정조는 그에 맞게 대우가 달라야 한다고 인식했다.(275 페이지) 정조는 특별 하사금을 주는 등 장용영의 가난한 장교나 군병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276 페이지)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쓰면서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강하게 시킬 것을 지시했다.(281 페이지) 즐풍목우는 바람으로 머리를 감고 빗물로 목욕하라는 의미이다. 장용영 기병들의 진법 훈련 수준은 조선 최고의 수준이었다.

 

정조가 선대 국왕 묘소 참배 후 돌아오는 중 실시한 군사훈련은 대체로 즉흥적이었다. 의도를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289, 290 페이지) 정조에게 수원은 군사정책 개혁 및 민생안정 개혁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수원에 장용영 외영을 만든 것이다.

 

수원을 핵심 거점으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상 요지였다는 점, 교통상 요지로 타 지역에 비해 상업이 발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 등이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면서 화성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했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로 일개 고을이 국왕의 친위도시로 거듭나는 일이기도 했다.(299 페이지)

 

장용영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정조 호위였다.(325 페이지) 정조는 화성 축조 재원을 마련할 때에도 금위영과 어영청의 번상군을 10년에 한해 매번마다 각 1초씩 감축하는 대신 포()를 부과하여 이를 화성 축조 비용으로 충당케 했다.(333 페이지)

 

정조는 이전에 한 번도 실시한 적 없는 야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장용영외영의 군사들과 백성들의 합동훈련을 통해 화성을 실질적으로 방어하게 한 것으로 장기적으로는 정조의 화성 거주를 위한 훈련의 의미를 갖는다.(347 페이지)

 

저자는 고위 신하들과 무인들에 비해 3배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 역사상 최고의 신궁(神弓)인 무인 군주 정조의 군복을 입은 늠름한 모습이 조선을 지킬 믿음직한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라 말한다.(349 페이지) 저자는 백성 없는 군대는 의미가 없고 군대 없는 백성은 위태롭다고 말한다.(352 페이지)

 

장용영 군사훈련의 특징은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는 장용영이 조선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353 페이지) 저자는 정조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본인 재위시에는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왕주도의 것이었다는 점이라 말한다.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이후로 60년간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는 틀린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라 말하며 정조 탓에 세도정치가 있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저자에 의하면 정조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통해 개혁 시스템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안타깝게 정조는 이 천명(闡明) 이후 유명을 달리했다.

 

정조는 군신공치를 실천하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왕권을 강화해 의도대로 국정을 운영했다. 군주는 자신만이 아닌 백성들을 위해 때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상대를 다독거리기도 하고 정국을 통합하기 위해 신하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다.(355 페이지) 이것이 바로 군주의 역할이다.

 

그래서 정조는 당파로 갈라져 싸우지 않고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정조 타계 이후 반개혁 세력에 의해 정조의 개혁 프로그램은 지워졌다.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장용영이 혁파된 것이 그 한 예이고 가장 아픈 현실이다. 이것으로 정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충분히 제거될 것이라 생각한다. 많이 배우고 느꼈다. 저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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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고 간결한 조선왕조실록 해설서  | 역사 2018.10.07 0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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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팜파스 |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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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에 민초, 여성, 하층민들의 다양한 기록이 숨어 있다는 송영심. 그는 자신의 책('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리타분한 조선사가 가슴 떨리는 조선사가 된다고 말한다.

 

'조선을 담다, 조선왕조실록'(1), '조선의 왕들을 만나다'(2), '주제로 실록 속 조선을 보다'(3) 등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춘추관에 속한 여덟 명의 사관으로 구성된 사관들을 한림이라 부른다는 말에서부터 실록의 원고인 사초(史草)는 국왕 옆에서 기록한 입시사초(入侍史草)와 퇴청한 사관이 집에서 내용을 정리해 생각과 사론을 정리하는 가장사초(家葬史草)로 나뉜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들을 열거한다.

 

세검정(洗劍亭)이 세검정이라 불리는 것은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사건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할 때 의연하게 대처한 드라마 장면은 픽션이라 말하며 픽션과 사실을 제대로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정도전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안타까운 점은 단종이 복위운동을 알고 친히 큰칼까지 내리며 격려했다는 사실이다. 조광조가 중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뭘까? 조광조가 중종의 공부를 독촉하고 꾸짖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만하다.(79 페이지) 조광조는 죽음 앞에서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도 따뜻했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을 불러 미안해 하는 마음을 전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라 부탁했다. 먼 길 가기 쉽도록. 이 책의 특징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이다. 왕비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을, 왕과 왕비가 사랑을 나누어 아기를 만들 때 용마루가 있으면 아기가 탄생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저자는 왕비의 처소가 아닌데도 용마루가 없는 건물도 있어 그 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세종 이전에는 왕의 후궁이나 대군의 부인들도 옹주라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때 공주와 옹주가 구별되었고 성종때 왕비의 딸을 공주, 후궁의 딸을 옹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자빈의 딸은 군주(君主), 세자 후궁의 딸은 현주(縣主)라 했다. 동뢰(同牢)라는 말도 있다. 공주와 부마가 치르는 첫날밤이다.(147 페이지) 첫날밤이 아니라 부부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영조의 부마)이 죽자 아내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열녀문을 세워주자는 신하들의 간언을 영조가 거절했다. 정절은 지켰으나 밥을 먹으라는 아비의 청을 듣지 않아서 불효녀이기 때문이고 아비가 자식의 열녀문을 세워주는 법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4 페이지)

 

노비 출신인 장녹수는 여러 남자에게 몸을 팔아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156 페이지) 조선에는 궁녀에서 출발해 왕비까지 된 두 여성이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이다.(170 페이지) 궁녀들은 고생이 막심했다.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늙고 병들면 요금문이라는 쪽문을 통해 나가 사가에서 돌보는 이 없이 생을 마쳤다.

 

저자는 조선의 궁녀는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의 그림자이자 증인이라 말한다.(174 페이지) 세종 대에 국가 차원에서 무당들을 모아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사실(세종실록 참고)도 흥미롭다.(191 페이지) 유에프오 목격담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실록 내용도 있어 흥미를 끈다.

 

"강릉부에서는 8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밝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 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점 커져 3, 4 장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광해 20. 192353번째 기사 1609: 225 페이지)

 

흥미롭다. 유에프오 관련 실록도 그렇고 전체적 구성도 그렇다. 다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명공주(1603-1685)를 중종반정(1506) 이후 공주로 복권될 수 있었다고 쓴 부분(150 페이지), 익종(효명세자) 비를 신원왕후로 기록한 부분(143 페이지),

 

단종의 유배지를 청룡포로 기록한 부분(39 페이지), 나쁜 일을 많이 벌인 화완옹주를 정치력이 탁월했다고 표현한 부분(152 페이지) 등은 아쉽다. 세검정(洗劍亭)이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란 내용은 일반론과 다른데 그 부부분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없어 의아하다.(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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