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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여지없이 일깨우는 책  | 역사 2019.01.21 10: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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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역사의아침 | 201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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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을 부제로 한 책이다. 출간 8년이 넘은 책이다. 김용만 저자의 '조선이 가지 않은 길'의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그간 선비를 지나치게 개인에 초점을 맞춰 보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선비를 보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1) 어떤 인물이 당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충실했고 더 나은 가치 창출을 위해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 2) 그의 삶이 시공을 초월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지, 3) 그 사람의 직책이나 지위에 부여된 기대(임무, 사명)에 얼마나 부응했는지 등이다.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선비들이 몸 담았던 사회의 모습과 그들이 주도했던 정치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비정신만을 분리해 일방적으로 다루고 찬미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식민사관과의 관계이다. 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식민사관에 대항해 당쟁이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당쟁을 무조건 비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당쟁을 그렇게 치열하고 극단적으로 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조선 선비들은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자당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물고 뜯고 싸웠다.

 

당쟁 이야기가 주가 아니기에 넘어가고 진경문화론과 식민사관과의 관계를 논하자. 진경문화론 역시 당쟁론처럼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연구동향이다. 조선 선비들은 권리만 추구했고 의무나 책임은 나 몰라라 했다. 때로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도 자파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무시했다.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다. 이는 조선 국왕을 중국 천자의 대리인으로 여긴 것과 관계있다.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충성을 바칠 대상은 중국 천자라 생각한 결과이다. 개인적으로 따뜻한 인품을 보인 선비들이 제도적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노비에 개인적 인정을 보인 이황이 노비 해방을 반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이다. 조선 선비들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재산가들이었다. 안빈낙도란 말은 가진 자의 유유자적, 음풍농월을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저자는 정치를 담당할 학식과 교양을 갖춘 유일한 계층인 선비들이 정치가 타락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만 깨끗하겠다고 은퇴해서는 제자나 후학들을 통해 중앙 정계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으로 개입하는 정치 행위를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 이론은 검증된 적이 없다. 세자 책봉 과정에서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이 발생한 이성계 집안은 콩가루 집안인데 이성계가 수신, 제가를 잘 했다고 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주희의 이론 적어도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부분은 금과옥조로 받아들일 것이 결코 아니다.

 

덕치, 교화, 왕도(王道) 등은 정치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역사상 승자는 늘 패자(覇者)였다. 저자는 이상향의 효시인 요순시대는 실존이 확인되지 않은 상상 속 시대라 말한다. 계승범 교수의 책에는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정치 현장에서는 문제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옛 것만을 근본주의식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개인 차원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그런 사람들로만 구성된 권력구조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조선 국왕이 두 차례나 반정으로 쫓겨난 것은 왕의 친위부대가 부재한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자기 수신은 제대로 하지 않고 정쟁을 일삼으면서 왕에게만 수신(修身)을 강조한 이중적인 존재들이었다. 군자와 소인을 가른 공자의 생각은 현실성이 없는 관념적인 것이다. 아니 중세적 양단 논리이다. 조선 선비들은 노비 제도 등으로 귀천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예의와 염치를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저자는 노비를 거느리지 않았던 공자와 맹자 등은 어떻게 예의와 염치를 실천했는지 묻는다.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은 1801년의 공노비 해방 조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한 박지원도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148 페이지)

 

조선 후기에 국내의 상공업 발전을 중시함으로써 비교적 가장 현실성 있는 국방강화책을 제시한 박제가도 양반의 군복무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176 페이지) 조선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전체 파이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주어진 농산물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조선 선비들은 상업으로 이익을 남기는 행위를 소인배의 행동으로 간주했다. 혹자는 지금 기준으로 과거를 본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백성을 배불리 먹인 후에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 맹자를 생각해보라. 정치의 3대 요소를 경제, 군사, 백성으로부터 얻는 신뢰라고 언급한 공자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가 말한 세 가지를 제대로 수행하려다가 시세를 잘못 만나 아쉽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자기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에만 몰두했기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나는 조선이 상공업을 천시해 가난의 길을 자초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조선 선비들이 숭상하는 맹자의 이론 즉 당시 기준으로 문제삼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자신들은 실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늘 왕을 가르치려고만 했고 천재지변의 책임도 왕에게만 전가했다.(117 페이지)

 

저자는 평소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중국의 사례를 인용하면서도 서얼 허통의 경우에는 침묵한 이유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 말한다.(139 페이지) 이 역시 당시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행일치, 높은 도덕성 등은 당시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이런 이상한(선택적) 함구는 이황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즉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서얼 차별을 정당화했지만 서얼을 차별하지 않은 중국이 어떻게 나라의 근본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굳게 함구한 것이다.(145 페이지)

 

대체로 제국이 보편성과 다양함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 비해 제국을 추종하는 주변부 문명에서는 대개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어떤 체제나 이념이 원형 그대로 남는 면이 강하고 특히 교조적으로 변형되어 권위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다.(234 페이지)

 

조선의 유교화는 17세기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며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배타적으로 진행되었다.(235 페이지) 저자는 동서고금의 인류사에서 타자의 지배하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손쉽고도 보편적인 방법이 종교적(의례적) 율법들을 더욱 교조화해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237 페이지)

 

조선의 지배층이 외교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청나라를 새 종주국으로 받아들였지만 국내에서는 그런 현실을 부정하고 이미 망한 명나라를 영원한 군부(君父)로 간주하며 더 철저하고도 애틋한 정을 보였다.(236 페이지) 타자란 청나라를 말하고 지배란 그들의 세력권하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저자는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는 정치적 주권을 완전히 상실해 정체성 위기를 맞을 경우 전통문화의 역사를 지키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 말한다.(239 페이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전통문화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민족의 정체성이 거의 전부 사라지는 것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의 경우 사회풍속 차원에서는 오히려 유교적 가치를 고수함으로써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는 일제의 침략에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지키려 했다. 조선 선비들의 가장 큰 실수는 명, 청 교체기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명이 망한 지 200년이 지나도록 소중화를 외치며 자신들이 만든 상상 속의 명질서(明秩序) 속에서 정저지와(井底之蛙)식 정책과 사고방식을 고수한 것이다.(241 페이지)

 

저자는 한국문명의 쇠퇴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선비들이 애국자로 평가받게 된 현실을 비극으로 표현한다. 개화파들 중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선 자가 거의 없는 현실과 극명하게 대조된 위정척사 운동으로 인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그것은 국권 상실의 책임을 져야 할 유학자 선비들을 애국자로 변신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타락한 유교문화와 부패한 양반통치 문화를 청산할 기회를 놓쳤다.(242 페이지)

 

우리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조선 멸망의 원인을 명분론적 사대주의와, 민생을 외면한 당쟁이라 지적했다. 우리 스스로도 그런 점을 원인으로 결론낼 수 있는 상황인데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이라는 외세의 식민사학자들이 지적했으니 더구나 악의적으로 했으니 그에 대한 반동 또는 반발로 사대주의는ᅵ 의리 있는 행동으로, 당쟁은 붕당정치로 미화한 것이다.

 

피해란 우리가 그들로부터 민족적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반동으로 청산해야 할 과거를 미화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쟁이 없었던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조선의 당쟁은 대를 이어가며 전국을 무대로 300년 이상 이어졌다는 점에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바(187 페이지) 80퍼센트 이상의 사대부 집안이 정치에서 배제된 탓에 소멸되었지만 이는 긍정적인 종결이 아니다.

 

당쟁은 급기야는 국가경쟁력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 근대의 물결을 맞아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일본에 먹히는 결과를 낳았다.(185 페이지) 앞서 진경문화론이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연구동향이니 이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는데 식민사관이 없었다면 진경문화론이 탄생했을까?

 

정선(鄭敾; 1676 - 1759)의 진경산수화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우리가 17, 18세기에 문화적 자주의식을 가졌는지 회의하는 학자도 있다.(한정희 지음 '한국과 중국의 회화' 217 페이지) 한정희 교수는 18세기 한국회화의 창의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회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한동안 팽배해 있는 와중에도 기본적으로 문화적인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한정희 교수는 금강산을 찾고 그린 것은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자아의식이나 국가의식의 발로라기보다 세속에서 잠시 떠나 초속(超俗)의 진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심진(尋眞)의 경지이며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신선의 마음이 되어보려는 일종의 신선사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논의를 소개한다.

 

우리의 문제는 선비정신과 유교문화 자체이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을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일망정 미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교를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단재 신채호는 주목된다.

 

저자는 일제의 어용학자들이 유교의 폐해와 사대주의를 한국문명의 쇠퇴와 조선 멸망 원인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던 상황에서 그들의 해석과 같이 과감하게 유교의 폐해를, 특히 사대주의를 국운 쇠퇴의 주원인으로 지적한 신채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나름의 논리를 전개한 신채호야말로 식민사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인 사학자가 아니었을까? 라고 말한다.(244 페이지)

 

필요한 것은 소신이고 부분이 아닌 전체성을 보는 것이고 냉철하고 객관적인 현실적 시각을 갖는 것이다. 늦었지만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적극 추천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통쾌함을 느꼈다. 핵심을 너무도 정확히 논리적으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통쾌(痛快)라는 말을 생각한다. 통쾌의 통은 통할 통자가 아니라 아플 통자이다.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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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와 악(樂)의 공명, 공존을 음미하게 하는 책  | 인문 2019.01.13 2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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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
추수밭 | 201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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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가 순() 임금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음악의 일종인 소()를 듣고 석 달동안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박지원의 열하일기 '망양록(忘羊錄)'에 의하면 박지원은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양 한 마리를 통째 쪄 준비해 놓고 그 손님과 진지하고도 재미 있는 음악 이야기를 하느라 양을 쪄놓은 사실을 잊었다고 한다.

 

송지원 교수는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에서 박지원이 그럴 정도로 나눈 이야기는 조선과 중국의 음악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제목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이다.

 

조선 성종대에는 1000여명의 음악인들이 장악원에 속해 음악을 연주했다. 조선시대에 왕실 행사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장악원 음악인들이 있었다. 조선의 악()은 예()와 함께 의례의 핵심이었다. 장악원은 숭정원, 사간원, 홍문원,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과 함께 정3품 관청이었다.

 

1년 중 장악원이 가장 많이 출연하는 행사는 제사 의례이다. 장악원의 최고 책임자는 제조(提調)였다. 당상관 두 명이 맡았는데 전문 음악인이 아니라 행정관리였다. 이는 성리학자들이 임금의 몸과 관련된 정보의 총책임자를 맡았던 것과 맥락이 같다.(어의들은 진맥 외의 방법으로 임금의 몸을 진찰할 수 없었다.)

 

성리학은 조선 시대의 여성 음악인들을 남성이 주축이 되는 외연에 출현하지 못하게 했다. 인조반정 이후의 일이다. 본문에는 차비(差備)란 말이 나온다. 자비(自備) 또는 척()의 의미이고 우리 말로 잡이라 한다. 장구 잡이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조대의 화원을 자비대령화원이라 했다. 한문으로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썼다. 정조는 귀가 밝았다.

 

세종, 세조처럼 정조는 장악원 음악인들의 연주를 다그쳤다. 특히 정조는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의 선율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사직제에서 연주되는 제례악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음악을 소홀히 연주하는 것을 지적하고 엄히 다스렸다. 정조는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함께 온 굴씨(屈氏) 또는 굴저(屈姐)라는 궁녀가 있었다. 명나라가 쓰러져 갈 무렵 숭정제 황후의 궁녀로 일하던 여자였다. 숭정 말년에 이자성이 황도를 함락시키자 황제와 황후가 자살했다.

 

굴씨는 민간으로 몸을 피했으나 청나라 군사에 발각되었다. 청의 실권자였듼 예친왕 다르곤은 굴씨를 심양에 볼모로 있었던 소현세자에게 넘겼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온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시게 되었다. 굴씨는 비파를 잘 타 장악원 소속 음악인들에게 비파를 가르쳤다.

 

이때는 조선이 전란 후유증으로 종묘/ 사직 제례악도 연주하지 못하던 때였다. 음악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굴씨는 70세까지 살다가 숙종대에 생을 마감했다. 조선은 예악정치를 구현했다. 예는 인간의 차별적 질서를 강조했고 악은 인간의 조화와 공존을 강조했다. 종묘제례시의 춤은 제후국의 위격인 육일무였다. 일수 6, 열수 6으로 36명이 추는 춤이란 말이 있고 일수 6, 열수 8 48명이 추는 춤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논어 '팔일(八佾)'편에 주자가 주석한 내용에 본인도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른다는 글이 있다. 조선 전기는 48, 중기, 후기는 36명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묘 제례는 조상(선왕)의 혼을 만나는 기쁜 의례 즉 길례(吉禮)이다. 장례는 흉례(凶禮)이다. 이때는 진이부작(陳而不作)했다. 악대는 진설(陳設)하고 음악은 연주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3년 동안 연주를 하지 않으면 제례악을 다시 연주할 때 어려움이 생기거나 새로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전승이 끊어지므로 그런 것을 우려해 악생들의 연습은 허용했다. 궁중 연향에서 연행되는 춤을 정재(呈才)라 한다. 재주를 드리다, 재예를 올리다란 뜻이다.

 

조선은 무너진 예를 악으로 일으키려 했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은 <세종실록> '오례'로 국가례의 기틀을 마련했고 성종대의 <국조오례의>로 전모를 정리했다. 맹사성은 악인이기도 했다. 장악원의 전신인 관습도감의 제조로서 맹사성의 업적은 눈부셨다. 조선 초기 궁중 음악은 그로부터 정비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맹사성은 세종대의 박연과 함께 지악지신(知樂之臣) 즉 악을 잘 아는 신하로 불렸다. 박연은 세종의 뛰어난 음악 비서였다. 성종대의 장악원 제조였던 성현을 빼놓을 수 없다. 성현은 '악학궤범'의 저자이다.

 

김용겸(金用謙)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기대주였다. 김용겸은 악서인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읽었느냐는 정조의 물음에 그 책을 보았고 종과 석경 소리를 들으면 높고 낮음 정도는 분별할 수 있다고 답했다.

 

예와 악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 정조는 음률과 예학에 두루 깊은 인재 김용겸을 장악원 제조로 임명했다. 김용겸은 박지원, 홍대용, 이서구, 정철조 같은 연암 그룹 구성원들과 자주 어울렸다. 정조 대의 학자 출신 관료들은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음악 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정조가 집권 초반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아악기인 종, , , 슬을 규장각에 하사한 것은 악을 중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예와 악을 함께 갖추기 위한 정조의 노력 덕에 정조 시대는 문화융성기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정조 자신의 음악 실력과 무관하지 않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생부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사도세자를 모셨던 수은묘를 경모궁(오늘날 서울대 의대 자리)으로 승격시켰다. 경모궁의 제례를 정하고 경모궁제례악도 만들었다. 고종황제가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며 경모궁의 신주를 종묘로 옮긴 이후부터 경모궁 제례는 열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누구나 왠만큼 거문고를 연주했다. 옛 선비들은 거문고를 삿된 마음을 금하여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거문고는 단순히 악기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거문고 음악이 예술성을 추구하거나 기교를 자랑하는 음악으로 나아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두 줄의 악기이지만 표현 영역은 거의 무한대인 해금은 현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관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두루<> 어울려 비사비죽(非絲非竹)의 악기 즉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닌 악기로 불렸다.(비사비죽은 18세기 유명 해금 악사 유우춘의 표현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현악기는 현을 뜯거나 튕기고 나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음이 끊어지지만 해금은 줄을 마찰시키는 한 계속 소리가 나기에 관악기로도 볼 여지가 있어 관악기이면서 현악기라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 하다고 말한다.

 

예전에 왕이 죽으면 명기(明器) 악기라 해서 소형 악기를 만들어 왕의 무덤에 묻었다. 조선 전기부터 경종의 무덤까지 아쟁을 묻었는데 정조대 이후에는 아악기만을 묻었다. 비파(批把)라는 이름은 악기 연주법에서 유래했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타는 것을 비, 안으로 끌어 당기며 연주하는 것을 파라 한다. 오늘날 비파는 비파(琵琶)로 쓴다.

 

맹사성, 박연, 정약대, 김계선 등이 대금의 명인이었다. 특히 정약대는 '정약대의 대금'(조용미 시인의 시)이란 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마지막 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청아하고 신묘하고 장쾌한 소리를 향해 대금을 지고/ 사막을 건너야 할 운명을 火印처럼 몸에 새기고 태어난/ 사람, 그의 귀는 10리 밖에서도 대금 소리를 잡아냈을까// 정약대는 낙타였다"

 

저자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옛 조상들은 예()와 악()을 함께 추구했다는 점이다. 특히 무너진 예를 악으로 바로 세우려 했다. 늘 연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장악원 악인들을 통해 연습의 의미를 음미하게 된다. 특히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던 정조를 다시 보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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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보는 새로운 방법...상당히 독특한 책 '임금의 도시'  | 인문 2019.01.07 17: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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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임금의 도시
사회평론 | 20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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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도시'는 지리학자의 책이다. 풍수를 연상하고 책을 접한 것은 아니다. 도시에 대한 관심이 주된 요인이다. 풍수는 정치적으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 나라를 세우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 후속 작업이다. 정통성 확립을 말하는 것이다. 천도는 새 임금과 신하들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풍수를 근거로 논전을 펴고 결론을 내린 과정이 조선 건국 이후 벌어졌다. 조선은 고려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풍수를 주요 원리로 활용한 고려의 관례대로 풍수를 활용했다. 반면 고려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나라임을 보이기 위해 중국의 도시 조영 원리를 새롭게 도입했다.

 

저자는 종묘와 사직을 언급하며 궁궐 - - 하늘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것을 3단계 풍경이라 정의한다. 일직선상에 위치시키기 위해 진입로가 정방향이 아니게 설정되었다는 것으로 종묘도 사직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이다. 좌묘우사를 따르면서도 정확한 좌우대칭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종묘는 외대문(정문)과 보현봉을 일치시키기 위해 진입로를 정북이 아닌 서북쪽으로 향하게 했고 사직은 인왕산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기 위해 진입로를 서서북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경궁이 동향인 이유도 3단계 풍경을 설정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진입로를 꺾고 정전의 방향을 달리하고 정전의 위치를 치우쳐 만든 것들은 모두 3단계 풍경을 구현하기 위한 필연의 산물이다. 인상적인 것은 보편과 특수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94 페이지)

 

권위의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보편성)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특수성)은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거대 건축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106 페이지) 이는 권위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구현방식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산에서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외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경우 권위를 표현하는 중심은 경복궁 너머의 북한산, 관악산이고 건축물인 경복궁의 경우 그 자체가 별개의 시각대상이 아니라 북한산, 관악산과 얼마나 일치감을 줄 수 있는지의 관점에서 결정된다.(110 페이지)

 

이는 경복궁 뿐 아니라 우리의 주요 궁궐, 종묘, 사직, 성균관, 지방 고을의 관아, 향교, 사찰, 서원 등에 두루 해당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높고 웅장한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의 풍경과 3단계 풍경의 차이는 산의 유무이다.(117 페이지) 저자는 명당을 살기 좋은 땅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본 낭만적이고 비학문적 시선일 뿐이라 말한다. 가령 서울 최고의 명당인 경복궁과 근정전의 터를 잡는 데 동원된 풍수 명당 논리는 사람이 살기에 편안한 땅을 찾기 위한 이론이 아니라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 있는 공간 찾기 이론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흥미롭다. 창경궁이 남향이 아닌 동향인 이유가 지금껏 정치를 하는 군주들의 궁이 아니라 대비(大妃)들을 위해 지은 궁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정답이라도 되는 듯 퍼져있는 상황에서 풍수에 근거 3단계 풍경 이론을 제시한 것만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경복궁이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을 고르려 한 결과 선정, 영건(營建)된 것이 아니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 있는 공간을 찾은 결과 영건된 것이라 말한다. 그는 명당에 터를 잡은 것과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 실질적 인과관계는 전혀 없다는 말을 한다.

 

중요한 것은 풍수가 가진 실용적 측면과 사상으로서의 풍수란 말(144 페이지)이다. 간혹 풍수가 가진 실용적 측면이 주목되기도 했지만 이 경우 사상으로서의 풍수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말이 중요하다.

 

책을 읽다가 뷔리당의 당나귀 생각을 했다. 모든 면에서 똑같은 두 개의 건초더미 앞에 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어 굶어죽는 당나귀이다. 나는 점서(占書)로서의 성격과 사상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주역도 생각했다. 지금껏 나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풍수에 대해서도 주역에 대해서도. 결론은 둘 다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용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고려 대상은 아니라는 의미다.

 

고려의 경우 건국 이후 임금풍수(임금과 관련된 모든 공간에 적용한 풍수; 172 페이지)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타난 것은 110여년이 지난 문종, 숙종, 예종 시기이다. 고려시대의 정치가 가장 안정되고 문물이 가장 발달했다고 평가받는 때였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건국과 통일의 긴장감이 사라져서 새로운 변화를 통해 긴장감을 다시 불어넣어야 하는 시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이용되었던 것이 바로 풍수의 지기쇠왕설인데 수도로 정해진 지 오래되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여겨진 개성의 지기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궁궐이나 작은 서울인 남경을 건립하고 서경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났다.(188 페이지)

 

저자는 풍수 이론가들이 득수국(得水局) 명당은 방어에 취약하고 장풍국(藏風局) 명당은 방어에 유리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지레 방어를 포기하고 도망간 전력을 왜 고려하지 않는지 묻는다. 경회루 부분도 흥미롭다.

 

경회루는 다른 나라의 어떤 누각과 정자보다도 크다. 저자에 의하면 경회루는 연못이나 인공적으로 심은 나무보다 인왕산, 북악산, 경복궁의 전각 지붕과 남산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되어 건물 자체가 클 수 밖에 없다.(261 페이지) 저자는 향원정도 천원지방의 영향이 아닌 경회루와 같은 차경(借景)의 원리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 말한다.(268 페이지) 저자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아야 정원이 보인다고 말한다 .

 

저자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연구자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멋진 말이다. 이런 책을 보면 기존의 논의가 참 공허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천원지방 등의 말을 해설 때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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