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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옥의 시집 『창문 수업』. 이 시집은 전명옥의 시 작품을 엮은 책이다. 크게 3부로 나뉘어 있으며 책에 담긴 주옥같은 시편을 통해 독자를 시인의 시 세계로 안내한다.

시는
혼자 걷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분간 없이 너무 멀리 왔다

푸르던 사유들엔 늦가을 들판과
철없는 새싹들이 갈마들었고
다 헤진 신발과
새로 장만한 신발마다
또 걸어야 한다는 재촉이
꽃을 피운다

한알의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의 송이를 세는 마음으로
이 뒤늦은 한 권의 묶음에
설레는 첫 제목을 붙인다

2018년 1월 전명옥

최문자(시인, 배재대 석좌교수)
시를 쓰는 마음은 다른 마음이다. 전명옥시인은 감정처럼 울먹이다 보여주는 창문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 창문은 어떤 정신의 영토에 닿아있다. 시인은 이 창문을 열고 사물을 만난다. 뿌리가 아궁이 밑까지 쳐들어오던 집 (아카시아 가계)을 만나고, 빨간 사과 속의 비밀스런 겨울 날씨(사과 속 겨울)를 읽고, 깨진 접시에서 날아오르는 새를 보며, 두 개의 수박에서 여자의 울음통(조충도)을 본다.
전명옥시인의 사물은 ‘사물’에 대한 매우 특별한 규정 형식이 아니라도 만나는 방식이 얼마든지 있다. 즉 사물이 기술적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많은 것을 감춘다. 주장도 호소도 아니면서 꽃은 꽃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꽃인데 전환 보다 더 아름답다. 이것은 놀라운 긍정의 방식이다.
이 시인의 북쪽엔 시인의 말대로 아직도 숨차게 오를 오르막길이 있다. 아마도 전명옥시인의 ‘창문 수업’은 앞으로 좋은 시쓰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전명옥은 감각계를 건드리되 거기에서 놀지 않는다. 전명옥은 언어의 파사드(facade)와 직면하되 거기에 싸움판을 만들지 않는다. 전명옥은 감각계를 넘어, 언어의 파사드를 넘어 (플라톤적 의미의) 이데아(Idea)를 찾는다. 그는 감각계에 “도끼와 칼날”을 대고 감각계의 껍데기인 “가지들과 꽃송이들을 삭발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이데아를 발견하는 자이다. 전명옥은 늘 사물들의 꺼풀을 들쳐 낸다. 그는 사물의 외피에 매혹당하지 않으며 그것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경유하여 그 안의 서사를 읽어낸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그와 함께 감각계에서 본질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명옥의 언어는 사물/본질 사이의 긴장된 탐측(探測)의 언어이다. 그것은 때로 사물에서 본질로 훌쩍 뛰어넘어가고, 어떤 경우엔 사물의 외피를 질질 끌고 본질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집요하고도 다양한 탐구가 절정을 이루는 것은 사물과 본질, 감각과 이데아가 팽팽한 긴장 속에서 맞장 뜨거나 구분 불가능하게 뒤섞여 있을 때이다.

1부 : 사과 속 거울

풍경風磬 14
사과 속 겨울 16
아카시아 가계18
장독 염전 20
흔적을 고르다 22
조충도條蟲圖 24
북부순환도로 26
몰입 28
접시를 깨뜨리는 가게 30
우수와 경칩 사이 32
달항아리 34
창문 수업 36
삼백 예순 다섯 계단 38
꽃물 들이는 날 39
고등어 40
딸의 중력 42
지금은 세대 교체중입니다 44
바다 식탁 46
콩나물, 부르카 48
직지사, 진눈깨비 50
복어를 장만하는 날 51
그 대숲의 기억 52

2부 : 골지도骨脂圖를 보며

불, 들어갑니다 56
신부 58
골지도骨脂圖를 보며 60
목불 62
풍금 속에 내리는 눈 64
용문사 은행나무 부처 66
먼지의 무게 68
거북이 70
해일 72
월계수를 생각하는 시간 74
석청 76
허공의 지도-1 77
허공의 지도-2 78
허공의 지도-3 80
그 사진 한 장 82
순장당한 사람-1 84
수레바퀴 86
금혼식 88
일벌 90
모델 92

3부 : 수수꽃다리 노래

규화목 97
수수꽃다리 노래 98
라스코리니코프의 종소리 100
천문시계 102
탯줄 104
양계 학교 106
태풍을 기다리며 108
일회용 엄마 110
기계 엄마 112
애견나라 114
오렌지 나라 116
집세 증후군 118
벌레 이야기 120
바나나의 본성 122
뇌 산책 124
따뜻한 습지 126
고양이 암각화 128
마츠무라라는 사람 130
릭샤 132
횟배앓이 134
가벼운 집 136
스크린 137

5) ［해설］

너머의 상상력, 좋음의 이데아를 찾아서
-전명옥시집 『창문수업』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

6) 프롤로그

풍경風磬

처마 끝에 내걸린
바람의 추를 본다

바람은 어쩌려 이 먼 곳까지 와서 적요를 깨는 것인가
발디딜 틈도 없는 공중에서 춤을 추는 것인가 천지를
행간으로 두고 타종과 타전을 번갈아 소리내는 것인가

처마에 풍경을 매단 까닭은
공중의 음향을 들으려 했음인데
착점 없이 부르르 떨기만 하는
저울의 바늘 끝처럼
설레는 것인지 난분분인지 모를
가녀린 추
저 맑은 소리엔 맨발, 맨몸이어야 한다
녹슨 바람을 벗겨가는 떨림
옷장을 뒤져 아직 바람이 들어 있는
허공 한 벌을 입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