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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삶의 근원을 찾는 쉼 없는 발걸음

이 시조집 『벼랑에 핀 꽃』에 나타난 노재연 시인의 시 세계는 무엇보다도 작은 것, 어린 것, 심지어 어리석은 것을 포함하는 모든 약자에 대한 자애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상관이 없다. 예컨대 작은 조약돌 하나에서까지 그것의 소중한 존재 가치를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리고 응원하는 마음이 마냥 따뜻하다. 시인의 마음결에는,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감동이 일게 하는 진정이 서려 있다.

노재연의 시 세계의 진면목은 인간 본성을 찾아 성실한 발걸음을 새겨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물과 삶의 모든 면을 관찰하고 통찰한다. 성찰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한다. 그리하여 조그만 일에서도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진실을 또는 인간과 우주의 본성과 원리를 확인해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것이 한계가 있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은 반드시 지키고 높여야 할 것은 반드시 높인다.
노재연 시인에게 어렵거나 힘들다는 것은 결코 변명의 대상이 아니다. 열심히 추구하며 무한히 기다린다. 그리고 집중한다. 대단한 겸손이요 경건이다. 거의 경외敬畏하는 마음으로 지성至誠을 다한다.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종교보다도 진지하다. 〈평설〉 중에서

■평설

인간과 삶의 근원을 찾는 쉼 없는 발걸음
-노재연 시조의 시 세계

이석규
(시조시인, 가천대 명예교수)

1. 들어가기

노재연 시인은 2016년에 등단하셨으니 시조시인으로 활동이 이제 겨우 8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는 시조집 『벼랑에 핀 꽃』이 어느새 여섯 번째의 시조집이 된다. 그러니까 100편이 훌쩍 넘는 분량의 시조집을 매년 한 권씩 내는 셈이다. 더구나 이제껏 낸 5권의 시조집들이 모두 출토出土의 아픔을 견뎌낸 천년 유물처럼 저마다 소중한 깊이를 담고 있다. 또 시조집마다 시조 한 편 한 편들이 모두 격조가 있어서, 마치 알곡만 모아 놓은 곡간처럼 가멸차게 느껴진다. 물론 이번에 내는 『벼랑에 핀 꽃』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완숙의 경지에서 오는 넉넉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보통의 경우 평설을 쓰기 위하여 좋은 작품을 고르는 것이 참 중요한 작업인데, 노재연 시인의 이번 시조집은 모든 작품이 다 뛰어나서 오히려 부족한 작품을 추려내기 위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조집 『벼랑에 핀 꽃』에 나타난 노재연 시인의 시 세계는 무엇보다도 작은 것, 어린 것, 심지어 어리석은 것을 포함하는 모든 약자에 대한 자애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상관이 없다. 예컨대 작은 조약돌 하나에서까지 그것의 소중한 존재 가치를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리고 응원하는 마음이 마냥 따뜻하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그것을 인내하며 성실히 적응해나가는 생명체의 고통과 인내를 철저하게 공감하는 시인의 마음결에는,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감동이 일게 하는 진정이 서려 있다.
또 한 가지 대부분 작품에서는 깊은 관조와 명상을 통한 자기 수련, 특히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무심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비우고자 하는 이른바 사무사思無邪의 자기 다스림이 잘 그려져 있다. 나아가 그 비운 자리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차곡차곡 채우고자 하는 쉬지 않는 천착穿鑿과 노력, 완숙을 향하여 집중하고 몰두하는 시인의 외롭고도 결곡한 모습에서 겸손과 성실의 전형을 보게 된다.
그 밖에도 언어를 다루는 예술가로서, 시조시인으로서의 기량이나 열정 등은 깊이와 무게와 자유로움에서 이미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본문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다만 그의 시조가 갖는 가치와 예술성을 찾아서 일일이 소개하기에는 지면과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한다.

2. 생명

(생명의 아름다움)

촉촉한
봄 햇살로
샤워한 나의 뜰에

이제 막
잠에서 깬
연초록 아가들이

세상이
하 신기한 듯
호기롭게 날 본다
「봄의 생명, 날 엿보다」

작고 어린 생명의 이야기다.
세상이 뭔지 모르는 아가들이, 하늘이 펼쳐준 세상, 그들의 낙원에서 첫눈을 뜬다. 아직 추운지도 모르고. 세속에 물들지도 않았다. 순수한 생명이,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화자의 섬세한 감수성을 따라서 살아난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호기롭기까지 하다.

초록 옷 갈아입고
춤추는 네 모습에

새들의 환호 소리
하늘을 찌르는구나

녹엽이
기다려짐은
어디 새들 뿐이랴.
「녹엽을 기다리며」

모든 의미는 생명을 가짐으로써 시작된다. 생명을 가진 자의 소망은 모두 함께 춤추며 돌아가는 즐거움의 충일한 발현이다. 거기에서만 진정한 기쁨과 환희의 극치를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와 새들이 함께, 모두 함께 말이다. 아마도 그것의 질료는 진정한 생명력 곧 사랑일 것이다. 화자의 기다림은 바로 그것들이 윤무輪舞로 하나가 되는 정점, 곧 녹엽의 계절이다.

수와 희가 타고 넘던
질풍노도 그 언덕길

선홍의 언어들이
송이져서 떠돌다가

실가지
마디마디에
하트처럼 앉아 있다
「복사꽃 추억」

어린 날, 젊은 날을 추억한다. 그곳은 푸르른 이미지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젊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언어들이 송이를 이루며, 가지마다 선홍의 복사꽃으로 내려앉는다.
그렇게 어린 날들이 채색옷을 입고 되살아나서 화사하게 웃고 있다. 얼굴 표정은 하트 모양이다. ‘질풍노도’, 그것은 바로 젊음의 속성이다. 그들의 생명력엔 거침이 없다. 비로소 화자는 인생의 참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된다. 생명의 최선의 의미는 사랑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심미적 감수성을 예술적 언어로 절제하는 기량이 뛰어나다.

성하盛夏 볕 탐하더니
용암이 솟구치듯

불덩일 토해내는
돌 틈새 맨드라미

시심에
불길이 번져
시어들을 뿜는다
「시심의 분출」

꿈만 크다면, 소망이 아름답다면 돌 틈새인들 문제가 되랴. 시인은 맨드라미의 사랑스러운 꽃잎 표면에서 아름다운 시어를 발견한다. 그것은 깊은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맨드라미꽃의 원질, 불덩이, 다시 말하면 생명의 DNA이다.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맨드라미의 그리고 화자의 심미적 시심詩心의 감동적 발현이기 때문이다.

(함께)

소리가 엎질러져 질펀하게 흘러가고
호반새 울음소린 강섶이 거두어가
가슴에
파도칠세라
흔적 없이 사라진다

바람을 등에 업고 수다 떨며 가는 여정
망향이 앞장서서 어서 오라 손짓하면
바위에
부딪는 소리
산산 찢겨 흩어진다

소리는 무료하면 강섶에 기어올라
잡초처럼 제멋대로 가을을 키워내고
파랗게
열린 허공에
함성처럼 맴돈다
「강섶에서 엿듣다」

강섶에서 질펀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물소리, 바람 소리는 흐르고 달려가며 계절의 가슴을 흐르다가 부딪치고 흩어진다. 물 밖으로 나가면 촘촘한 가을의 푸나무 숲, 모두가 지껄이며 수다 떤다. 손잡고 모두가 함께 흐른다. 가을은 끝없이 활짝 열린 허공을 창조한다. 그렇게 맴돌며 부서지다 사라지며 쉬지 않고 모두가 흘러간다.
특히 셋째 수 초장 중장 “소리는 무료하면 강섶에 기어올라”, “잡초처럼 무성하게 가을을 키워내고”
자연에 숨어 있는, 시인에게만 들려오는 생명이란 존재의 아우성이다. 하늘과 땅과 강물의, 강섶에서 들려오는 만상이 함께 부르는 그 소리는, 세상과 우주의 소리요, 자연 속에 얽혀 있는 카오스의 함성이다. 그것의 속성은 생명이다. 그 소곤거림과 울음과 웃음을, 세월과 시간과 인연의 의미를 창조하고 지우며 살아가는 우주의, 생명의 소리다. 모두 함께 익어가는 슬픈 가을의 형상화다.

핏줄처럼 얽혀 있는 내륙의 젖줄로서
토양을 살찌우고 생명을 부양하니
강물은 생명수이다, 어머니의 젖샘처럼

-중략-

온갖 사연 품어 안고 말없이 흘러가며
경사에 함께 웃고 애사에 함께 우니
강물은 공동체이다, 희로애락 함께하는
「강물은」 일부

강물은 공동체이다,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강물의 인정이요 강물에 부여하는 의미의 실체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주는 매개 그것은 ‘함께함’이다.
이 시조는 각기 뚜렷한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는 모든 생명의 대화합, 서로 다른 개체가 일심동체로 하나가 되어 함께하는 생명의 비밀에 대한 천기누설天氣漏泄이다.

(큰 그릇)

골목길 보도 틈새 핼쑥한 잡초 하나
오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오늘도 무사하기를 난선難船처럼 꿈꾼다

발길에 짓밟히면 달빛에 치유하고
오뚝이 일어서듯 허리를 곧추세워
언제나 불사조처럼 생명력을 잇는다
…
「잡초의 생명의지」 일부

노재연 시인이 소중하게 추구하는 인생의 덕목 중 하나가 어려움을 인내로 극복하는 끈질긴 생명력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의 이러한 인생관을 구체적으로 잘 그려낸 작품 중 하나다. 때로 불가항력적일 때 눈치를 살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소망과 긍정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를테면 “발길에 짓밟히면 달빛에 치유”한다. “오뚝이처럼”.
허리를 곧추세우고 불사조처럼 생명을 잇는 인간의 소망과 노력의 끝없는 추구와 긍정, 찬양…, 이것이, 큰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생명이란 존재가 창출하는 지상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싸늘히 식어버린 저 들녘의 백발노인
아릿한 애환을 삭여 하얗게 웃고 있다,
노을이 바싹 다가오는 이승의 현관에서
「억새의 무언극」 일부

이 작품은 모두 3수로 된 연시조 중 둘째 수이다. 이 부분만 그대로 단시조로 발표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가을도 저물고 초겨울쯤 되나 보다. 추수로 모든 것이 사라진 텅 빈 들녘에서 억새 홀로 아릿한 애환의 생애를 삭이며 백발노인처럼 웃고 있다.
하얗게 말라버린 억새와 온기가 사라져가는 노년의 화자 사이의 동질감을 잘 어울리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온기가 사라지는 것만으로 끝이랴.
셋째 수는 많은 슬픔을 견뎌낸 뒤, 이제 어린 날의 추억마저 뒤로하고 다른 세상으로의 회귀를 무언으로 수용하는 넉넉함을 보여준다. 화자의 인간적 그릇의 크기를 느끼게 해준다,

내 유년의 허물들이 세월에 풍화되어
돋보기로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구나,
진무루* 옛 성곽 터는 성장盛裝하고 반기는데

어딘가 묻어 있을
지문도 종적 없고

기억은 바람처럼
자취를 감춰버려

눈에 든
온갖 풍물이
이국인 양 생경하다

세월에 앞장서 온 내 안의 겨울철은
내 삶을 시베리아로 끊임없이 내몰고
추억은 블랙홀 속에 소리 없이 지는구나
「기억의 흔적」

진무루 옛 성터를 찾아 기억을 더듬는다. 화자가 살아온 그 싱싱하던 순간들, 그 진실과 간절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성곽은 더욱 새롭게 그 자리에서 반기고 있는데, 그 따스했던 소망과 꿈은 어디로 갔나, 그냥 흔적 없이, 종적 없이 블랙홀로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허무하고 허망하다
기억을 더듬는 시인의 마음은 춥기만 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추운 것이 인생이다. 언젠가 새 물결이 밀려올 것이다.

(작은 것, 약한 것)

고향을 묻어 두고 신천지가 그리워서
부초처럼 정처 없이 물길 따라 떠돌더니
아련히
향수에 젖어
넋을 잃고 있구나

물살이 달려와서 수시로 들때려도
인내가 살길인 양 항변 한 번 못하고
울화를
홀로 삭이더니
속살까지 까맣네

이제는 널 입양할 살뜰한 주인 만나
사랑채 서가에서 귀자貴子처럼 자리 잡고
오가는
눈길을 유혹
네 매력을 뽐내라
「몽돌」

작고 귀여운 몽돌의 존재 방식에 감정을 이입해서 아우처럼, 조카처럼 그들의 아픔과 설움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앞날을 축복한다. 그 작고 약한 것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속살이 까맣게 타도록 꿋꿋이 인내하되 불평 한마디 없다. 화자는 그 모습에 감동하며 무한한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산기슭 나무 위에
집 지은 까치 가족

이따금 들려오는
벌목 소식 걱정이다

또다시
시간을 으깨
엮으란다, 새 꿈을
「판자촌의 비애」

시인은 또한 칠전팔기七顚八起하는 까치들의 삶의 자세가 놀랍고 감동스럽다. 자기 능력 밖의 힘에 의해 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다시, 또다시 ‘시간을 으깨’가며 그들의 판잣집을 엮어낸다. 행복에의 소망을 위한 절대 멈추지 않는 생명의 몸짓을 보며, 시인은 못내 안타까워한다. 까치집과 판자촌의 중의적重義的 함축은 약하지만, 좌절을 모르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함께 느끼는 공감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삼월 계곡수」에서는, 얼음이 조금씩 녹으면서 계곡수는 아장아장 걸음마 하는 아가가 된다. 입에는 풋풋한 젖내가 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약하고 어린 것들만이 추위와 고통을 이겨내는 생명력이 있음을, 그렇게 생명이 성장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약자들의 장한 생명력을 포착해내는 화자의 섬세한 촉감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 밖에도 다른 작품들, 예컨대 「질경이」, 「낙엽의 신세」 등의 작품들에서도 못나고 천대받는 삶의 고통을 인내로 살아가며 삶의 진리를 깨우치는 오밀조밀한 약자들의 몸짓에 화자는 그냥 감동에 빠져버린다. 따뜻한 인간미를 흠씬 맛볼 수 있다.

아내는 좋아한다,
못난이도 많이 주면

낙과를 깎다 보면
껍질만 쌓여가고

입보다
코가 앞질러
슬픈 내음 맛본다
「못난이 사과」

큰 것을 표현함으로써 큰 것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작은 것으로 슬쩍 변죽을 울려 오히려 큰 것과 그 본질을 그려낼 줄 아는 노련의 경지에 있다. 때로는 어느새 감각을 잃은 환자의, 본능에만 충실한 그 단순함의 행복을, 화자는 자신의 키를 줄여, 함께 느끼고 그것을 감사한다.
작고 약한 것이 꿈과 소망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 인내하고 이겨나가는 몸짓의 소중함을 알아보는, 화자의 약자에 대한 참사랑, 그 순수한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생명은 연약하다. 언젠가는 죽는다. 생명만이 그것을 알고 그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자유와 소망을, 영원과 무한을 동경한다. 그러나 그 결국은 언제나 “철창에 갇힌 호랑이의 앞발처럼 절망에 빠진다”(「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약함 때문에, 무지 때문에,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슬프고 아프고 고달프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요 숙명이다. 아니 그들의 본질이요 존재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자들은 사랑을, 영원을, 그리움을 추구한다. 때로는 그러한 현실을 수용하고 용인한다. 때로는 ‘서로’ ‘함께’ 힘을 합쳐 돕고 힘내고 즐기기도 한다. 그것이 생명의 가치요 의미요 아름다움이다. 놀라운 지혜로움이다.
노재연 시인은 이 점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슬프고 장쾌하게, 쉬지 않고 형상화, 변용하는 예술 시조 창작으로, 지속해서 위안과 용기와 생명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2. 우리 것

(자연, 인생, 심미)

새들이 노래하듯 꽃들이 노래한다,
귀여운 몸짓으로 아름다운 음색으로

바람에
몸을 흔들며
득음한 듯 청청하다
「꽃들의 노래」 첫수

소리의 그림, 삼라만상이 색채와 선과 음색과 음정으로 온통 조화를 이룬다. 시청각으로, 오감으로 세상 가득 꽃들이 율동한다.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노래로 하나가 되는 우주다. 생동하는 자연의 이미저리다.

햇살이 실비처럼 내리는 노란 바다
바람이 파도 타며 나비처럼 춤춘다
가슴속
울색을 꺼내
저 물결에 헹구리

바람에 버무린 봄 샛노란 바다에서
포만을 유예하고 물결 따라 부유하며
노오란
바람에 안겨
꽃 멀미를 탐하리
「유채 바다」

이 작품은 끝없이 노랗게 피어오른 유채밭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미적 서정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햇살이 실비처럼’, ‘바람이 파도 타며 나비처럼’, ‘바람에 버무린 봄’, ‘포만을 유예하고’ 꽃 멀미…, 말 그대로 무대 위에 펼쳐진 형형색색 봄을 환유하는 언어들의 유희가 서로를 빛내주며 자유자재로 흩어졌다 모였다 조화를 이루며 춤을 춘다. 실로 실체를 훨씬 뛰어넘는 언어의 예술적 별미를 맛볼 수 있는 명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선혈이 낭자한 길 햇살이 찾아와
헤실헤실 웃으면서 실없이 장난친다,
가을은
저승길에서
불꽃처럼 타는데

운명에 순응하여 꿈마저 팽개치고
바람에 휘둘리는 가을 새 바라보며
시인은
하늘길 앞에서
삶의 의미 새긴다
「단풍 유추」 2, 3 수

‘단풍’으로 유추하여 볼 때, 가을은 인생으로는 저승으로 향하는 어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보는, 이제는 많이 남지 않은 인생의 가을 길은 놀랍게도 화려하고 찬란하다. 불꽃이 타오르듯 단풍잎들이 선혈이 낭자하다.
정색한 진실과 장난질하는 진실이 대조를 이루는 우주의 공연을 바라보며, 화자는 또 하나의 생(生)의 의미를 담은, 무대의 막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 깊이와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있음이다.

(우리 것)

선과 선의 날 선 기운 거침없이 내달리고
우뚝한 매부리코에 두 눈은 부리부리
백묘법
강한 필법이
긴장감을 돋운다

명쾌한 필선으로 선의 운율 되살리고
호방한 단붓질로 가사를 입고 나니
이윽고
고해를 안고
세상으로 나온다

껍데기 해체시킨 순수의 형이상학
매서운 눈빛으로 참선을 재촉하며
달마는
생불이 된 듯
세상사를 질타한다
「김명국의 ‘달마상’을 읽다」

우선 기세와 그 기품이 범상치 않다.
“우뚝한 매부리코 두 눈은 부리부리”, 고해의 세상으로 나온 가사 입은 사나이, 형식과 치장은 찢어버리고 오직 진리만을 향한 눈빛이, 실제로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더 생생하다. 인물 자체가 이미 형이상학이다. 한번 선禪에 들면 100년은 빠져 있을 듯, 시작으로 바로 끝을 보는 변함없는 집념과 몰두의 아이콘이라 하겠다.
게다가 대담한 필법(백묘법)으로 창조해내는 달마達摩라는 도통한 스님의 투박하고 거친 외모와 내면에 숨어 있는 진여眞如의 정채精彩에 대한 암시가 놀랍다. 득도得道의 한국적 구상화라 할 만하다.

미명을 내달려온 봇짐이 풀리면서
가녀린 햇살 한 줌 고객처럼 찾아오고
예저기 펼친 좌판엔 하루 삶이 똬리 튼다

- 중략 -

막걸리 한 사발에 허기 달랜 노인장
비린내 한 봉지를 허리춤에 매달고서
사립문 밀고 들어서면 식솔들이 반긴다
「오일장」 일부

내 것, 우리 것, 우리의 생활 풍속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그리고 있다.
가난이 묻어 있는 좌판, 지난날 아픔의 흔적 같은 선량한 서민들,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훈훈하게 어우러져서 활기를 일으킨다. 오일장의 모든 요소가 그리고 참여자들이 함께 내는 삶의 합창 소리가 눈에 삼삼, 귀에 쟁쟁 들리는 듯하다. 소박하지만 흥청거리고 왁자지껄한 서민들의 모습들에서 우리 민족 전래의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장을 보고 돌아가는 노인, 기다리는 식솔들, 가난한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는 ‘비린내 한 봉지’…, ‘낯설게 하기’가 오히려 친근감을 줄 만큼 따뜻하고, 탁월한 시어詩語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눈 부신 햇살 아래 밟히는 왜군 실루엣
잊혀진 지난 세월 궐기하듯 일어선다
어이해 백성들 환호가 나에게만 들리랴

승전의 강가에서 목숨들이 일어선다
조국애에 점화되어 불타듯 타오른다,
임 그려 옷깃 여미고 조국 수호 다지며
「명량대첩 현장에서」 일부

명량대첩은 국권이 땅에 떨어짐은 물론, 무섭고도 잔인한 왜적의 침략과 방화, 지겹도록 비참한 약탈과 살인 행위가 7년간 지속된 지옥 같은 세월의 끝자락에 일어난, 위대한 전승戰勝, 대첩大捷의 역사적 사실이다. 놀라운 반전이요 쾌거다. 그중 빛나는 한 자락이 화자의 필설로 묘사된다. 잊혀진 세월 속에, 눈 부신 햇살, 밟히는 왜군들, 그리고 이 나라 선량한 백성들의 오랜만에 맛보는 환희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다. 살아 움직이는 장면마다 들썩거리며 일어선다. 조국 수호와 불타는 애국충정으로 온 나라가 들끓는다. 내 나라, 이 겨레, 게다가 온전히 자력에 의한 전란의 극복! 얼마나 자랑스럽고 신나는 언어들인가! 그리하여 이 일을 이루어 낸 장군을 우리는 장군이라고 하지 않고 성웅聖雄이라고 부른다. 더 좋은 이름이 있으면 더 좋은 이름으로 불러 드릴 것이다.

너를 쳐다보며 거울 보듯 나를 본다
겉으론 행복해도 깊이 보면 우울하니
아마도
마음의 창에
먹구름이 낀 게지

창문을 닦아내면 장미꽃이 보이리라
닦을수록 꽃송이가 더 예뻐 보이겠지
쉼 없이
면경처럼 닦아
티 없는 널 보리라

행복의 실루엣이 드리워진 삼장이랑
햇살이 찰랑대는 시전詩田을 일구어내
한 아름
가을걷이로
주름살을 펴리라
「시조의 얼굴」

민족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갖고 천년을 내려오는 우리의 최고, 최선의 시가詩歌인 시조에 대한 찬양과 사랑이 구절마다 굽이친다.
끝없이 닦아내어 티 없는, 부끄럼 없는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시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시조를 닦으면 닦을수록 내 가슴에 장미꽃이 피어오르고 내 마음은 명경처럼 맑아질 것이다. 내 마음을 닦으면 내 마음은 ‘햇살이 찰랑대는 시전詩田’이 되어 더욱 아름다운 시조를 풍성하게 추수할 것이라고 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갈구하는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방불케 하지 않는가? 단지 시조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시조사랑, 나라사랑의 진실성과 통일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리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너무 우람하고 거대해서 일상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알프스나 로키산맥 같은 그런 자연이 아니다. 일상에 들어와서 늘 함께하는 편하고 익숙한 그런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 속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꽃이건 단풍이건 강산이 다 친근하게 우리와 늘 함께한다. 그 속에 분명한 사계절이 흐르고, 맑고 밝은 햇살과 물 흐름 속에서 우리만의 독특하고 친근한 삶의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문화와 풍속은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달마상」이나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오일장」은 그대로 풍속이고 전통이며 정체성이다. 우리는 진실로 이 모든 것을 사랑하며 그것을 노래한다 「시조의 얼굴」. 이것을 해하려는 모든 세력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다해 지켜낸다. 「노량대첩」의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의 통찰과 우리 것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공감으로 감동으로 독자의 가슴에 동화된다.

4. 구도(求道)의 길

(깨달음)

과묵 하나 고치려고
곁가지를 들었더니

이 영감, 늙었나 봐”
잔소리로 핀잔받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묵언수행이 답이다
「정답 찾기」

과묵을 고쳐 살갑게 살고 싶은 노인의 순박한 시도는 그냥 한순간 꿈에 불과하다. 물론 농담과 장난이 달달한 낭만과 훈훈한 삶의 감칠맛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남정네들에게 그 결과는 반어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도 괜찮다. 사실 이러한 시도와 결과는 그것대로 그냥 진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과묵 그대로를 무언 수행으로 사는 것이 정답이란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일상에서 잊거나 무시하기 일쑤인 정도正道를 걷는 것, 영원을 향한 본질적 노력이 결국은 정답이다. 화자는 항상 과묵 속에서 사색하고 침잠沈潛한다.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소중하게 여겨 본분으로 삼는다. 화자의 깊은 속내에 저절로 공감이 간다.

벼랑에 매달린 채
자꾸만 웃고 있다

웃음의 파문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자연은
소유가 아님을
행간에서 읽으란다
「벼랑에 핀 꽃」

아무리 꽃이라지만 벼랑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웃을 여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웃는다. 바람이 불어도 웃고 비가 내려도 웃는다. 위험해도 웃고 편안해도 웃는다. 모두 웃고 함께 웃는다. 그것은 화자의 선택도 소유도 아님을 발견한다. 놀라운 통찰이요 발견이다. 그것은 소유로부터의 탈출이 진실이라는 깨달음이다

길 건너 모롱이에
구둣방 할배처럼

뭐 그리 즐거운지
온종일 흥얼흥얼

그대는
삶의 도표다,
인생 여정 안내하는
「시냇물」

시냇물과 구둣방 할배, 너무나 예측하기 어려운 관념들의 배합이다. 그러나 구둣방 할배든, 사회적 약자든 삶 자체가 그냥 즐거워 흥얼거리며 사는 거라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의 싱그러운 노래와 무엇이 다르랴? 탈속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생이란, 권위 권세 젊음 등 물질적 육체적 위세가 아니라는 깨달음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절품이다.

(본성을 찾아서)

철없이 눈이 내린
순백의 들녘에서

홍매화 버는구나,
함묵의 산통 끝에

온 누리
백색 향연에
선비 자태 고고하다
「선비의 자태」

철 늦은 눈이지만 백설은 백설이다. 바람도 아직은 쌀쌀맞다. 차가운 그러나 속으로 간직한 깊은 고요, 그 속에서 남몰래 가꾸고 키워온 뜨거운 진실이, 마침내 산통産痛을 찢으며 활짝 벌고 있다. 온 세상은 백색의 향연, 그 속에 홀로 붉은, 선비의 기품 곧 아치고절雅致高節이 눈부시다. 화자의 선비적 우아한 소망이 흰 눈 속의 홍매화로 형상화되고 있다.

일필에
날 선 난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퉁기듯 찍힌 점점
곧은 대에 매달리니

눈앞에
천년 살아갈
미인들이 반긴다
「난을 치다」

붓으로 난을 친다. 검을 휘두르듯 거침없다.
붓의, 화자의 의지가 전이된 난의 절조節操, 생동감! 그리하여 탄생하는 난화蘭花! 미인美人! 그 곧고 예리하고 날렵함의 미학, 바로 선비의 절제된 고결함의 표상이다.

정체된 시간들을 주체하기 힘들어서
심마니 산삼 찾듯 밤하늘을 탐색하니
그리던
나의 샛별은
종적마저 묘연쿠나
「구도의 길」 일부

구도의 길은 고독하다, 그리던 샛별은 종적이 묘연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분연히 외친다. 심마니가 산삼을 찾듯, 시시포스가 끝없이 돌을 굴려 올리듯, 안 보여도 찾고, 보여도 오른다. 오로지 영원한 진실을 향하여 발걸음을 쉬지 않겠단다. 구도의 길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목적지가 모호한데
함묵의 바위처럼 단심을 품에 안고
오로지
촌각을 다퉈
치열하게 달린다

쾌속의 질주 탓에 현기증이 도드라져
달팽이 걸음처럼 느린 삶이 간절하나
세월은
나를 얽어매
환승마저 불허한다

엇각에 디딘 발을 되돌릴 수 있으려나
연습처럼 느껴지는 실전의 여행이니
세월이
야속타 한들
유종의 미 거두리
「시대 여행」

목적지를 모르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세월이 인생들이 쉬지 않고 달려간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눈물겹도록 치열하게 달리고 또 달리기만 하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이고 풍자다. 그러나 풍자만이 아니다. 늦출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삶의 수레바퀴, 그것을 화자는 오롯이 실재하는 현실로, 실존하는 자들의 실전實戰으로 파악한다. 어쩌면 AI의 종으로 전락하여 살는지도 모를 고도의 초 현대문명 속의 인간성 상실, 인간 정체성 상실이 염려된다. 그만큼 예측 불가의 시대다.
그러나 화자의 의지는 분명하고 신념에 차 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고 한다. 인생에 대한 화자의 진지함, 성실성 생명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놀랍다.

어디든 떠나가자 목적이 필요하랴
가다가 피곤하면 구름처럼 쉬어가자,
찻잔에
흘린 생각을
훌훌 털고 일어나
「카페에서」 일부

인생은 어차피 실체 없는 자화상이다. 흐름 따라 살다가 미련 따위는 떨쳐버리고 떠오르는 대로 갈 길을 가겠단다.
“겹겹의 안개 속을 헤집어 나아가듯”(둘째 수 중장) 목적지가 예정된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매번 앞이 안 보이는 미래를 향하여 가상의 목표를 세우고 끝없이 수정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아니, “찻잔에 흘린 생각 곧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훌훌 털고 일어나”(셋째 수 종장), 오히려 본성을 따라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는 카페에 앉아서 깊은 사색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대답을 얻은 것이다.

가을을 쓸어내자 가슴을 비워내자
한 마리 새가 되어 자유롭게 비상하며
오로지
무념 경지에
신세계를 펼치리

창공을 쳐다보자 하늘을 마셔보자
취색의 표백제로 온 몸을 헹궈내어
순연히
상록수처럼
청운의 꿈 엮으리
「이 가을, 나는」

가을, 인생의 가을에 상념을 쓸어내고 마음을 비움으로써 탈속脫俗 또는 무념無念의 경지에 다다른 모습이다. 창공을 마시고 하늘을 마시며 온몸과 마음을 헹구어내어 보다 근원에 닿을 수 있는 순연한 청운의 꿈을 엮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이 인생의 ‘가을’을 살면서 ‘나는’ 중용中庸의 이른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곧 무념무상無念無想 속에서 본성天命之謂性을 따라 도에 이르겠다는 시인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볼 수 있다.
큰 깨달음이요, 완숙의 경지를 소요하고 있음이다.

땅에는 꽃들이 하늘에는 별꽃들이
제각기 지닌 멋을 공작처럼 뽐내지만
가슴에
품은 백합은
애오라지 그대라오

마른하늘 번개 치듯 이생의 연을 맺어
석양이 뉘엿뉘엿 저무는 강가에서
나직이
저생 쪽배를
기다리고 있다오
「어느 운명」 2, 3수 아내 사랑

인간은 누구나 건강과 평안을 진정으로 갈망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진지하고 또 안타깝다. 하물며 나이 들어 배우자의 병이 깊은 경우랴! 그의 시조 「갈증」에서도 그러한 현실을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순간에 운명이 갈릴 수도 있는 병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으랴! 병원엘 쫓아다녀 보지만, 결국 연약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속수무책임을 깨달을 뿐이다.
위의 시조 「어느 운명」은 마음 근원에 숨은 듯이 차지하고 있는 아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그리고 인간으로서 진지한 순명順命을 택하는, 안타까운 체념이 아프게 형상화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창조해주신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배우자를 창조해주셨다는 것이다. 화자에게 있어서 부부 사이는 바로 그 경지가 아니겠는가! 부부간에 할 수 있는 지성至誠을 다하는 한 인간의 참 의리, 참사랑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해종일 징검돌에
서 있는 백로처럼

생존의 기다림은
느림의 미학일터

내 시조
침묵 수행도
가시연꽃* 피우리
「기다림의 미학」

한 다리로, 외발로 정물처럼 서 있는 백로는 그런 상태로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느릿하게 침묵하며. 고도의 집중은 오히려 여유와 무심을 낳는다. 기다림, 그것은 어쩌면 불후의 대작을 소망하는 창작자의 진지한 자세요, 최선의 자세일 터이다. 인내도 집중도 넘어선 도道의 길에 서 있음이다.

5. 마무리

노재연의 시 세계의 진면목은 인간 본성을 찾아 성실한 발걸음을 새겨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물과 삶의 모든 면을 관찰하고 통찰한다. 성찰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한다. 그리하여 조그만 일에서도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진실을 또는 인간과 우주의 본성과 원리를 확인해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것이 한계가 있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은 반드시 지키고 높여야 할 것은 반드시 높인다.
노재연 시인에게 어렵거나 힘들다는 것은 결코 변명의 대상이 아니다. 열심히 추구하며 무한히 기다린다. 그리고 집중한다. 대단한 겸손이요 경건이다. 거의 경외敬畏하는 마음으로 지성至誠을 다한다.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종교보다도 진지하다.
그의 시조는 모든 생명과 그 생명의 작용을 사랑하고 높이 다룬다. 특히 작고 연약한 것 가난하고 어리석은 것의 순수한 노력을 소중히 여기고 응원한다. 연약한 것들의 어려운 여건을 인내하고 이겨내려는 의지와 열정을 사랑한다. 함께 이겨내고 함께 극복해내는 기쁨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하여 그의 시조는 특히 우리 것, 우리의 문화, 역사, 자연과 풍속에 깊이 닿아있고 또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재연 시인의 시조 사랑이다, 모든 사유와 감각은 항상 시조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매번 다양하며, 일정한 정도 이상의 깊이를 유지한다. 표현되는 언어의 효율성이나 예술성을 포함하는 언어의 조탁도 그러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과 삶의 태도 그리고 인생관에 그대로 연결되어 시조와 함께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의 삶의 진실과 태도의 언어화, 시조화는 특히 시조를 추구하는 많은 시조시인들의 전범典範이라 할 만하다.
앞으로 오래오래 강건하시어 좋은 시조 창작은 물론 많은 시조시인들과 함께하며 시조와 우리네 삶의 질을 높이는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뇌리에서 맴도는데
한사코 발화되지 않는 그것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면
안개 속으로 더 멀리 달아나는 그것

뒤통수만 보여주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그것

나는 그것을 포획하려고
어제도 오늘도 찾아 헤매고 있다.

눈앞에
실체 없는 허상이 난무하지만
언젠가는 순간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실상을 감지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생을 다할 때까지 뚜벅뚜벅 삼 장 육 구 시조의 숲을 걸어가련다.

2024년 3월
인계동 우거에서

■ 시인의 말: 욕망이 지배하는 시작 활동

1부 신념의 소리
시조의 샘
시인의 눈
기다림의 미학
빗속을 거닐고 싶다
담쟁이의 신념
봄의 행진 2
임은 아직
민초의 희망
질경이
겨우살이
흑백 논리
대은공 시비 앞에서
억새의 무언극
갈대의 신념
겨울 내장산, 사숙私淑하다
파도가 부서지는 밤바다
제주 동백꽃의 슬픈 이야기
시대 여행
구도求道의 길
명량대첩 현장에서

제2부 침묵의 소리
어느 참회
낙엽의 신세
사회악
어느 숙명
벼랑에 핀 꽃
난을 치다
무심
정답 찾기
시냇물
도심 공원
어린이 놀이시설
너럭바위
몽돌
저기압
허물어진 고옥
김명국의 ‘달마상’*을 읽다
기억의 흔적
호수의 여명
코로나19, 그 후
핼러윈 데이 이태원 참사

제3부 소망의 소리
소확행
서재
엄마 아리랑
고목에 움트는 사랑
시심의 분출
설연화, 그 집념
목백일홍
밤이 되면
벽을 넘어
꽃들의 노래
이 가을, 나는
카페에서
어느 기다림
명태의 변신
시조의 얼굴
등대
추암 촛대바위
해질녘 해변에서
밤바다에서
풍랑 만난 조각배

제4부 삶의 소리
사과
파도의 사랑놀이
판자촌의 비애
민초들의 생존경쟁
나팔꽃 지듯
암울
바람의 서시
바람의 기행奇行
바람의 가면
강물은
단풍 유추
면회
포장마차 애환
오일장
인력시장
잡초의 생명 의지
영생을 꿈꾸는 장작불
냉장고 사망진단
어느 운명
민들레 씨앗의 역정歷程

제5부 계절의 소리
봄의 생명, 날 엿보다
녹엽을 기다리며
봄의 유혹
봄의 연서
복사꽃 추억
선비의 자태
풍란
봄바람
삼월 계곡수
향리 소식
가을의 유혹
운림산방
봄을 사다
봄비가 내린다
유채 바다
한여름의 정경
여름 하일 점묘
꽃무릇
강섶에서 엿듣다
가을이 오는 소리

■ 평설: 인간과 삶의 근원을 찾는 쉼 없는 발걸음__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