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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곰, 도전과 승리의 기록 : 대한민국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개발 이야기[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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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한민국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개발, 도전과 집념으로 이루어낸 기적의 이야기

우리나라는 1978년에 국산 미사일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에서 일곱 번째 미사일 개발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이 위대한 첫 국산 미사일의 별칭이 바로 ‘백곰’이다. 이 책 [백곰, 도전과 승리의 기록]은 우리나라 미사일 국산화의 첫 발자취인 ‘백곰’ 미사일의 개발사와 국방과학연구소(ADD,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 발전의 발자취를 당시 개발사업에 직접 참여한 연구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1970년대의 10년은 정부와 국민, 군과 산업체,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자주국방’의 뜨거운 열기 속에 몸과 마음을 불사르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군대와 과학 기술력 및 산업 능력을 한꺼번에 갖추겠다는 거대하고 야심에 찬 도전이었다. ‘백곰’은 단순히 성공한 개발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1970년대 자주국방을 향한 국가적 열망과 의지의 결정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 태동 단계에 있던 국방과학과 산업기술력의 한계를 초월해서 도전과 집념으로 이루어낸 ‘기적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나라는 1978년에 국산 미사일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에서 일곱 번째 미사일 개발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이 위대한 첫 국산 미사일의 별칭이 바로 ‘백곰’이다. 『백곰, 도전과 승리의 기록』은 우리나라 미사일 국산화의 첫 발자취인 ‘백곰’ 미사일의 개발사와 국방과학연구소 발전의 발자취를 당시 개발사업에 직접 참여한 연구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출판사 서평

현대 국가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첨단 무기, 미사일
세계 문명의 발전과 역사를 통해 인류가 배운 귀중한 교훈 하나가 있다. 평화는 말이 아니라 ‘힘’으로 지켜진다는 진리가 그것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 주장은 헛되다는 것을 세계사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나라 없는 설움과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던 이유 또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국력이 모자랐기 때문임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결국 국가의 번영과 평화를 보장하는 국력의 핵심은 한마디로 경제력과 군사력이라고 할 수 있고, 현대 국가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첨단 무기가 바로 미사일이다.

현대전에서는 대량 살상보다는 킬 체인(Kill Chain, 적의 미사일을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공격형 방위시스템) 시스템과 같이 전략적·전술적 목표에 대한 정밀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의 비중이 매우 크고, 미사일 기술이야말로 타 산업으로의 파급 효과가 가장 큰 항공우주 기술의 기본 기술이다. 때문에 오늘날 미사일을 위시한 항공우주 개발 능력은 그 나라의 군사력은 물론 국가 과학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특히 최근 북한의 장거리 탄도탄 및 SLBM과 핵 위협 등의 안보 환경 변화는 우리 미사일 능력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케 하고 있다.

2015년 7월 정부는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 70대 우수 발명품을 선정하였다. 여기에 국방과학연구소(ADD)의 백곰과 기본훈련기인 웅비(KT-1)가 선정되었다. 1990년대에 개발된 KT-1은 1970년대의 백곰 개발을 통해 축적된 항공우주 기술 발전의 산물로, 백곰은 우리나라 항공우주 발전의 효시이며, 2010년대의 나로호와 다목적 실용위성 등도 백곰 개발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기반 기술의 시너지 효과가 낳은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의 우리나라가 이룩한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장거리 미사일인 백곰의 개발 과정은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책 결정자들의 시기적절한 정책 추진과 수많은 연구원의 피나는 노력, 그리고 크고 작은 ‘기적’의 연속이 이룬 성과였다.

1970년대의 기적, 백곰
과학기술이란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재’, 과거의 경험이 축적되어 보고서화된 ‘기술자료’,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장비와 시설’이 모두 결합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의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계획 자체가 도전하기 벅찬 과제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국 등의 유명 대학에서 공부한 한국인 박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미사일 전문가는 전무했다. 미사일의 원리에 대해 아는 사람도,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핵심기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도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 금속기계 산업의 수준은 정밀가공 능력이 부족했다. 그릇과 동전을 주조하거나 자동차와 경운기를 조립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화학 분야도 산업용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는 기초적인 생산 기술밖에 없었다.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인 전자공업도 당시에는 트랜지스터라디오 제작의 시작 단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원들은 미사일 제작에 필요한 수천 가지의 부품을 직접 개발하고 시험하며, 때로는 제작 및 조립도 직접 수행해야 했다. 게다가 이들이 개발해야 하는 미사일 부품들의 생산 기술과 설비도 대부분 새로이 개발하거나 수입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공장을 짓고 설비를 들여오고 물건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의 손에 의존해야 했다. 첨단 컴퓨터로 이론치를 계산하고 실험실에서 실험만 하던 공학박사들이 계산과 실험은 물론 기계가공, 납땜, 시험시설 건설까지 직접 수행하면서 개발해낸 최초의 국산 미사일이 바로 ‘백곰’인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많은 경험과 고도의 기술을 보유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미사일 개발에는 보통 10년 정도가 소요된다. 반면에 백곰은 계획 수립 시점부터 6년(본격적인 개발 착수 시점부터는 4년) 만에 개발을 완료하였다. 인력, 기술자료, 공장, 설비, 자금 등 모든 것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인력 확보

대한민국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개발,
도전과 집념으로 이루어낸 기적의 이야기


우리나라는 1978년에 국산 미사일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에서 일곱 번째 미사일 개발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이 위대한 첫 국산 미사일의 별칭이 바로 ‘백곰’이다. 이 책 《백곰, 도전과 승리의 기록》은 우리나라 미사일 국산화의 첫 발자취인 ‘백곰’ 미사일의 개발사와 국방과학연구소(ADD,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 발전의 발자취를 당시 개발사업에 직접 참여한 연구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1970년대의 10년은 정부와 국민, 군과 산업체,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자주국방’의 뜨거운 열기 속에 몸과 마음을 불사르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군대와 과학 기술력 및 산업 능력을 한꺼번에 갖추겠다는 거대하고 야심에 찬 도전이었다. ‘백곰’은 단순히 성공한 개발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1970년대 자주국방을 향한 국가적 열망과 의지의 결정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 태동 단계에 있던 국방과학과 산업기술력의 한계를 초월해서 도전과 집념으로 이루어낸 ‘기적의 이야기’를 담았다.

현대 국가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첨단 무기, 미사일
세계 문명의 발전과 역사를 통해 인류가 배운 귀중한 교훈 하나가 있다. 평화는 말이 아니라 ‘힘’으로 지켜진다는 진리가 그것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 주장은 헛되다는 것을 세계사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나라 없는 설움과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던 이유 또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국력이 모자랐기 때문임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결국 국가의 번영과 평화를 보장하는 국력의 핵심은 한마디로 경제력과 군사력이라고 할 수 있고, 현대 국가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첨단 무기가 바로 미사일이다.
현대전에서는 대량 살상보다는 킬 체인(Kill Chain, 적의 미사일을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공격형 방위시스템) 시스템과 같이 전략적·전술적 목표에 대한 정밀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의 비중이 매우 크고, 미사일 기술이야말로 타 산업으로의 파급 효과가 가장 큰 항공우주 기술의 기본 기술이다. 때문에 오늘날 미사일을 위시한 항공우주 개발 능력은 그 나라의 군사력은 물론 국가 과학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특히 최근 북한의 장거리 탄도탄 및 SLBM과 핵 위협 등의 안보 환경 변화는 우리 미사일 능력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케 하고 있다. 2015년 7월 정부는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 70대 우수 발명품을 선정하였다. 여기에 국방과학연구소(ADD)의 백곰과 기본훈련기인 웅비(KT-1)가 선정되었다. 1990년대에 개발된 KT-1은 1970년대의 백곰 개발을 통해 축적된 항공우주 기술 발전의 산물로, 백곰은 우리나라 항공우주 발전의 효시이며, 2010년대의 나로호와 다목적 실용위성 등도 백곰 개발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기반 기술의 시너지 효과가 낳은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의 우리나라가 이룩한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장거리 미사일인 백곰의 개발 과정은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책 결정자들의 시기적절한 정책 추진과 수많은 연구원의 피나는 노력, 그리고 크고 작은 ‘기적’의 연속이 이룬 성과였다.

1970년대의 기적, 백곰
과학기술이란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재’, 과거의 경험이 축적되어 보고서화된 ‘기술자료’,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장비와 시설’이 모두 결합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의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계획 자체가 도전하기 벅찬 과제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국 등의 유명 대학에서 공부한 한국인 박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미사일 전문가는 전무했다. 미사일의 원리에 대해 아는 사람도, 미사일 , 장거리 미사일의 체계 개념 설계에서부터 분야별 세부 설계·해석 기술 확보와 연구·개발·제작·시험을 위한 장비와 시설 확보 등을 추진하면서 처음 미사일 개발 계획이 승인된 후에 모인 우수 연구원들이 말 그대로 ‘배우면서 개발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우리가 백곰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처럼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기술 자료가 전무하고 생산에 필요한 제반 산업 여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4년 만에 무에서 유를 이루고 생산까지 해냈기 때문이다.

백곰에서 시작해 항공우주 개발까지
백곰 개발의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미사일 개발국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 6개국밖에 없었다. 이러한 최첨단 과학무기의 개발 성공은 정치, 국방, 산업, 과학계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불가능을 가능케 한 백곰의 개발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게 되었다.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과 ‘하면 된다’는 불굴의 투지가 이들을 무리한 도전에 나서도록 했고 마침내 성공을 이끌어냈다. 이후 현무를 비롯한 최첨단 무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들 과학자의 경험에 의거한 용기와 자신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백곰 개발의 역사는 단순한 무기 개발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첨단산업 기술의 개발사이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각종 신기술이 국내에 도입되고 산업현장에 이식되었다. 예를 들면 시스템 엔지니어링 분야는 그 이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분야였다. 백곰을 개발을 위해 복잡하고 다양한 기술들을 하나로 통합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 알게 되었다. 비철금속의 정밀가공 기술, 자동제어 관련 기술, 항공우주 관련 기술 등도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첨단산업 분야를 일거에 선진국 수준 가깝게 올려놓은 것이 바로 백곰 개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백곰 개발 과정에서 획득된 지식과 기술, 장비와 시설, 양성된 인력 등은 이후에 이루어진 각종 첨단 미사일 개발과 항공우주 개발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무를 비롯하여 지금 우리의 육·해·공군이 운용 중인 첨단 미사일의 대부분이 국산화되고 미사일 전력의 자립이 가능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백곰 개발이라는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백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현무나 해성과 같은 첨단무기의 개발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의지와 열정의 산물, 백곰
우리나라의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정밀기계산업과 첨단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백곰 개발의 기적을 말하기 위해선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였다. 자주국방에 대한 박 대통령의 열망이 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낳았고, 이것이 백곰의 성공을 견인했다.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여 미사일을 개발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와 실질적인 지원이 뒤따랐다. 연구원들은 당시로써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일반인들은 수행하기 어려운 해외출장이나 연수를 통해 연구개발 역량을 한껏 높일 수 있었다. 개발팀에 대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백곰은 결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하나는 연구원들의 열정이었다. 백곰 연구원들의 개발 실무 과정은 결코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시험장 부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적한 바닷가를 헤매다 간첩으로 오인되어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고, 무더운 공장에서 정밀가공 기술을 공장 노동자들에게 밤을 새우며 가르치기도 하였다. 폭발사고 등으로 다치기도 하고, 격무와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도 하고, 밤낮없이 가동되는 기계소리에 마을 주민들이 오물을 투척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연구원들은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고 밤낮을 잊은 채 연구와 개발에 매진했다. 이들의 열정과 땀,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백곰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미사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오명을 쓴 백곰
미사일 개발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백곰 발사 성공 이듬해인 1979년에 갑자기 서거하고, 새로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미사일 개발 정책을 크게 변경하였다. 5공 정권은 미사일 개발 정책을 폐기했다가 재개하는 등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백곰 개발을 ADD 연구원들의 사기극으로까지 매도하였다. 백곰은 미국산 낡은 미사일에 페인트칠만 한 가짜라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실전에 배치되고 우리의 미사일 개발에 반대한 미국조차도 인정한 국산 미사일을 국산이 아니라고 우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반대하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정권 유지 차원에서 미국과 타협하기 위해 중단시키고 개발 인력들을 대량 해고하였다.

그러나 1983년 10월 9일의 아웅산 사태로 장거리 타격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합참의 건의로 백곰의 개량형인 백곰-2(NHK-2)가 현무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재개하였다. 5공 정부의 백곰 개발 폄하와 미사일 개발 정책 폐기, 연구원들의 강제 퇴직 등이 진행되면서 백곰의 역사적 의미는 많이 퇴색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백곰 개발에 쏟은 연구원들의 열정과 노력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늘날 일반인들이 나로호에 열광하고 군사 마니아들이 현무에는 환호하면서도 백곰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잘 모르게 된 사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저자가 말하는 백곰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 책의 공동 저자 세 사람은 백곰 개발 초기부터 실무에 참여한 연구원이다. 또한 백곰 이후의 다양한 항공우주 기술 개발에도 두루 참여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직접 연구개발에 참여한 무기개발 사업에 대해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책을 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우선 ADD 창설 45주년을 맞아 1970년대의 번개 사업과 백곰 미사일 개발 과정을 재조명하고, 선배들의 애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다. 당시 연구원들이 겪고 보고 들은 이 이야기들은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10대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유치한 것일 수도 있다. 더러는 편법으로 추진된 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년밖에 안 된 세계 최빈국 중의 한 나라에서 지도자와 연구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사일 개발을 성공시켜 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운 과업이었는지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간의 비사(秘史)와 기술 축적 과정을 40여 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관련 연구원들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두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여전히 백곰과 관련된 기술적 세부 내용은 비밀로 분류되어 접근이 어렵지만, 정확한 기록과 관련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저자들은 당시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 동료, 후배 연구원들을 두루 접촉하고, 장시간의 인터뷰와 자료 수집 과정을 거쳤다. 미사일 개발을 담당했던 1,000여 명의 ADD 대전기계창 연구원과 관련 방위산업체 임직원 등 수백 명이 피땀으로 이룬 백곰의 개발사는 충분히 기록될 가치가 있고 알려질 의미도 있다.

* 원고작성에 도움을 주신 분들
-기획 · 계획 · 체계 분야 : 이경서, 구상회, 강인구, 홍재학, 최호현, 목영일, 김연덕, 김정덕, 이재홍, 조영길
-유도조종 분야 : 최호현, 김정덕, 박찬빈, 조항주, 오문수, 조규필, 김연철, 곽병철, 송택열
-조립점검 · 발사대 · 발사 통제 분야 : 김정덕, 이열화, 조원만, 강수석, 배연숙, 김연철
-기체 · 공력 · 풍동 분야 : 홍재학, 전제춘, 이용태, 박종무, 이주진, 강극수, 이열화, 박복선, 안창수, 최상근
-추진기관 분야 : 목영일, 김연덕, 김유, 홍성완, 유광호, 이태호, 홍명표, 원용구, 조원만, 김윤곤, 양지원
-탄두 · 신관 분야 : 김도영, 한만준, 김정국, 강근희
-시험평가 분야 : 구상회, 오문수, 이기완, 장필식
-대전차 미사일 · 중거리 로켓 · 다연장 분야 : 문근주, 박준복, 임우택
-홍능1호 · 솔
개발에 필요한 핵심기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도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 금속기계 산업의 수준은 정밀가공 능력이 부족했다. 그릇과 동전을 주조하거나 자동차와 경운기를 조립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화학 분야도 산업용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는 기초적인 생산 기술밖에 없었다.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인 전자공업도 당시에는 트랜지스터라디오 제작의 시작 단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원들은 미사일 제작에 필요한 수천 가지의 부품을 직접 개발하고 시험하며, 때로는 제작 및 조립도 직접 수행해야 했다. 게다가 이들이 개발해야 하는 미사일 부품들의 생산 기술과 설비도 대부분 새로이 개발하거나 수입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공장을 짓고 설비를 들여오고 물건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의 손에 의존해야 했다. 첨단 컴퓨터로 이론치를 계산하고 실험실에서 실험만 하던 공학박사들이 계산과 실험은 물론 기계가공, 납땜, 시험시설 건설까지 직접 수행하면서 개발해낸 최초의 국산 미사일이 바로 ‘백곰’인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많은 경험과 고도의 기술을 보유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미사일 개발에는 보통 10년 정도가 소요된다. 반면에 백곰은 계획 수립 시점부터 6년(본격적인 개발 착수 시점부터는 4년) 만에 개발을 완료하였다. 인력, 기술자료, 공장, 설비, 자금 등 모든 것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인력 확보, 장거리 미사일의 체계 개념 설계에서부터 분야별 세부 설계·해석 기술 확보와 연구·개발·제작·시험을 위한 장비와 시설 확보 등을 추진하면서 처음 미사일 개발 계획이 승인된 후에 모인 우수 연구원들이 말 그대로 ‘배우면서 개발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우리가 백곰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처럼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기술 자료가 전무하고 생산에 필요한 제반 산업 여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4년 만에 무에서 유를 이루고 생산까지 해냈기 때문이다.

백곰에서 시작해 항공우주 개발까지
백곰 개발의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미사일 개발국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 6개국밖에 없었다. 이러한 최첨단 과학무기의 개발 성공은 정치, 국방, 산업, 과학계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불가능을 가능케 한 백곰의 개발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게 되었다.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과 ‘하면 된다’는 불굴의 투지가 이들을 무리한 도전에 나서도록 했고 마침내 성공을 이끌어냈다. 이후 현무를 비롯한 최첨단 무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들 과학자의 경험에 의거한 용기와 자신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백곰 개발의 역사는 단순한 무기 개발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첨단산업 기술의 개발사이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각종 신기술이 국내에 도입되고 산업현장에 이식되었다. 예를 들면 시스템 엔지니어링 분야는 그 이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분야였다. 백곰을 개발을 위해 복잡하고 다양한 기술들을 하나로 통합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 알게 되었다. 비철금속의 정밀가공 기술, 자동제어 관련 기술, 항공우주 관련 기술 등도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첨단산업 분야를 일거에 선진국 수준 가깝게 올려놓은 것이 바로 백곰 개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백곰 개발 과정에서 획득된 지식과 기술, 장비와 시설, 양성된 인력 등은 이후에 이루어진 각종 첨단 미사일 개발과 항공우주 개발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무를 비롯하여 지금 우리의 육·해·공군이 운용 중인 첨단 미사일의 대부분이 국산화되고 미사일 전력의 자립이 가능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백곰 개발이라는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개 · 해룡 분야 : 유광호, 강위훈, 최상근, 현천호, 이규종, 이기승, 임창빈
-기타 : 홍재학, 홍승완, 백운형, 김명수, 윤상로, 양태석
-사진 자료 : 국방과학연구소 기술정보실, 국방과학연구소 8본부, 신인호

* 감수
이경서(단암시스템즈 회장)
홍재학(전 항공우주연구원 원장)
구상회(전 세종연구원 연구위원)
0년대의 백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현무나 해성과 같은 첨단무기의 개발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의지와 열정의 산물, 백곰
우리나라의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정밀기계산업과 첨단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백곰 개발의 기적을 말하기 위해선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였다. 자주국방에 대한 박 대통령의 열망이 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낳았고, 이것이 백곰의 성공을 견인했다.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여 미사일을 개발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와 실질적인 지원이 뒤따랐다. 연구원들은 당시로써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일반인들은 수행하기 어려운 해외출장이나 연수를 통해 연구개발 역량을 한껏 높일 수 있었다. 개발팀에 대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백곰은 결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하나는 연구원들의 열정이었다. 백곰 연구원들의 개발 실무 과정은 결코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시험장 부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적한 바닷가를 헤매다 간첩으로 오인되어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고, 무더운 공장에서 정밀가공 기술을 공장 노동자들에게 밤을 새우며 가르치기도 하였다. 폭발사고 등으로 다치기도 하고, 격무와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도 하고, 밤낮없이 가동되는 기계소리에 마을 주민들이 오물을 투척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연구원들은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고 밤낮을 잊은 채 연구와 개발에 매진했다. 이들의 열정과 땀,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백곰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미사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오명을 쓴 백곰

미사일 개발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백곰 발사 성공 이듬해인 1979년에 갑자기 서거하고, 새로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미사일 개발 정책을 크게 변경하였다. 5공 정권은 미사일 개발 정책을 폐기했다가 재개하는 등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백곰 개발을 ADD 연구원들의 사기극으로까지 매도하였다. 백곰은 미국산 낡은 미사일에 페인트칠만 한 가짜라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실전에 배치되고 우리의 미사일 개발에 반대한 미국조차도 인정한 국산 미사일을 국산이 아니라고 우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반대하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정권 유지 차원에서 미국과 타협하기 위해 중단시키고 개발 인력들을 대량 해고하였다.
그러나 1983년 10월 9일의 아웅산 사태로 장거리 타격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합참의 건의로 백곰의 개량형인 백곰-2(NHK-2)가 현무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재개하였다. 5공 정부의 백곰 개발 폄하와 미사일 개발 정책 폐기, 연구원들의 강제 퇴직 등이 진행되면서 백곰의 역사적 의미는 많이 퇴색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백곰 개발에 쏟은 연구원들의 열정과 노력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늘날 일반인들이 나로호에 열광하고 군사 마니아들이 현무에는 환호하면서도 백곰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잘 모르게 된 사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저자가 말하는 백곰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 책의 공동 저자 세 사람은 백곰 개발 초기부터 실무에 참여한 연구원이다. 또한 백곰 이후의 다양한 항공우주 기술 개발에도 두루 참여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직접 연구개발에 참여한 무기개발 사업에 대해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책을 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우선 ADD 창설 45주년을 맞아 1970년대의 번개 사업과 백곰 미사일 개발 과정을 재조명하고, 선배들의 애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다. 당시 연구원들이 겪고 보고 들은 이 이야기들은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10대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유치한 것일 수도 있다. 더러는 편법으로 추진된 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년밖에 안 된 세계 최빈국
중의 한 나라에서 지도자와 연구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사일 개발을 성공시켜 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운 과업이었는지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간의 비사(秘史)와 기술 축적 과정을 40여 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관련 연구원들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두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여전히 백곰과 관련된 기술적 세부 내용은 비밀로 분류되어 접근이 어렵지만, 정확한 기록과 관련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저자들은 당시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 동료, 후배 연구원들을 두루 접촉하고, 장시간의 인터뷰와 자료 수집 과정을 거쳤다. 미사일 개발을 담당했던 1,000여 명의 ADD 대전기계창 연구원과 관련 방위산업체 임직원 등 수백 명이 피땀으로 이룬 백곰의 개발사는 충분히 기록될 가치가 있고 알려질 의미도 있다.

* 책속으로 추가 *

박정희 대통령의 미사일 개발 지시가 떨어지고, 항공공업개발계획단이 꾸려져 동부이촌동 안가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던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사일과 관련된 기술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중략) 참고할 만한 미사일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우선 어떤 미사일을 모델로 개발계획을 세울 것인지를 두고 토론했고, 그 결과 당시 미군이 우리 공군에 넘겨준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이 최우선으로 논의되었다. … (중략) … 그러나 나이키 허큘리스를 활용하고 개량하여 새로운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계획 역시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 외형은 나이키 허큘리스를 모방하기로 하였으나 이 역시 정확한 설계도가 있어야만 모방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운용 교범 등을 통해 설계도를 모아놓고 보니 빠진 부분들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연구원들은 실물 나이키 허큘리스를 분해하여 역설계로 도면을 그리고, 이렇게 그려진 도면과 미군에서 흘러나온 도면들을 합쳐 미사일의 외형 설계에 필요한 도면들을 만들어냈다. _ 본문 120~123쪽

박정희 대통령은 이경서 박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사일 개발에 관한 한 이경서 박사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의미였다. 실제로도 이경서 박사는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권을 쥐고 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런 권한이 있었기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LPC사와의 추진제 제조설비 이전에 관한 계약 체결이었다. 이 당시 계약 체결 금액이 200만 달러로, 이경서 박사는 LPC사의 부사장과 즉석에서 단독으로 계약 체결에 합의했다. 당시 금액으로 200만 달러는 매우 큰 금액이어서 ADD 소장의 결재는 물론 청와대에도 보고해야 하는 것이 통례였다. 게다가 100만 달러 이상의 해외 구매 계약은 한국은행 총재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과 일반적인 결재 순서를 모두 거칠 경우 계약은 성사되기 어려웠다. 이에 이경서 박사는 자신에게 위임된 권한으로 과감히 계약하였고,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는 천재일우의 행운이 되었다.
이렇게 미사일 개발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자 미사일 개발의 역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일 시스템의 설계기술, 추진기관 제작 및 추진제 제조기술과 설비, 그리고 풍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_ 본문 201쪽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미사일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미 정보당국의 눈을 피해가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한다지만 미국과 프랑스 등 외국에서 시설과 기술 등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눈과 귀를 완전히 따돌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였다. 동서 화해 분위기를 조성 중이던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이러한 첨단 무기 개발을 용인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우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압박도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국산 미사일 개발계획 자체가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을 우리나라 대통령도 알고 개발팀도 분명히 알았다. 따라서 국산 미사일 개발계
획을 은밀하게 진행하되, 불가피한 경우 미국에 내놓을 명분도 준비해야 했다. 이것이 나이키 허큘리스를 모델로 삼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당시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낡은 모델이었지만, 우리나라와 다른 우방들은 미군이 공여한 이 미사일을 운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그 운용과 유지 및 보수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을 확보하고, 그 부품들을 적절히 교체할 수 있도록 일부 부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_ 본문 210쪽

4회에 걸친 비행시험이 끝난 후 7월 22일 5차 비행시험이 진행되었다. 5차 비행시험은 국산 유도조종장치는 물론 우리가 백곰용으로 재설계 개발한 기체와 추진기관을 사용하는 명실공히 국산 1호기의 종합 비행시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홍재학 박사의 기체부와 목영일 박사의 추진기관부는 개발 기간 중 지상에서 수많은 시험을 수행하여 개발 리스크를 줄였다고 자신하였고, 최호현 박사의 유도조종부는 이미 비행시험에 성공하였으므로 이경서 창장과 연구원들은 조마조마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이 5차 비행시험에서도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긴장된 발사 초읽기가 끝나고 미사일이 발사대를 이륙한 직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중략) 6차 비행시험은 대성공이었다. 5차 비행시험의 실패로 조마조마하는 연구원들의 정성이 통하였는지 160여km 떨어진 목표지점까지 예정된 비행 궤적을 따라 정확히 비행한 것이었다.… (중략) … 9월 26일에 대통령을 모시고 최종 공개 발사 행사를 치를 계획을 세우고, 9월 6일에 첫 번째 예행연습으로 7차 비행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발사된 로켓은 1단 분리 후 2단이 점화되지 않고 10km를 날아가다 토도 앞바다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다시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_ 본문 268~271쪽

발사 초읽기와 함께 백곰은 시뻘건 불기둥을 내뿜으며 솟아올랐다. 저 멀리 날아가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시험통제원의 “비행시간 1분 경과”, “2분 경과” 하는 멘트와 “삐 삐 삐 …” 하는 비행 진행을 알리는 초시계 소리는 1초 1초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탄착!”이라는 멘트가 떨어지자 관람대는 물론이고 모든 연구원은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_ 본문 282쪽

백곰 미사일 기술은 지난 2010년 12월 한국공학한림원과 지식경제부 주관 1950년부터 60년간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술 60선에 채택되어 연구자 대표이자 사업책임자로 참여했던 이경서 박사가 우수기술상을 수상하였다. 또 2015년 7월 광복 70주년을 맞아 미래창조과학부가 선정한 70대 우수 기술 성과로 선정되어 수많은 참여 연구원의 노고가 30~40년이 지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_ 본문 287쪽

백곰의 개발 성공은 주변 강대국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개발이 끝난 후 1979년 대통령은 ADD의 연구원들에게 많은 훈·포장을 내려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 (중략) … 선진국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미사일을 직접 만들어냈다는 사실만큼 이들에게 기쁨과 위안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기쁨에 취할 시간도 잠시, 1979년 ADD에는 국방부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하달되었다. 즉시 양산하여 부대 배치를 하도록 하되 1차로 1980년 말까지 1개 시험포대를 설치하여 운용할 수 있도록 백곰의 양산을 위한 실용개발을 끝내라는 지시였다. _ 본문 308쪽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이후 ADD에도 검은 먹구름과 함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중략) … 보안사는 ‘백곰이 나이키 허큘리스에 페인트만 칠한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대대적인 조사를 하고, 그 답에 끼워 맞추는 노력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중략) …
연구소의 정원도 2,598명에서 1,759명으로 감축되고, 홍재학 박사·최호현 박사 등 미사일 개발 관련 중견 간부들을 비롯한 연구소원 839명이 대거 강제 퇴직하게 되었다. 미사일 개발 종사자가 대부분이고, 진해기계창과 서울기계창에서도 행정 사무직 등을 중심으로 약간 감축하였다. 직종별로는 연구·기술직이 262명, 관리직이 43명, 기계 가공공장·추진제공장·기체조립 및 미사일 총조립 점검·레이더운용 등을 담당했던 기능직 273명, 연구소 전체에서 대거 감축 대상자인 행정사무직 281명이었다. … (중략) … 숙청에 가까운 대량 해고로 불모지에서 건설하고 키워온 첨단 기술 개발은 중단되고, 최고급 장비와 시설은 운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백곰-2(NHK-2)가 현무 사업으로 재추진되면서 일부는 재입소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이의 강제 퇴직은 조직 발전 과정의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기고 이후로도 상당 기간 ADD에 악영향을 미쳤다. … (중략) … 부당한 강제 감축은 2000년대 들어 대규모 민원과 소송으로 이어졌고, 결국 정부가 패소하여 35년 뒤에 늦게나마 보상도 이루어졌다. _ 본문 347~353쪽

목차

프롤로그 백곰, 그 위대한 도전과 승리의 기록
추천사
백곰, 70년대 자주국방 건설의 대표작
백곰, 대한민국 최초의 자랑스러운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제1부 ADD창설과 번개사업
1. 1960년대의 한반도 안보환경과 자주국방
노골화되는 남침 야욕과 도발
닉슨과 데탕트,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 계획
주한미군의 감축과 한국군 현대화 계획의 시작
2. 국방과학연구소의 창설
대통령의 결단, 자주국방을 위한 연구소를 세워라!
ADD 창설 이전의 국방연구개발 역사
계속되는 북의 도발과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준비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3. 4대 핵심 공장 건설 계획
“4대 핵심 공장을 건설하자!”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 4대 핵심 공장 건설 계획, ‘중공업은 곧 방위산업’
4. 번개사업
오원철 차관보의 새로운 구상
제1차 번개사업
제2차 번개사업
제3차 번개사업
“모방도 어려워”
국방기술이 산업기술로
국방품질보증 체제의 확립

제2부 백곰이 태어나기까지
1. 우리나라 로켓 개발의 역사
로켓과 미사일의 구조
로켓과 미사일의 간추린 역사
우리나라 로켓 개발의 역사
195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 개발,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
1960년대 후반 공군사관학교의 로켓 연구
1970년대 초 KIST의 로켓 연구
번개사업 이후 ADD의 로켓 개발
2. 항공공업육성계획
대통령의 친필 메모
충무공 영정 앞에서 다짐하고
심문택 박사의 ADD 소장 취임
대통령의 미사일 개발 지시
‘항공공업육성계획’
장거리냐 단거리냐
미국의 선물
3. 백곰 개발을 위한 준비
백곰의 모델이 된 나이키 허큘리스
ADD 조직의 발전
대전기계창 부지 선정
안흥시험장, ‘측후소’ 부지 선정
미사일 개발 조직 편성
우수 인재 확보 및 교육 훈련
기술자료의 확보
무유도 로켓 홍능 1호 개발
4. 미사일 설계 기술의 확보
미국의 지원
노스롭 항공사에서의 기술연수
뜻밖에 찾아온 기회와 새로운 도전
자료 확보를 위한 또 다른 노력
5. 추진제 제조기술과 장비의 확보
또 다른 기회를 잡다, 프랑스의 SNPE사와 미국의 LPC사
기회를 잡으면 행운이 된다, LPC사에서의 장비 도입
물보다 저렴한 프랑스 와인
대통령을 위한 실험
6. 풍동의 도입
풍동을 찾아서
한국 최초의 3중음속 풍동 건설
7. 대전기계창 건설
제1 연구동 건설
신성농장 사람들
추진제 제조설비의 이전과 설치
기계가공 공장과 구조시험동의 건설
대전기계창 건설과 대통령의 애정
중앙전산기의 도입
기숙사와 영빈관 건설
기계창 아파트와 복지시설
8. 안흥시험장 건설
9. 백지수표와 특별감사
대통령의 백지수표
이만영 부소장과 이경서 기획실장
특별감사와 새로운 시작

제3부 날아라, 백곰
1. 거세지는 압박
미국의 의심과 압력
외부의 압박 속에서도 계속된 백곰 개발
2. 핵심 기술 개발과 백곰의 성공을 이끈 주역들
시스템 설계 및 종합 분야
공력 설계 분야
유도조종장치 분야
기체구조 설계 및 해석 분야
추진기관 분야
시험평가 분야
체계 조립 및 사격 통제 분야
3.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비행시험
안흥, 천당과 지옥 사이
“백곰아 날아다오!”
4. 백곰, 하늘로 날아오르다
담뱃갑의 작은 은박지 한 장, 전파 간섭을 해결하라
감격의 순간, 미사일 시대의 개막
한국형 대전차 로켓
다연장 로켓, 구룡
중거리 로켓, 황룡
대통령의 미소

제4부 백곰이 날아오른 후
1. 백곰의 양산과 시험 포대 설치
강대국들의 도전과 압박
대통령의 격려와 백곰의 양산
백곰용 새로운 탄두 개발
시험 포대 건설
2. 백곰 성능 개량(NHK-2) 사업 추진
관성항법장치의 도입과 영국 페란티사와의 인연, 제2세대 미사일 개발을 향한 새로운 걸음
이동식 발사대 시스템 개발
이동식 사격통제장치 개발
단일형 1단 추진기관 개발
백곰-2의 비행시험
3. 백곰 이후 대전기계창의 전술 미사일 개발
연평해전의 숨은 공로, 단거리 함대함 미사일 ‘해룡’ 개발
순항 미사일의 원조, 무인기 항공기 ‘솔개’ 개발
4. 역사의 회오리
ADD 연구개발 우선순위에 대한 보고
미사일 개발의 중단
홍릉시대의 종말과 강제해직 이후
5. 현무와 한미미사일지침
백곰-2에서 현무로
현무의 양산과 배치
미국과의 마찰과 미사일협정
1990년의 1차 한미미사일지침
2001년의 새로운 미사일지침
2012년의 새로운 미사일지침
6. 최근 우리나라의 미사일 기술 및 우주 기술들
전술 미사일 천마
함대함 순항 미사일 해성
휴대용 단거리 대공 미사일 신궁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궁
기타 미사일 개발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대통령의 안흥종합시험장 방문

에필로그
ADD 백곰사업 수행 연표 역대
ADD 소장
참고 문헌
원고 작성에 협조해주신 분들

프롤로그 백곰, 그 위대한 도전과 승리의 기록
추천사 백곰, 70년대 자주국방 건설의 대표작
백곰, 대한민국 최초의 자랑스러운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제1부 ADD창설과 번개사업
1. 1960년대의 한반도 안보환경과 자주국방
노골화되는 남침 야욕과 도발 / 닉슨과 데탕트,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 계획 / 주한미군의 감축과 한국군 현대화 계획의 시작
2. 국방과학연구소의 창설
대통령의 결단, 자주국방을 위한 연구소를 세워라! / ADD 창설 이전의 국방연구개발 역사 / 계속되는 북의 도발과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준비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3. 4대 핵심 공장 건설 계획
“4대 핵심 공장을 건설하자!” /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 4대 핵심 공장 건설 계획, ‘중공업은 곧 방위산업’
4. 번개사업
오원철 차관보의 새로운 구상 / 제1차 번개사업 / 제2차 번개사업 / 제3차 번개사업 / “모방도 어려워” / 국방기술이 산업기술로 / 국방품질보증 체제의 확립

제2부 백곰이 태어나기까지
1. 우리나라 로켓 개발의 역사
로켓과 미사일의 구조 / 로켓과 미사일의 간추린 역사 / 우리나라 로켓 개발의 역사 / 195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 개발,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 / 1960년대 후반 공군사관학교의 로켓 연구 / 1970년대 초 KIST의 로켓 연구 / 번개사업 이후 ADD의 로켓 개발
2. 항공공업육성계획
대통령의 친필 메모 / 충무공 영정 앞에서 다짐하고 / 심문택 박사의 ADD 소장 취임 / 대통령의 미사일 개발 지시 / ‘항공공업육성계획’ / 장거리냐 단거리냐 / 미국의 선물
3. 백곰 개발을 위한 준비
백곰의 모델이 된 나이키 허큘리스 / ADD 조직의 발전 / 대전기계창 부지 선정 / 안흥시험장, ‘측후소’ 부지 선정 / 미사일 개발 조직 편성 / 우수 인재 확보 및 교육 훈련 / 기술자료의 확보 / 무유도 로켓 홍능 1호 개발
4. 미사일 설계 기술의 확보
미국의 지원 / 노스롭 항공사에서의 기술연수 / 뜻밖에 찾아온 기회와 새로운 도전 / 자료 확보를 위한 또 다른 노력
5. 추진제 제조기술과 장비의 확보
또 다른 기회를 잡다, 프랑스의 SNPE사와 미국의 LPC사 / 기회를 잡으면 행운이 된다, LPC사에서의 장비 도입 / 물보다 저렴한 프랑스 와인 / 대통령을 위한 실험
6. 풍동의 도입
풍동을 찾아서 / 한국 최초의 3중음속 풍동 건설
7. 대전기계창 건설
제1 연구동 건설 / 신성농장 사람들 / 추진제 제조설비의 이전과 설치 / 기계가공 공장과 구조시험동의 건설 / 대전기계창 건설과 대통령의 애정 / 중앙전산기의 도입 / 기숙사와 영빈관 건설 / 기계창 아파트와 복지시설
8. 안흥시험장 건설
9. 백지수표와 특별감사
대통령의 백지수표 / 이만영 부소장과 이경서 기획실장 / 특별감사와 새로운 시작

제3부 날아라, 백곰
1. 거세지는 압박
미국의 의심과 압력 / 외부의 압박 속에서도 계속된 백곰 개발
2. 핵심 기술 개발과 백곰의 성공을 이끈 주역들
시스템 설계 및 종합 분야 / 공력 설계 분야 / 유도조종장치 분야 / 기체구조 설계 및 해석 분야 / 추진기관 분야 / 시험평가 분야 / 체계 조립 및 사격 통제 분야
3.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비행시험
안흥, 천당과 지옥 사이 / “백곰아 날아다오!”
4. 백곰, 하늘로 날아오르다
담뱃갑의 작은 은박지 한 장, 전파 간섭을 해결하라 / 감격의 순간, 미사일 시대의 개막 / 한국형 대전차 로켓 / 다연장 로켓, 구룡 / 중거리 로켓, 황룡 / 대통령의 미소

제4부 백곰이 날아오른 후
1. 백곰의 양산과 시험 포대 설치
강대국들의 도전과 압박 / 대통령의 격려와 백곰의 양산 / 백곰용 새로운 탄두 개발 / 시험 포대 건설
2. 백곰 성능 개량(NHK-2) 사업 추진
관성항법장치의 도입과 영국 페란티사와의 인연, 제2세
대 미사일 개발을 향한 새로운 걸음 / 이동식 발사대 시스템 개발 / 이동식 사격통제장치 개발 / 단일형 1단 추진기관 개발 / 백곰-2의 비행시험
3. 백곰 이후 대전기계창의 전술 미사일 개발
연평해전의 숨은 공로, 단거리 함대함 미사일 ‘해룡’ 개발 / 순항 미사일의 원조, 무인기 항공기 ‘솔개’ 개발
4. 역사의 회오리
ADD 연구개발 우선순위에 대한 보고 / 미사일 개발의 중단 / 홍릉시대의 종말과 강제해직 이후
5. 현무와 한미미사일지침
백곰-2에서 현무로 / 현무의 양산과 배치 / 미국과의 마찰과 미사일협정 / 1990년의 1차 한미미사일지침 / 2001년의 새로운 미사일지침 / 2012년의 새로운 미사일지침
6. 최근 우리나라의 미사일 기술 및 우주 기술들
전술 미사일 천마 / 함대함 순항 미사일 해성 / 휴대용 단거리 대공 미사일 신궁 /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궁 / 기타 미사일 개발 /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 대통령의 안흥종합시험장 방문

에필로그
ADD 백곰사업 수행 연표 역대 / ADD 소장
참고 문헌
원고 작성에 협조해주신 분들

본문중에서

수시로 변하는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한국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 의지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2만 명 이내의 철수를 대통령 바로 앞에서 약속한 미국의 부통령이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군의 현대화가 끝나는 5년 이내에 미군 전체가 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런 소식을 접한 (박정희)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주국방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미국의 방침에 일희일비하는 처지를 빨리 극복해야 한다. 자주국방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므로 경제가 잘되어야 한다. 고성능 무기는 우선 외화로 들여오더라도 기본 병기는 하루빨리 국산화를 해야 한다." 이런 사건과 판단들을 계기로 우리 정부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한 채 ‘선(先) 경제개발 후(後) 자주국방’을 추진하던 정책에서 우선순위를 바꾸어 자주국방을 우선 과제로 채택하게 되었다.
(/ p.37)

법과 시행령이 공포되고 이사회를 통해 조직까지 정비됨으로써 국방과학연구소(ADD)는 명실상부한 국내 유일의 무기체계 연구개발기관으로 그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자주국방의 초석을 단기간에 쌓아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ADD에 주어졌다. ... (중략) ... ADD 창설 당시의 국내외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나날이 과격해지고 있었고,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남한에는 소총 한 자루 만들 공장이 없었고, 우리 군이 운용하는 무기라고는 미군이 제공해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낡은 것들뿐이었다. 언제 전면전을 도발할지 모르는 적의 턱밑에서 맨손으로 맞서야 하는 형국이었고, 이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해야 한다는 임무가 ADD에 주어진 것이다.
(/ p.49)

거대한 중공업 시설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무기를 생산하려던 계획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우선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소형 무기부터라도 먼저 개발하고 생산해야 했다. 이에 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 전하시오. 오늘부터 당장 국산 병기 개발에 착수하되, 우선 금년 내에 1차 시제품을 만들어 오라고 하시오." ... (중략) ... 채 2개월도 남지 않은 기간에 국산 병기의 시제품을 만들어 오라는 명령이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야 할’ 정도로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촉박해서 이 사업의 별칭은 자연스럽게 ‘번개사업’으로 정해졌다. 정말 번개같이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중략) ... 무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각종 공구와 장비들도 구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연구원들은 하는 수 없이 청계천으로 달려가 골목골목을 누비며 필요한 공구와 장비들을 구해야 했다. 한마디로 청계천의 고물상이 ADD의 첫 거래처자 재료 공급처였다. 당시의 청계천은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나름대로 우리나라 공업기술의 메카와 같은 곳이었다. 미군에서 불하하거나 흘러나온 각종 공구와 장비들, 심지어 기술교본까지 구할 수 있는 곳이 청계천이었다. ... (중략) ... ADD 연구원들은 1971년 11월 17일부터 연구실에 군용 야전침대를 들여놓고 생활하면서 집에 가지도 못하고 날밤을 새우며 분야별 시제품을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16일 제1차 시제품 8종이 청와대 대 접견실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국산 무기들이었다. 이를 입증하듯 무기들에는 국방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비록 시제품에 불과했지만 청와대에 전시된 이들 M1 소총, 카빈 소총, 기관총,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 3.5인치 로켓 발사기,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는 보는 이를 감격시키기에 충분했다.
(/ pp.62~68)

제1차 번개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첫 국산 병기의 청와대 전시가 1971년 12월 16일에 있었다. 이어 12월 24일에는 해운대와 태릉에서 한 시험 사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튿날인 1971년 12월 26일 방위산업을 담당하고 있던 오원철 청와대 경제 2수석비서관은 대통령으로부터 극비리에 메모 한 장을 전달받는다. 다음날, 오 수석은 ADD의 구상회 박사와 공군 작전참모부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 (중략) ... 청와대로 부른 오 수석은 이들에게 대통령의 친필 메모를 펴 보였다. 거기에는 이런 지시가 적혀 있었다. "1단계로 1975년까지 200km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한다."
(/ pp.101~102)

박정희 대통령의 미사일 개발 지시가 떨어지고, 항공공업개발계획단이 꾸려져 동부이촌동 안가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던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사일과 관련된 기술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중략) 참고할 만한 미사일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우선 어떤 미사일을 모델로 개발계획을 세울 것인지를 두고 토론했고, 그 결과 당시 미군이 우리 공군에 넘겨준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이 최우선으로 논의되었다. ... (중략) ... 그러나 나이키 허큘리스를 활용하고 개량하여 새로운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계획 역시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 외형은 나이키 허큘리스를 모방하기로 하였으나 이 역시 정확한 설계도가 있어야만 모방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운용 교범 등을 통해 설계도를 모아놓고 보니 빠진 부분들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연구원들은 실물 나이키 허큘리스를 분해하여 역설계로 도면을 그리고, 이렇게 그려진 도면과 미군에서 흘러나온 도면들을 합쳐 미사일의 외형 설계에 필요한 도면들을 만들어냈다.
(/ pp.120~123)

박정희 대통령은 이경서 박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사일 개발에 관한 한 이경서 박사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의미였다. 실제로도 이경서 박사는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권을 쥐고 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런 권한이 있었기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LPC사와의 추진제 제조설비 이전에 관한 계약 체결이었다. 이 당시 계약 체결 금액이 200만 달러로, 이경서 박사는 LPC사의 부사장과 즉석에서 단독으로 계약 체결에 합의했다. 당시 금액으로 200만 달러는 매우 큰 금액이어서 ADD 소장의 결재는 물론 청와대에도 보고해야 하는 것이 통례였다. 게다가 100만 달러 이상의 해외 구매 계약은 한국은행 총재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과 일반적인 결재 순서를 모두 거칠 경우 계약은 성사되기 어려웠다. 이에 이경서 박사는 자신에게 위임된 권한으로 과감히 계약하였고,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는 천재일우의 행운이 되었다.
이렇게 미사일 개발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자 미사일 개발의 역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일 시스템의 설계기술, 추진기관 제작 및 추진제 제조기술과 설비, 그리고 풍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 p.201)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미사일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미 정보당국의 눈을 피해가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한다지만 미국과 프랑스 등 외국에서 시설과 기술 등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눈과 귀를 완전히 따돌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였다. 동서 화해 분위기를 조성 중이던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이러한 첨단 무기 개발을 용인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우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압박도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국산 미사일 개발계획 자체가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을 우리나라 대통령도 알고 개발팀도 분명히 알았다. 따라서 국산 미사일 개발계획을 은밀하게 진행하되, 불가피한 경우 미국에 내놓을 명분도 준비해야 했다. 이것이 나이키 허큘리스를 모델로 삼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당시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낡은 모델이었지만, 우리나라와 다른 우방들은 미군이 공여한 이 미사일을 운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그 운용과 유지 및 보수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을 확보하고, 그 부품들을 적절히 교체할 수 있도록 일부 부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 p.210)

4회에 걸친 비행시험이 끝난 후 7월 22일 5차 비행시험이 진행되었다. 5차 비행시험은 국산 유도조종장치는 물론 우리가 백곰용으로 재설계 개발한 기체와 추진기관을 사용하는 명실공히 국산 1호기의 종합 비행시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홍재학

수시로 변하는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한국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 의지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2만 명 이내의 철수를 대통령 바로 앞에서 약속한 미국의 부통령이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군의 현대화가 끝나는 5년 이내에 미군 전체가 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런 소식을 접한 (박정희)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주국방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미국의 방침에 일희일비하는 처지를 빨리 극복해야 한다. 자주국방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므로 경제가 잘되어야 한다. 고성능 무기는 우선 외화로 들여오더라도 기본 병기는 하루빨리 국산화를 해야 한다.”? 이런 사건과 판단들을 계기로 우리 정부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한 채 ‘선(先) 경제개발 후(後) 자주국방’을 추진하던 정책에서 우선순위를 바꾸어 자주국방을 우선 과제로 채택하게 되었다. _ 본문 37쪽

법과 시행령이 공포되고 이사회를 통해 조직까지 정비됨으로써 국방과학연구소(ADD)는 명실상부한 국내 유일의 무기체계 연구개발기관으로 그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자주국방의 초석을 단기간에 쌓아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ADD에 주어졌다. … (중략) … ADD 창설 당시의 국내외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나날이 과격해지고 있었고,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남한에는 소총 한 자루 만들 공장이 없었고, 우리 군이 운용하는 무기라고는 미군이 제공해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낡은 것들뿐이었다. 언제 전면전을 도발할지 모르는 적의 턱밑에서 맨손으로 맞서야 하는 형국이었고, 이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해야 한다는 임무가 ADD에 주어진 것이다. _ 본문 49쪽

거대한 중공업 시설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무기를 생산하려던 계획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우선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소형 무기부터라도 먼저 개발하고 생산해야 했다. 이에 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 전하시오. 오늘부터 당장 국산 병기 개발에 착수하되, 우선 금년 내에 1차 시제품을 만들어 오라고 하시오.” … (중략) … 채 2개월도 남지 않은 기간에 국산 병기의 시제품을 만들어 오라는 명령이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야 할’ 정도로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촉박해서 이 사업의 별칭은 자연스럽게 ‘번개사업’으로 정해졌다. 정말 번개같이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중략) … 무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각종 공구와 장비들도 구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연구원들은 하는 수 없이 청계천으로 달려가 골목골목을 누비며 필요한 공구와 장비들을 구해야 했다. 한마디로 청계천의 고물상이 ADD의 첫 거래처자 재료 공급처였다. 당시의 청계천은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나름대로 우리나라 공업기술의 메카와 같은 곳이었다. 미군에서 불하하거나 흘러나온 각종 공구와 장비들, 심지어 기술교본까지 구할 수 있는 곳이 청계천이었다. … (중략) … ADD 연구원들은 1971년 11월 17일부터 연구실에 군용 야전침대를 들여놓고 생활하면서 집에 가지도 못하고 날밤을 새우며 분야별 시제품을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16일 제1차 시제품 8종이 청와대 대 접견실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국산 무기들이었다. 이를 입증하듯 무기들에는 국방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비록 시제품에 불과했지만 청와대에 전시된 이들 M1 소총, 카빈 소총, 기관총,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 3.5인치 로켓 발사기,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는 보는 이를 감격시키기에 충분했다._ 본문 62~68쪽

제1차 번개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첫 국산 병기의 청와대 전시가 1971년 12월 16일에 있었다. 이어 12월 24일에는 해운대와 태릉에서 한 시험 사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튿날인 1971년 12월 26일 방위산업을 담당하박사의 기체부와 목영일 박사의 추진기관부는 개발 기간 중 지상에서 수많은 시험을 수행하여 개발 리스크를 줄였다고 자신하였고, 최호현 박사의 유도조종부는 이미 비행시험에 성공하였으므로 이경서 창장과 연구원들은 조마조마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이 5차 비행시험에서도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긴장된 발사 초읽기가 끝나고 미사일이 발사대를 이륙한 직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중략) 6차 비행시험은 대성공이었다. 5차 비행시험의 실패로 조마조마하는 연구원들의 정성이 통하였는지 160여km 떨어진 목표지점까지 예정된 비행 궤적을 따라 정확히 비행한 것이었다.... (중략) ... 9월 26일에 대통령을 모시고 최종 공개 발사 행사를 치를 계획을 세우고, 9월 6일에 첫 번째 예행연습으로 7차 비행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발사된 로켓은 1단 분리 후 2단이 점화되지 않고 10km를 날아가다 토도 앞바다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다시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 pp.268~271)

발사 초읽기와 함께 백곰은 시뻘건 불기둥을 내뿜으며 솟아올랐다. 저 멀리 날아가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시험통제원의 "비행시간 1분 경과", "2분 경과" 하는 멘트와 "삐 삐 삐 ..." 하는 비행 진행을 알리는 초시계 소리는 1초 1초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탄착!"이라는 멘트가 떨어지자 관람대는 물론이고 모든 연구원은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 p.282)

백곰 미사일 기술은 지난 2010년 12월 한국공학한림원과 지식경제부 주관 1950년부터 60년간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술 60선에 채택되어 연구자 대표이자 사업책임자로 참여했던 이경서 박사가 우수기술상을 수상하였다. 또 2015년 7월 광복 70주년을 맞아 미래창조과학부가 선정한 70대 우수 기술 성과로 선정되어 수많은 참여 연구원의 노고가 30~40년이 지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p.287)

백곰의 개발 성공은 주변 강대국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개발이 끝난 후 1979년 대통령은 ADD의 연구원들에게 많은 훈·포장을 내려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 (중략) ... 선진국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미사일을 직접 만들어냈다는 사실만큼 이들에게 기쁨과 위안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기쁨에 취할 시간도 잠시, 1979년 ADD에는 국방부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하달되었다. 즉시 양산하여 부대 배치를 하도록 하되 1차로 1980년 말까지 1개 시험포대를 설치하여 운용할 수 있도록 백곰의 양산을 위한 실용개발을 끝내라는 지시였다.
(/ p.308)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이후 ADD에도 검은 먹구름과 함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중략) ... 보안사는 ‘백곰이 나이키 허큘리스에 페인트만 칠한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대대적인 조사를 하고, 그 답에 끼워 맞추는 노력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중략) ... 연구소의 정원도 2,598명에서 1,759명으로 감축되고, 홍재학 박사·최호현 박사 등 미사일 개발 관련 중견 간부들을 비롯한 연구소원 839명이 대거 강제 퇴직하게 되었다. 미사일 개발 종사자가 대부분이고, 진해기계창과 서울기계창에서도 행정 사무직 등을 중심으로 약간 감축하였다. 직종별로는 연구·기술직이 262명, 관리직이 43명, 기계 가공공장·추진제공장·기체조립 및 미사일 총조립 점검·레이더운용 등을 담당했던 기능직 273명, 연구소 전체에서 대거 감축 대상자인 행정사무직 281명이었다. ... (중략) ... 숙청에 가까운 대량 해고로 불모지에서 건설하고 키워온 첨단 기술 개발은 중단되고, 최고급 장비와 시설은 운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백곰-2(NHK-2)가 현무 사업으로 재추진되면서 일부는 재입소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이의 강제 퇴직은 조직 발전 과정의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기고 이후로도 상당 기간 ADD에 악영향을 미쳤다. ... (중략) ... 부당한 강제 감축은 2000년대 들어 대규모 민원과 소송으로 이어
고 있던 오원철 청와대 경제 2수석비서관은 대통령으로부터 극비리에 메모 한 장을 전달받는다. 다음날, 오 수석은 ADD의 구상회 박사와 공군 작전참모부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 (중략) … 청와대로 부른 오 수석은 이들에게 대통령의 친필 메모를 펴 보였다. 거기에는 이런 지시가 적혀 있었다. “1단계로 1975년까지 200km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한다.” _ 본문 101~102쪽졌고, 결국 정부가 패소하여 35년 뒤에 늦게나마 보상도 이루어졌다.
(/ pp.347~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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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만, 김병교, 조태환 [저] 신작알림 SMS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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